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일까. 내가 뿌렸던 씨앗들은 이파리만 무성한 채 꽃도 피우지 못하고 있는데, 나는 나태의 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상 밖으로 등 떼밀리는 것 같은 세기말의 봄날, 이제 새로운 일탈을 위해 바람과 모래, 그리고 더위와 혹한이 공존하는 사막을 걸어가야겠다. 이 봄날의 외로움이, 이 고통들이 내실의 오아시스가 되길 기다리며....
시조는 700년이 넘는 동안 창작되어 온 우리 고유의 정형시定型詩입니다.
이처럼 긴 역사성을 가진 우리 고유 문학 양식 시조는 끈질기게 생성을 유지, 계승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한민족의 몸에 흐르는 내재율이 담긴 시로, 어느 한 개인에 의해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관습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계승된 것입니다.
이처럼 시조는 현재까지 창작되어 오면서 깎아내고 갈면서 다듬어 온 틀로 우리 체질에 잘 맞는 시입니다. 우리 민족의 숨결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신명처럼 긴장과 풀림의 미학적 장치가 살아 있는 형식 체험의 시입니다.
시조는 3장, 즉 초장·중장·종장으로 구성됩니다. 초장은 시작하는 장이요, 중장은 초장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는 장입니다. 그리고 종장은 전체를 마무리하는 장으로, 초장의 내용을 이어받거나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비약이나 전환, 위기 등 초장과 중장을 아우르는 구성의 묘가 이루어지는 장입니다. 연시조나 사설시조도 이 같은 3장으로 이루어집니다.
지금 우리는 서구에서 유입된 자유시로 인해 우리글로 이루어진 우리 문학의 정체성의 모호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조’를 시와는 별개의 문학 장르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는 해방 후 최초의 현대시를 현대시조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자유시에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를 천시하고, 서구의 자유시를 아무런 의식 없이 받아들이고 따른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다시 시조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아야 합니다.
독자들로부터 사랑 받는 작품은 가장 민족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세계적인 작품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한국 문학의 정통 양식인 시조밖에 없습니다. 시조는 세계 어느 문화권의 시 형식보다도 간명한 시 양식이며, 융통성이 많은 자유로운 시 형식으로 변형이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어떤 작품을 시인의 의도대로 해석해서
공감하는 일이 가능할까.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해석해서 받아들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까. 그런데도
시조를 읽는 이들은 그 글자의 세계로 빠져들어
난독難讀의 어려움을 뚫고서라도
시인의 심중心中을 꿰뚫어 보고자
시인이 지은 미로를 기꺼이 헤맨다.
시인과 독자 사이에 놓인 글자가 만든
시조 행간의 미로에는 탈출구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입구도 출구도 모호한 글자 사이사이에 놓인
심연 속에서 헤매는 것, 바로 거기서
시조 읽기의 즐거움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정형시 시조는 자유시보다 간명하고 함축적이다
자유시로도 표현 가능한 것을 왜 ‘시조’로써 표현해야 하는가? 첨단 디지털 시대, 700여 년을 이어 온 시조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시조가 아니면 안 되는 고유한 표현 형식과 자질이 그 안에 있는 것인가? 라는 물음에 이 책은 답을 합니다.
시조는 우리 말의 기본 걸음걸이에 충실합니다. 짧은 음보가 서정적이고 경쾌하고 동적인 듬이라면, 긴 음보는 장중하고 무겁지만 안정된 리듬감을 줍니다. 이처럼 우리 말의 가락을 잘 살려낼 수 있는 문학은 시조밖에 없습니다.
시조는 자유시보다 간명하고, 시어는 일상어보다 함축적이며 가락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음보가 살아 있는 시조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맥박이나 호흡처럼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가고 바닷물이 밀고 당기는 자연의 질서처럼 리듬을 탑니다. 시조는 각각의 장에서 리듬을 타고 가다가 간간히 침묵을 하기도 하고, 갑자기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는가 하면 눈 내리는 밤 풍경처럼 더욱 적막하게 만들고, 격랑의 파도 소리를 잔잔한 파도로 재우는가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의 말을 아낀 채 침묵하기도 합니다.
시조의 3장 6구 12음보 형식 속에는 시인이 의도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거나 아끼는 말이 스며 있습니다. 독자들은 이 흐름에 몸을 맞기면서 시인들과 끊임없이 소통합니다. 시조 속의 숨겨진 시인의 마음을 읽어내면서 긴장과 갈등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적당히 타협하거나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며, 무릎을 치면서 찬사를 보내기도 합니다. 정형시 시조는 융통성이 많은 자유로운 시로 변형이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용진산聳珍山 아래
솔나무에서 일어나던 한 점 바람에서 태어나
남산리南山里 들녘 흘러나가는 물길을 따라 자랐다.
아직도 땅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
바람이 자고 가는 마을 풍숙風宿,
이내 태가 묻혀 있고
황룡강黃龍江을 굽어보며 떠오르는 태양
어등산魚登山 넘어가는 해가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세상 앞길을 훤히 밝혀주고, 없던 길을 내주신
부모님께 이 시조집을 바친다.
―2022년 늦봄 오종문
모든 일이 한낮인 듯 아득하다.
내 詩가 한 철 꽃피우고 지는 꽃처럼 서글프고 초라할지라도, 살을 도려내고 뼈를 발라 낸 자존감을 드러내는 詩, 모든 이의 가슴에 들꽃으로 피어나는 詩, 한 시대를 넘어 다음 시대까지 깊게 뿌리내리는 詩,독자들이 호명하며 불러주는 詩
나는 그런 詩를 만나기를 희망한다.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고, 칼바람이 되고, 나를 껴안아 주는 따뜻한 詩가 되기를 희망한다.
내 詩가 함부로 눈물 흘리지 않고, 생애의 기쁨이 되고, 남은 생에 용기가 되어 주기를 희망한다.
벌거벗은 채 세상 속으로 걸어가 스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참 나를 찾은 삶이 춤추기를 희망한다.
봄빛이 저만치 떠나가고 있다.
2017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