■ 작업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며...
수많은 이름없는 민주투사들을 생각하며
장편시대극화 ‘나선’은 주간노동자신문에 1993년경 연재한 만화이다. 장편시대극화 ‘누가 나를 이 길로 가라하지 않았네’를 마치고 노동소설을 만화로 각색하는 등 단편만화를 한동안 연재하다가 다시 장편만화를 기획하였다. 당시 만화제작실인 작화공방에 아예 스토리작가를 하려는 박상배 작가가 합류했는데, 장편시대극화 ‘나선’작업에 참여했다.
‘나선’은 1980년대를 거쳐 온 수많은 이름 없는 민주투사들을 생각하면서 만든 이야기다.
80년대 학생운동은 대단했다. 학교별로 동아리별로 선후배관계가 얽히면서 조직적인 투쟁과정은 많은 학생을 민주투사로 성장시켰고 한국사회의 민주화과정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한편 졸업 후엔 수많은 학생들이 기득권을 버리고 노동현장으로 갔다. 하지만 노동현장에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운동지도자로 인정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1990년대는 80년대 민주투사들이 현실의 벽에 부딪쳐 다른 길을 걸어야만 하는 기로에 놓인 그런 시절이다.
내가 몸담고 있던 작화공방만 해도 그렇다. 거쳐 간 친구들만도 한두 명이 아니다. 그 많은 친구들 중에 꾸준히 지금도 만화를 그리는 경우는 몇 되지 않는다. 자신이 옳다고 하는 일과 생계를 해결하는 일을 같이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는 것이다. 한번 먹은 마음이 어디 가는가? 지금도 어디선가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일상의 문제를 부딪히면서 모순을 해결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들의 ‘진정성’을 기억하는 방법은 무얼까.
이 만화는, 지금 어느 곳에선가 시대의 무게를 이겨내며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이름 없는 민주투사’들에게 바치는 ‘헌정만화’이다.
■ 작업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며...
장편시대극화 ‘누가 나를 이 길로 가라하지 않았네’는 1990~91년에 주간노동자신문에 연재한 만화이다.
이 만화를 처음 기획할 당시에는 조호상 시인과 함께 공동창작을 하기로 했다. 당시 만화제작실 ‘작화공방’을 꾸리고있던 나로서는 스토리 창작역량이 필요했다. 마침 민족문학작가회의 오철수 시인과 가깝게 지냈는데, 같이 일한다는 조호상 시인을 나에게 소개했다. 조호상 시인은 자신이 쓴 시 ‘누가 나를 이길로 가라하지 않았네’가 실제인물 인천노동조합협의회(약칭 인노협) 사무국장으로 있는 김기자씨가 살아온 이야기를 접하고 쓴 시라면서, 김기자씨 살아온 과정을 만화를 그리자고 내게 제안을 했다. 나 역시 흔쾌히 동의를 하여 같이 인노협 김기자 국장을 만나 취재 겸 인터뷰를 했었다. 어릴 때 서울로 상경하여 온갖 고생을 한 평범한 여성노동자가 지역노동운동의 중심인 인노협에서 사무국장이란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충분히 입지전적인 소재였고, ‘인물로 보는 노동운동사’를 만화로 그려낼수 있을 것같았다.
하지만 연재를 시작한지 몇 회 지나지 않아 조호상 시인은 만화라는 형식의 특수성을 감당하기 힘들다고 공동작업을 포기하겠다고 한다. 사실 ‘만화’라는 형식은 종합예술적 성격을 갖고있어 만만한 영역이 아니다.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시각적 구성을 해야한다는 점에서 영화장르와는 비슷한 면이 많지만 소설장르와는 많이 다를 수 있다. 게다가 내가 추구하는 형식적 완결성을 따라오기가 벅찰 수 있다. 아무래도 ‘만화’ 문법을 새롭게 습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학적 감수성하고는 많이 다르다. 물론 초짜라면 배우는 기분과 자세로 하나하나 감당해 가면 되지만, 명색이 ‘시인’인데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이야기구성과 작화를 모두 감당해야 했다. 그러면서 스토리구성능력을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뼈저리게 느꼈다. 공식적인 글쓰기과정을 밟지 않아서인지 늘 글쓰기에 열등감 같은게 있었다. 단편만화를 여러편 만들었지만, 늘 이야기창작에서 힘들어 했다. 하지만 이제는 원래 이야기창작이 어려운 것을 안다. 이야기창작은 글쓰기 교육과정을 밟는다고 잘 써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결국 한편 한편 신문에 마감을 하는 과정은 나의 글쓰기 역량을 키우는 과정이었다.
