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벗어나라, ‘3월의 토끼!’
여기 보호막 없이 세상을 견뎌내야 하는 한 생명의 삶이 있다. 지금 그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신은 혼자서 인간 만들기가 버거워 인간에게 대신 탄생의 과업을 주었다고 한다. 부담 큰 이 일을 기꺼이 하도록 남녀 간 강렬한 사랑으로써 생명을 탄생케 했다는 것이다.
생명은 양육과정에서도 탄생 못지않은 사랑을 필요로 한다. 탄생을 위해서일 때보다 더 큰 사랑으로써 여린 생명을 보듬어 자라나게 해야 한다. 낳고 키우는 이 둘 가운데 어느 한쪽만 부족해도 인류는 멸종될지 모른다. 살아 남는다고 해도 온전한 인격체로 영글지 못하는 쭉정이가 될지도 모른다.
부모가 버린 아이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어른들의 일방적인 생각, 계산에 의해 방치되는 아이들, 사회에 발붙일 곳 없는 아이들은 이내 범죄의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다. 사랑의 관심과 격려라는 비빌 언덕이 없는 외톨이들을 돌봐주는 건 사회, 곧 우리 모두의 과제가 아닐 수 없는데 말이다.
축복받지 못한 죄 없는 생명들, 가난과 불륜으로 세상에 태어나 보호자 없이 막막하게 내 던져지는 생명들, 매 맞는 게 일상이 되어버리는 생명들, 음지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생명들…. 그 고통은 어른이 되어서 복수하고 싶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게도 한다. 고통이 클수록 증오심도 커간다. 이런 부정적 마음에 가득 차서 세상을 살아가기란 얼마나 어렵겠는가. 진정 누군가 잡아주는 손길이 절실하건만.
사랑하는 남편을 빼앗아간 첩, 그가 낳은 남편의 딸을 키우며 미움을 다스리지 못해 악인이 되어가는 여자. 그 입장이 이해는 간다 해도, 미움의 매질 속에 살아야 하는 어린 생명의 삶은 비참 그 자체다. 그 여자, 그 어미의 죄를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한 일생을 그리고자 했다.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피해는 과거요, 가해는 현재로 나타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현재 가해자의 후회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동의하게 되기도 한다. 피해는 과거에 이루어졌고, 가해자는 불쌍한 모습으로 용서를 구하는 모양새다. 피해 현장은 이미 지워졌고, 가해자는 변명이나 거짓말을 한다. 우리는 현실만 보고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기 쉽다.
그러나 그 누구도 피해자의 고통을 고스란히 대변할 수는 없다. 당시 그 고통을 절감하지 않고는 나름의 판단으로써 선처니 감형이니 용서를 함부로 입에 담을 수는 없으리라.
세상을 놀라게 한 ‘정인이 사건’. 제2, 제3의 정인이들이 고통 중에 죽어간다. 우리는 사망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그 고통을 짐작할 따름이다. 정작 당사자가 당하고 있던 때의 그 고통을 우리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남의 갈비뼈 부러진 아픔보다 내 손톱 끝에 박힌 작은 가시 하나가 더 아프다’고, 피해 당사자가 아니면 어찌 그 고통을 다 알겠는가.
『삼월의 토끼』 주인공은 고통으로 인해 태어난 자체를 원망했고, 생명을 버리지 못해 살아남는다. 그늘이 깊으면 증오도 크다. 그리고 복수의 칼날을 벼린다.
버려진 아이들은 어느 연령에 도달하면 고아원도 더 이상 보호막이 되지 못한다. 이제부터는 보호하지 못한다고, 자립하라고 내보내진다. 아무 준비도 없이 사회로 내몰리면서 생활고며 사기며 사회악에 당하고 좌절하기 일쑤다.
어느 청년은 늘 칼을 품고 다녔다고 한다. “행여 길에서라도 나를 낳은 여자를 만난다면 칼로 찔러 죽이려”해서 였다고. 끔찍한 말이다. ‘부모님 은혜는 하늘같아서…’라는 노래도 있는데, 하물며 죽이려 한다니! 버릴 거면 왜 낳았는지, 그래서 온갖 고통을 겪게 했는지 묻고 응징하고 싶었다는 얘기다. 피해자의 편에 서면 복수심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억울함과 분노를 넘어 사회가 그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이 조금이라도 낫게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라도.
복수의 장면만 보노라면 이거 지나치지 않은가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채찍에 휘둘린 당사자 주인공의 아픔을 안다면 함부로 판단할 수 있을까. 인과응보의 프레임을 떠나 지극히 비인간적인 행위는 그만큼 벌을 받아야하지 않을까.
