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를 넘을 엄두를 내지 못했고, 바람을 타고 날아오를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물져 오는 파도와 쉼 없이 불어오는 바람의 발원지를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제주, 섬에서 태어나 물 밖 세상은 겪어보지 못한 채 머리가 굵었다. 그 덕분인지 바다는 널따란 종이가 되고, 바람은 보드라운 붓이 되어 상상의 노트를 선물해줬다. 문학 소년을 꿈꾸던 사춘기의 열망을 오래도록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80년대 끝물에 대학에 들어가서는 탈춤반 활동을 하며 장구채를 손에 쥔 것이 졸업 후로도 이어져 30대 중반까지 마당판을 전전하는 광대로 살았다. 광대의 삶은 자연히 고향에 대한 탐문으로 나를 이끌었다. 70여 년 전 다섯 살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 고아가 된 어머니의 이력 속에 4·3이 잠복해 있었고, 그 아픔을 달래는 것이 하루도 그치지 않은 이 섬의 굿판인 사실도 광대의 삶 속에서 알게 되었다. (중략)
다섯 편의 극본에는 내게 주어진 광대로서의 소명이 관통하고 있다. 광대로서의 소명이며 제주 사람의 숙명이기도 한 나의 모든 작업은 ‘주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에 뿌리를 둔다. 척박한 자연환경과 정치적 변방이라는 삶의 조건은 제주 사람들로 하여금 고통스런 현실의 돌파구를 주술에서 찾게 했다. 제주를 일러 1만 8천 신들의 고향이라고 부르다시피 섬사람들은 곳곳에 신성을 부여해 삶의 의지처로 삼았다. (중략)
이렇게 내 작업의 원천은 오롯이 제주의 굿 속에 있으며 앞으로도 여전히 굿판에 머무를 듯하다. 아직은 예술적 소양이 턱없이 부족한 탓에 작정한 만큼 스스로의 기대에 답하는 작품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소중한 기회를 만들어준 도서출판 ‘걷는사람’에 답례하는 마음으로 게으름 없이 걸어가야겠다.
굿처럼 아름답게….
2020년 1월
나는 어디에서 태어났을까? 누구에게나 태어난 곳이 있다. 나는 이따금 고향이 없다는 사람들을 만난다. 태어나자마자 한곳에 발붙이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며 살았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붙는다. 그런 말을 듣게 될 때면 고향이 무엇인지 생각에 빠지곤 했다. 제주라는 섬에서 태어나 여태껏 살아온 나에게는 고향이라는 이미지가 단단히 각인되어 있어서 그들이 사뭇 낯설게 보였으니까.
그들이 말하는 고향이란 단지 장소이거나 공간이 아니다. 삶의 내력과 영혼의 서사가 담겨 있는 곳을 고향이라고 이른 것 같다. 고향이 없다는 이들은 대부분 스스로 영혼이 메마른 삶이라고 말한다. 첨단도시의 군중 속에서 찰나의 휴식도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경쟁이 인생의 전부라고. 영혼이 기화되어 메말랐다는 그들과 달리 나는 고향이 있다. 그런데 나 또한 그들처럼 영혼이 사라진 채 부유하는 이유는 뭘까?
시곗바늘이 미래를 향해 척척 나아갈수록 내 고향 제주의 모습은 지나온 시간처럼 엷게 지워지고 있다. 어느 날은 어릴 적 뛰놀았던 언덕이 사라지고, 또 어느 날은 자맥질했던 바다가 빌딩 숲으로 변하며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잊게 만드는 고향 지우기가 시간마저 추월하는 것 같다. 고향에 발붙여 사는데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이거나 나 또한 애초에 그런 곳이 없었다는 착란의 미망에서 벗어나기 힘겹다.
이 미망은 당연히 상실감에서 비롯되었다. 상실감이 원인임을 자각한 뒤 질문을 바꿨다. 내가 태어난 곳은 어떤 곳이며 누가 만들었을까? 그것을 알면 번민도 사라지고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제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 섬의 창조주 설문대할망을 만나기로 작심했다. 설문대의 전설과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을 샅샅이 뒤지다 보면 여신을 만날 수 있겠다. 그때가 되면 내가 이 섬에 태어난 이유는 물론 내 영혼의 정체에 대해서도 답해주시리라 믿었다. 그렇게 나는 의문부호로 가득 찬 꾸러미를 메고 여신을 찾아, 고향을 찾아, 잃어버린 내 영혼을 찾아 오랫동안 이 섬을 맴돌았다. 그 사이 물음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제주토박이는 섬이 되었다는 할망 설문대를 찾는 탐사기를 여정 내내 써 내려갔다.
그리고 쉼표 하나를 찍고 잠깐 쉬는 사이, 그동안의 여정을 담은 탐사기를 이렇게 펼친다. 언젠가 할망을 만나 느낌표를 얻을 때까지 여정은 계속되겠지. 섬이 된 할망 당신을 만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