당시 주간노동자신문에 대한 호응은 무척 좋은 편이었다. 1987년 7~8월 전국적으로 펼쳐진 노동자 대투쟁이후 속속 민주노조들이 들어섰다.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달리 이태복 창간준비위원장은 독자적인 법인으로 ‘주간노동자신문’을 언론사로 등록을 하여 출발을 하였다. 한국노총계열 단위노조들도 ‘주간노동자신문’을 구독하는데 불편함이 없는 것이다. 거의 모든 노동조합 사무실에는 주간노동자신문을 구독했다고 본다. 신문 뒷면 절반을 차지하는 만화는 당연히 누구나 봤을 것이다. 그 당시 독자들의 반응을 취재하지는 않았지만, 여성노동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만화라는 것만으로도 호응했으리라 본다. 지금까지 그런 만화가 없었으니까.
처음 주간노동자신문 창간호를 봤을 때 만화가 한편도 없었다. 나는 무턱대고 신문사로 찾아가 이태복 위원장과 편집국장께 만화를 싣자고 제안을 했다. 한달 뒤에 연락이 왔고, 연재를 시작한 이후 모두 7~8년간 매주 이야기만화를 연재하였다. 만화는 누구나 좋아하기 때문에 재미가 없으면 바로 짤린다. 특별히 근로계약을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독자들 반응이 안좋으니 그만 합시다’라는 전화 한통화면 충분하다. 어쨌든 짤리지않고 매주 발표할 지면이 주어졌으니, 독자들 반응이 아주 나쁘지 않았나 보다. 게다가 신문사로부터 ‘공로상’도 받았다.
나는 그렇게 전문성을 갖추어 갔다. 1988년 내가 ‘만화제작실 작화공방’을 차린 것도 전문성을 갖추어야 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87년 6월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사회의 문화지형을 바꾸어 놓았다고 봤다. ‘재야’에서 ‘비합법’과 ‘반합법’방식의 싸움은 끝이 났다고 봤고, 합법적 영역에서 다투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기노련’에서 발행하는 반합법 ‘만화신문’이 아닌 합법 ‘주간노동자신문’ 연재과정은 전문성을 갖추어가는 과정이었다. 처음 연재할 때 작가이름을 ‘장영수’로 쓰다가 중간에 본명으로 바꾸었다. 처음으로 본명을 쓰면서 꿈에도 생각지 못한, 어느덧 작가가 된 것이다. 또 편집부 여러 기자분들과 가깝게 지냈다. 주간노동자신문 내가 아는 모든 분들이 내가 성장해 가는데 함께 해준 고마운 분들이다.
이 지면을 빌어 그 분들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또 마침 며칠 전 만화 속 주인공 모델격인 김기자씨한테 전화가 왔다.
지금 민주노총 전북본부 수석부본부장으로 일하고 있단다. 건강한 모습으로 활발하게 동료들과 어울리는 사진도 보내왔다. 김기자씨와의 만남이 있기에 이 만화가 탄생할 수 있었던 만큼 지면을 빌어 고마움을 전한다.
■ 작업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며...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꾸며 그린 만화들
이 책에 실린 만화들은 1985년서부터 1987년 사이에 그린 단편만화들이다.