생각에 생각을 더해 봐도 그때 약자의 고통을 다 느끼기란 어렵다. 폭력의 결과로 나타난 상처, 멍, 뼈 골절 등으로 짐작할 뿐. 직접 피해자, 주인공의 영과 육, 혼의 깊은 아픔 속으로까지 들어가 봐야 하리라. 영원히 잊힐 수 없는 아픔, 고통에 공감해 봐야 하리라. 그 결과, 복수에의 집착 또한 얼마나 허약하고 허망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약자로 살아가는 어린 생명에게 강자가 가한 폭력은 어떤 벌로도 용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고통을 모른 체 가해자들이 살아가게 두어서도 아니 될 것이다. 모든 행위에는 적절한 대가가 따라야 마땅할 터이니. 섣불리 용서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당사자도 아닌데 왈가왈부하는 판정은 2차 가해에 다름 아니다. 칼날을 세우던 그 청년은 다행히도 복수의 마음을 버렸다고 한다. 이젠 홀로 설 수 있기에 모진 목숨이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데 대해 감사할 차례라고 말했다.
소설의 사회적 순기능을 마다하고 이런 주제를 선택하게 된 까닭은 내 어릴 적 친구의 무표정한 모습을 기억 속에서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이 세상의 삶을 스스로 마감하고 말았다. 이제 그 영혼을 위로해 줄 방법도 없다. 매를 맞고 절뚝이며 마당으로 쫓겨나던 친구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자의 얼굴, 차마 쳐다보기도 어렵던 그 얼굴. 사람이라기보다 그저 지구상의 물체, 살덩이에 불과해 보였던 모습. 그에게 꼭 복수할 기회가 주어졌으면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혼을 달래주고 싶었다. 좀 더 살만한 세상을 꿈꿔보고 싶었다. 그 어떤 복수든 간에 나는 그녀에게 감히 면죄부를 주고자 한다!
위대한 유토피아의 꿈
새벽마다 컴퓨터 앞에 앉은 나는 고독했지만, 그 새벽의 모든 순간이 참으로 행복하고 즐거웠다. 작품 속에서 새로운 인물들을 창조하고 이야기하는 동안 하루하루가 햇살처럼 빛났다. 그 느낌이 너무나도 특별해서 과거와 미래의 공간까지 울림을 전달하고, 거기에 나의 꿈이 뒤섞이면서 인생에 근본적인 변화가 오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작품이 하나하나 만들어질 때마다 새로운 연인을 만나는 기분이 들고 심장이 고동쳤다.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고 싶은 열망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자신의 무늬는 자신이 새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알고 있다. 끝없는 선망이 이어지고 이어지다가 체념하게 될 때 그 공허함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그동안 내가 그려온 내 무늬들을 생각하고 창의성을 꿈꿔 보면서 내 동선(動線) 앞에 서 본다.
어릴 때 내 소원은 마음껏 책을 읽는 거였다. 하지만 주변에서 쉽게 책을 구하기 어렵던 때였다. 친구들이 <학원>이라는 잡지를 읽을 때면 어깨 너머로 읽었는데 후다닥 읽은 나는 늘 뒷장이 궁금했다. 딴청을 하며 기다렸다가 친구가 책장을 넘기면 쭉 훑어보며 허겁지겁 읽어 내려갔다. 길 위에 나도는 신문 쪼가리부터 주변에 보이는 활자를 찾아 읽으면서 허기를 메우려고 했다. 나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 활자로 불꽃을 피워 올렸다.
자판기를 두드리지 못하는 순간이 삶의 끝일 거라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 왔다. 글쓰기는 신(神)의 한 수이다. 신의 한 수, 나는 그것을 신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애’를 버리지 않는 한 나는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나를 믿는다. 나는 우주와 신의 한 부분이므로 내가 간절히 원하면 모든 것이 나를 도와주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다.
내가 그린 무늬 『세상에 말을 걸다』가 독자들의 세상과 만나게 되었다. 무서울 정도로 황홀한 일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의 기쁨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말을 걸다』에게 축복을 보낸다. 작품을 발표한 이후에 그것을 이해하고 평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이제 나는, 다시 훗날의 꿈을 꾼다. 미래의 어느 순간에 지금의 발자취가 참으로 멋진 시간이었노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며.
《플러스섬 게임》이 독자들의 세상과 만나게 되었다. 2018년 소설집 《피에타》를 출간한 이후 1년여 만에 새 책을 낸다. 때때로 인생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제공한다. 즉 현실의 질서를 깨뜨리는 순간적인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 통찰력은 세상이 무한한 세상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세상들은 가끔씩 합쳐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중인물들과 관련해서 나는 현실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 목표를 달성했다고 자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