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단어의 문을 열고, 단어가 거느린 세계를 낯설게 두리번거리며, 내가 거기 무엇을 두고 왔는지 생각하는 일.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이 속는 사람은 물론 나 자신이다. 값싼 패키지여행에서처럼, 점심에는 앞문으로 저녁에는 뒷문으로 다른 간판을 매달고 시치미를 떼는 식당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사실은 그 어떤 문도 제대로 열어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 내게 시를 쓸 자격이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자격은 언제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자격’이라는 단어의 문을 열면, 갓 태어나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어린 생명들이 종이 상자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을 것만 같다. 시작된 이상 무조건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삶이라는 말일 것이다. 누구나 다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너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고.
그러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단어의 문을 열어보는 쪽으로 나의 시가 움직였으면 좋겠다. 아직 열지 못한 수많은 단어들의 문도 언젠가는 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두고 온 것이 많다는 건 시간에 빚진 마음이 많다는 뜻. 빚진 마음은 반드시 문장이 되게 되어 있다.
―에세이 「빚진 마음의 문장-성남 은행동」 중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르는 상상을 한다. 여름 언덕을 오르면 선선한 바람이 불고 머리칼이 흩날린단다. 이 언덕엔 마음을 기댈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없지만 그래도 우린 충분히 흔들릴 수 있지.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동안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고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도 같다. 울지 않았는데도 언덕을 내려왔을 땐 충분히 운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이 시집이 당신에게도 그런 언덕이 되어주기를.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고, 이제 나는 그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다.
2020년 7월
희망과 전망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요즘이다. 비관에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가 비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기 쉬운 지금, 우리에게 시는 특별하고도 소중하다. 시란 다른 세계를 꿈꾸도록 하며,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세계를 우리 앞에 출현시키기 때문이다. 세계의 가능성을 개진하는 것이야말로 시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한권의 시집은 하나의 세계에 준하는 것이고, 한권의 시집을 읽는 일은 하나의 세계를 마주하는 일이므로, 시를 사랑하는 우리는 한권의 시집을 읽으며 우리 자신조차 몰랐던 우리의 가능성을 알아차리게 된다. 선택지가 얼마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비관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길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다른 세상을 상상할 힘이 아닐까. 우리는 시를 통해 그 힘을 잠시 빌려볼 수도 있다. 최소한 창비시선이 시를 통해 꿈꿔온 것은 바로 그런 일이었다.
(…)
이 시집이 아우르는 것은 8년의 시간이지만, 신경림의 『농무』가 발간된 1975년부터 살핀다면 지금까지 5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창비시선 500이라는 이 놀라운 궤적은 창비시선을 꾸준히 읽고 사랑해준 독자들과 함께 만들어온 것이다. 한권의 시집이 하나의 세계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독자의 적극적인 읽기 행위를 통해야만 한다. 시를 사랑하는 이들이 없다면 시는 공중으로 흩어지는 빈 소리에 지나지 않으리라. 그러나 우리가 시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리하여 시가 들려주는 그 낯선 목소리에 우리의 마음을 포개어볼 수 있다면 우리는 보다 새로워질 수 있고, 시는 우리와 함께 더 먼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도달한 곳에서 우리는 내일로 이어지는 풍경을 발견할 수 있다. 그 풍경은 다채로운 미래의 모습으로 빛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