단편 ‘난 노동자다’, ‘우린 들러리가 아니야’, ‘나발부는 KBS’는 반합법단체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기관지 ’민중문화‘에 실린 만화이다. ’민중문화‘는 민중문화운동협의회(약칭 민문협)가 창립되면서 매월 발간했는데, 매번 내가 그린 만화를 실었다. 하지만 지금 구할 수가 없다. 그나마 복사를 해둔 만화 3편만이 남았을 뿐이다. 내가 그린 모든 만화 원본은 거의 전부 분실했다. 만화도 ‘예술’이란 생각을 안했다. 그냥 휴지처럼 필요할 때 쓰고 버리는 선전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예술을 한다거나 작가가 된다는 것을 꿈꿔본 적이 없다. 대학시절 대중집회에서 본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는 노동조합을 만들려 한다는 이유로 회사로부터 똥물을 뒤집어쓰고 해고를 당해야 했는데, 이런 불평등한 세상에서 작가를 꿈꾼다는 건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대학 4학년때 대한전선 노동조합 만화슬라이드를 제작하면서 나의 그림 기술이 노동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했고 만화를 그리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만화는 예술 취급을 하지 않았다.
단편 ‘멋쟁이 우리형’과 ‘언니! 같이 가!’ 노동무크지 ‘청춘’ 창간호와 2집에 실었다. 발행처가 합법적인 ‘공동체’ 출판사인지라 원고 저자명을 표기하는 게 신뢰도를 높인다고 보고 가명으로 ‘장영수’라고 썼다. ‘청춘’ 편집팀은 비밀모임이어야 했다. 노출이 되면 안기부 등에 의해 탄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민문협에 매일 출근을 하는 나는 저녁이나 주말을 이용해 편집모임을 가졌고, 주변에서 내가 그 일을 하는 줄 모르게 해야 했다. ‘멋쟁이 우리형’ 19페이지 만화를 스토리부터 펜선, 먹칠까지 토요일 밤샘하여 일요일 하루 만에 다 그린 것으로 기억한다. 잘 그린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노동자가 만화 속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것이 중요하고, 또 만화 속 내용처럼 실제 노동현장에서 근로조건을 개선하려는 일상적인 투쟁들이 많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단편‘부처님 어디 계실까’는 반합법단체인 민중불교운동연합 기관지 ‘민중불교’에서 청탁이 들어와 그려준 만화이다. 당시에 나는 민문협에서 제작부장이란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인쇄소를 드나들면서 유인물 등 온갖 선전물을 만드는 게 내 일이었다. 또 여러 재야운동단체들의 선전물들을 만드는데 협조를 하곤 했다. 선전그림이 필요하면 여기저기서 찾아왔다. 내가 있을 때 찾아오면 바로 즉석에서 필요한 그림을 그려줬다. 마치 내가 그림 그리는 기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연합전선 격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의 기관지 ‘민중의 소리’ 편집은 늘 내가 했다. 편집을 할 고정된 사무실도 없다. 마찬가지로 노출이 되면 안되기에 비밀리에 이 집 저 집 전전하면서 편집을 했다.
단편 ‘하늘아래 첫동네’와 ‘쑥스러운 이야기’는 기독노동자총연맹(약칭 기노련)에서 발행하는 ‘만화신문’에 실린 만화이다. ‘하늘아래 첫동네’는 사당동 달동네 철거현장을 취재하고 그린 만화이고, ‘쑥스러운 이야기’는 당시 친하게 지냈던 송도수 작가가 글을 썼다. 사실 ‘만화신문’ 편집팀은 ‘기노련’과는 관련이 없다. 단지 ‘기노련’을 울타리 또는 보호막으로 활용한 셈이다.
