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유대인 친구들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친구들의 아내 한 명은 지역 회당의 안식일 학교에서 가르친다. 나는 토라 주석 한 권을 집어 들고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아내가 그 주석에 큰 관심을 보이며 내 생각을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주석은 마치 핵심을 놓친 농담을 읽는 것과 비슷하네요. 이 주석은 토라의 요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고 있군요.” 내 친구들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약속된 메시아로 믿는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들은 내 대답에 놀랐다. “뭐라고요?”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모든 성경이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믿나요?”……보통 사람들은 추리 소설을 읽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며 작가와 머리를 맞대고 단서를 찾으며 범인을 알아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장을 먼저 읽어보기 좋아한다. 이들은 처음부터 이야기의 결말을 먼저 알고 싶어 한다. 그다음 나머지 부분을 읽으면 바로 이해가 된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성경, 특별히 구약 성경을 이 두 번째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경을 읽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그리스도는 성경의 의미를 풀어 주는 열쇠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볼 때 의미가 있다. 이것은 특히 구약 성경에 있어서 그렇다. 구약 성경이 어떻게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는지 볼 때만 우리는 구약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성경에 의미를 부여하신다. 예수님이 구약 성경의 약속과 이야기를 어떻게 성취하셨는지 생각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약 성경을 읽을 수 있다……신약 성경 기자들은 구약 성경의 범주 안에서 예수님을 이해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구약 성경의 성취자로 기록했다. 신약 성경 기자들이 예수님을 설명하려고 참고한 구약 성경의 배경을 이해해야만,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시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성경 신학은 성경에 대한 이런 접근 방식에 사용되는 용어다. 이 용어는 넓은 의미에서 성경에 근거한, 또한 성경에 충실한 신학을 의미한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성경이 어떻게 서로 맞물려 있는지 살펴본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부분들이 전체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볼 수 있다. 전체, 즉 구원의 전체 계획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부분을 이해하기 어렵다. 전체를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한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행하실 일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목적 안에서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경신학은 우리에게 성경적 세계관을 제시한다. 때때로 우리는 성경이 신학과 윤리의 백과사전 형태로 기록되어 있어서 하나님은 ‘ㅎ’으로, 기도는 ‘ㄱ’으로 찾아볼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다. 성경은 이야기다. 이야기를 이해해야만 성경과 그 신학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신약 성경 저자들이 구약 성경을 사용한 방식이다.
성경 신학은 또한 성경, 특히 구약 성경을 잘못 읽는 두 가지 일반적인 방법, 즉 우화화와 도덕화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준다. - 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