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떤 형식을 빌어서든지 문학 활동을 한 것은 상당히 오래인 셈이다. 어설프나마 수필이나 평론을 쓰기도 했으며, 때로는 번역에 심혈을 기울인 적도 있었고, 또 때로는 시를 쓴답시고 수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도 하였다. 만족은 언제나 강 건너로 달아나면서 나를 놀려주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다시금 원고지를 챙기는 고집을 사랑해 왔다. 연구교수로 로마대학에서 지내다(1982-3) 돌아와서부터는 보다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다. 때로는 이탈리아어로 쓰기도 하였고, 그중 어떤 것들은 로마의 문예지들을 통해 발표되었다.
나는 주변에 벌어지는 갖가지 일들을 잔잔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싶어 시의 형식을 빌어서 표현하는 것을 즐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부글부글 끌어 오르는 고뇌의 찌꺼기들이라든가 때로는 나를 에워싸고 있는 사회의 불합리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도 잔잔한 목소리를 유지하고 싶었다. 잔잔함에서 솟아나는 힘이 더 강할 것 같기에.
때로는 산문 형식으로 시에서 못다 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나의 시적 감흥을 독자와 나누는 데 있어서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곳곳에 발표했던 수필들을 정리하여 추후에 작품집을 내고 싶다.
우리 대학의 용인캠퍼스가 있는 왕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면서부터, 나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주의 깊게 관찰하게 되었다. 나무를 주제로 그림의 세계를 펼쳐가는 아내의 도시에 대한 푸념어린 불평을 그 때까지만 해도 흘려들었건만, 산속의 연구실에서 하루하루를 지내다가 인간들의 무수한 이야기들이 바로 자연 속에 있다는 것을 새롭게 느낀 것이다. 게다가 강변에 위치하고 있던 우리 집의 창을 통해 수시로 변화하는 한강의 물결을 바라보면서 삶의 역동성을 실감하지 않았던가! 물의 미학이라는 거창한 표현이야 사양하고 싶지만, 아무튼 삶과 신비와 아름다움의 뿌리에 자양을 주는 물이야말로 내가 추구하는 시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점에 있어서 아내와 나는 뜨거운 동질감을 나누고 있는 셈이다.
내가 시를 사랑해서, 쓰고 싶어서 오래 전부터 써왔고, 시집으로 묶어 보겠다는 용기를 가진 것도 오래된 일이다. 문학계 선배들과의 우연한 모임에서 문덕수, 권일송 두 선생님께 나의 작업에 대한 말씀을 드렸더니 보여주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원고를 정리하여 보여드렸더니, 여러 가지 가르침과 더불어 용기를 주신것도 오래된 일이다.
문 교수님께서는 친절하게 발문까지 써주며 출판을 추천해 주셨는데 조금만 더 추가하자는 뜻에서 미루다가 오늘에 이르고야 말았다. 죄송하기 그지없는 마음 어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말씀이었기에 늦었지만 여기에 실음으로써 그 고마운 마음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 싶다.
학교에서 문학의 길을 가르쳐 주시던 학촌 이범선 선생님과의 약속, 이탈리아 문단의 Aldo Onorati와 Antonio Lanza 교수들과의 약속, 호탕한 웃음으로 우정을 나누는 민용태 학형과의 약속을 지키게 되어 기쁘다. 그리고 내 연구실을 거쳐 강단과 문단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후학들의 기대에 부응하게 된 것도 기쁘다.
끝으로 이탈리아 친구들을 위하여 10여편의 이탈리아어 작품을 싣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 작품들 중에는 앞에 소개된 한국어 시들을 번역한 것도 있고, 또 어떤 것들은 처음부터 이탈리아어로 창작되기도 하였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