그 당시 나는 나의역할을 노동운동 외곽에서 노동현장을 지원하는 선전조직을 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동자를 위한 만화를 그리려는 후배들을 묶고 이리저리 소개도 받아 편집팀을 꾸린 다음, ‘기노련’ 사무실을 찾아갔다. 당시 노동현장 외곽의 여러 민중교회들은 노동자들의 모임공간으로 역할이 컸다. 만화신문의 보급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를 한 것이다. 거기서 당시 이영식 사무국장을 만났는데 ‘기노련’을 보호막으로 두는 것에 흔쾌하게 허락을 받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선전팀을 둔다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이다. 그만큼 당시 군사독재권력에 비판적인 지식인과 대학생들은 노동자와 농민들의 정치력이 강화되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언제 발생할지 모를 탄압을 감당하려 했던 것이다. 만화신문은 이름 그대로 만화를 많이 실었는데 주로 후배들에게 지면을 배치했다. 실전에 부딪히는 것이 가장 실력을 키우는 방법으로 봤다. 한달에 한번씩 8호까지 나왔다.
여기에 실린 만화들은 공동창작이란 특성을 갖고 있다.
콘티를 짜고 그림을 그리는 작화과정은 내가 했지만, 이야기를 준비하는 과정은 다분히 머리를 맛 대는 과정이다. 평소 토론을 중요시 했는데, 자본주의가 낳은 병폐에 맞서 대안을 찾으려 노력했다. 계급이 없는 세상, 모든 관계가 민주적일 수 있는 평등한 세상, 업신여김을 당하는 노동자와 농민, 기층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에 대해 얘기했다. 그런 세상이 되려면 현재 무엇을 할 것인가.
우선 예술의 개인성을 극복하는 것에 주목했다. 예술에서 ‘개인성의 강조’는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는 건강한 토양을 차단시키고, 예술을 상품화시키는 출발점으로 본 것이다.
또 창작과정을 공동체문화의 회복과정으로 바라보았다. 폭력적인 군사독재정권에 맞서려면 민주주의 문화가 확산 되어야 한다. 활발한 토론이 가능한 공간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토론을 활발하게 하려면, 토론방법으로 ‘공동그림 그리기’ 등 공동체문화를 형성케 할 다양한 방법을 개발한다. 또 지식인 예술인들이 노동자 농민들과 함께 ‘문화적 협동’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 익명으로 그려진 ‘민중만화’들은 엄청나게 많다.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불법단체’에서 제작된 수많은 선전물에는 ‘민중만화’가 그려져 있다. 그 이면에는 민중만화를 그린 수많은 작가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이유는 80년대 당시 필요한 시대적 사회적 역할을 한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도 ‘그때 그시절’ 특수한 상황에서 특수한 목적으로 그려진 ‘민중만화’를 다시 들추어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군사독재정권이 무너졌다고 평등한 세상이 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불평등한 사회인 것이고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은 요원한 일처럼 다가온다. 80년대 ‘민중문화운동’과 ‘민중미술운동’은 당시 지식인들이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라고 선언만 하고 실천하려 했다가 동구권 사회주의가 몰락을 하면서 흐지부지된 느낌이다. ‘민중’이란 단어조차 구시대유물처럼 다가온다.
80년대 중반 어느 미술평론가에 의해 이러한 ‘새로운 미술운동’을 ‘민중미술’로 이름지었다. 하지만 ‘민중미술’은 군사독재가 막을 내리면서 힘을 잃게 된다. 94년 민족미술협의회에서 ‘80년대 민족민중미술역사전’에 대한 평가토론회를 가졌는데, 지금까지 활동한 저항미술의 내용은 ‘민중미술이 아니라 군사독재투쟁이었다’고 정리한다.
민족문학운동계열에서 만화를 거론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민중문학, 노동문학계열도 마찬가지다. 가장 노동문학적인 만화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희한한 일이다. 게다가 한국 만화의 역사에서조차 ‘민중만화’를 주목하는 글을 보지 못했다. 한국만화사를 다룬 책이 3권이나 되지만 모두 ‘80년대 민중만화들이 있었다’ 정도로 간략하게 약술할 뿐이다.
다시 케케묵은 ‘민중만화’를 꺼낸다.
- 작가 후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