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머니 문이덕(文伊德)여사는 1921년 신유(辛酉)생으로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다촌리에서 남평 문씨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스무 살 되던 1940년에 면사무소가 있는 진리(鎭里)마을 경주 이씨 집안으로 출가했다. 어머니보다 한 살이 아래인 우리 아버지 이용우(李用雨)씨는 이종서(李鍾瑞)씨의 막내아들로 흑산중앙초등학교 제3회 졸업생이다. 나보다는 23년, 형보다는 19년 선배인 셈이다.
당시 고향의 풍속은 위에 아들들은 분가해 살고 막내아들이 부모님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어머니는 결혼하자 바로 시부모님을 모셔야 했다. 아버지가 사고로 일찍 세상을 뜨자 어머니는 청상과부가 되어 위로를 받아볼 틈도 없이 1인5역(一人五役)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어머니는 체격도 컸지만 특히 손발이 웬만한 남자들보다 더 컸다. 어머니는 큰 손발을 부지런히 움직여 농사일이나 갯일 등 집안의 일을 차질 없이 해 나갔다. 어머니의 큰 손발은 마치 1인 5역을 해 낼 수 있도록 하늘이 주신 선물 같았다. 어머니는 또한 천성이 부지런했다. 어찌할 수 없는 여건 때문이기도 했지만 천성이 부지런하지 않고서는 1인5역을 해낼 수 없었다.
어머니의 5역 중에서도 가장 큰 일은 자식들의 교육이었다. 당시 우리 고향에서 과부의 자식들에게 육지유학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고비 고비마다 통 큰 의사결정으로 우리 형제를 육지에 유학시켰다. 어머니는 자식교육을 가장 큰 가치로 생각하였고 자식들의 학비마련을 위하여 옷감장사를 시작하였다. 집안일에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시간을 쪼개 장사까지 한 것이었다.
요즘 주 52시간제를 지키라는데 당시 어머니는 그 곱절도 넘는 시간 동안 일을 했다. 잠자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을 빼고는 전부가 일하는 시간이었다. 어머니의 사전에 휴식이나 휴가 같은 말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아픈 다리와 허리 때문에 밤이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다가도 아침이면 다시 일을 시작했다. 당시 어머니가 하시던 일을 모으면 요즈음 TV에서 방영하는 ‘극한직업’ 프로를 몇 편 제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어머니의 젊은 날 중노동의 대가는 자식들의 성공과 신분의 업그레이드로 어느 정도 보상을 받은 셈이지만 본인의 몸은 극심한 관절의 통증으로 돌아왔다. 수 십 년 간 고통을 호소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보면 지금도 마음이 편치 못하다. 어떤 값어치 있는 훈장이라도 어머니의 통증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우리 나이로 93세에 별세하셨다. 어머니의 생애는 크게 보아 고향에서 50여 년, 서울에서 40여 년이었다. 고향에서의 시간은 희생의 기간이고 서울에서의 생활은 보상의 기간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서울로 이주하여 살면서도 일손을 놓지 않았다. 50년 동안 몸에 밴 습관은 손을 움직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때로는 장사도 하고 때로는 농사도 짓고 남은 시간에는 가사를 도왔다.
이제 어머니가 별세하신지도 벌써 8년이 지났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수시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온다. 살아생전 좀 더 잘 해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로 다가온다. 특히 그토록 괴로워하시던 관절의 통증을 조금이라도 완화할 수 있게 인공관절을 해 드리지 못한 것과 돌아가시기 직전 어머니께서 기회를 주셨음에도 마지막 대화의 시간을 놓친 점이 가장 큰 후회로 남는다.
금년은 어머니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어머니의 노고에 감사하고 더 잘 못해 드린 걸 사죄하는 뜻으로 어머니의 일생을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 보았다. 우리 집안의 도약이 있게 한 원동력인 어머니의 숨결을 우리 후손들이 조금이나마 느껴보도록 책으로 엮어보려 한다. 아울러 제3의 독자에게도 격동의 한 세기를 살다간 한 여인의 일대기가 자녀교육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2021년 12월
한강변 서재에서 저자 이 상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