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방송국 프로듀서로 3년 넘게 일했다. 2017년부터 2022년까지 프랑스 가톨릭교회의 초청으로 엑상프로방스 생뤼크 신학연구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프랑스에서 사는 이야기를 유튜브(@그레곰)와 브런치(@gregom)에서 꾸준히 써왔다. 엑상프로방스 한글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한 영상이 유튜브에서 대박을 터트렸고 2019년에는 프랑스 한인회에서 주최한 UCC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지금도 세상을 여행하고 일상을 기록하며 낯섦을 찾아다니고 있다.
프로방스에서 산 오년
어릴 때부터 일기쓰는 걸 좋아했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초등학생 시절 방학숙제로 했던 ‘생활 일기쓰기’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그때 친구들은 방학이 끝나기 며칠 전부터 밀려있던 일기를 한꺼번에 쓰느라 정신없었지만, 나는 매일같이자기 전에 연필을 들고 최소한 다섯줄이라도 썼다. 내가 일기를 매일 썼던 이유는 매우 독특했다. 다름 아닌 학용품 때문이었다. 종이 질감과 펜이 써지는 감촉이 참 좋았다. 게다가 거기에서 나는 냄새가 신기 하리만큼 향기로웠다.
지금도 나는 해외에 다녀올 적마다 도시에서 가장 큰 서점에서 공책과 펜을 하나씩 산다. 그리고 여기에 1주일에 3일 이상은 하루를 되돌아보며 펜으로 써내려간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에 들기 전까지,정신이 깨어있는 동안에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등 모든 것을 세세하게 기록한다. 가끔은 잔상이 짙게 남은 꿈을 꾼다든지, 멍하니 시간을 때우다가 상상의 나래가 펼친 내용도 적는다.
어느날 쌓여있는 책들 사이에 일기장을 꺼내 다시 읽어봤다. 프랑스에서 살았던 시간들이 적혀 있었다. 엑상프로방스에서 약 오년 간(2017.8.18~2022.5.29) 살면서 쓴 일기장이 무려 여섯 권이었다. 요즘 나는 일년에 한권 정도 쓰는 셈인데 여섯 권이면 꽤나 많은 시간을 썼다는 의미다. 하긴, 프랑스어 코스를 마치고 연구대학에 입학했을 때 이미 나는 세 권이나 썼던 기억이 떠올랐다. 교수님이 동기들과 친해지라고 자기자랑 시간을 마련했을 때 나는 일기장을 들고 나타났었다.
엑상프로방스는 예술도시다. 그곳에서 나는 눈만 뜨면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었고 걷다보면 믿을 수 없는 도시의 분위기에 흠뻑 빠졌다. 그리고 사람을 만날적마다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영감을 얻으려고 남프랑스에 살았던 것 같다. 이곳에서 태어나 마지막 순간까지 살았던 폴 세잔부터 그에게 인문한적 영감을 주며 진한 우정을 나눴던 에밀 졸라. 그밖에 여러 도시에 흩어져 살았던 파블로 피카소, 빈센트 반 고흐, 앙리 마티스, 마크 샤갈, 마르셀 파뇰 등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내가 처음 살았던 집은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비탈길에 있었다. 창문을 열면 도시가 한 눈에 들어왔고 삼종(三鐘) 시간이면 생소뵈르 대성당의 종소리가 내 방까지 울렸다. 폴 세잔의 작업실(Atelier deCezanne)도 그리 멀지 않았다. 불과 걸어서 5분도 안걸리는 곳에 인접해 있었다. 나는 그곳을 산책하는 걸 즐겼다. 빨간 문을 열면 숲이 우거져 있는 정원이 있고 그 옆에 전형적인 프로방스식의 노란 집이 있었다. 작은 집에 관광객이 수시로 드나들었지만 정원 만큼은 아무도 다니지 않았다. 나는 공책과 펜을 들고 조용한 장소를 찾았고 자연의 정취를 즐기며 글을 써내려갔다.
가끔은 폴세잔을 포함한 남프랑스의 예술가들과 직접 대화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껏 내가 일기를 쓴 건, 시간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맞이할 시간을 깔끔하게 맞이하려고 했다. 그런데 일기장을 다시 들춰서 읽어보는 순간 그때 쓰면서 느끼지 못했던 감정과 생각을 지금에 와서야 다시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순간에 한편으로는 고민거리가 쌓여있었다는 걸 알았고, 짜증나고 답답한 시간이 연달아 있었지만 그 순간 두 눈을 통해 바라봤던 하늘이
나를 위로했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지나온 시간을 일기장에 쓴다.
는 건 과거를 정리하고 끝내려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시간의 연속에서 계속 성장해 나가려는 발버둥일 수도 있겠다. 나는 분명 엑상프로방스를 사랑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같이 프랑스어를 공부했던 때, 시청 옆 크리스토프 마들렌 가게에서 처음 사먹었던 마들렌 맛, 멧돼지 동상이 있는 커피집 테라스에서 카페 알롱제를 시켜놓고 시간을 보냈던 여유, 갑자기 내린 비를 흠뻑 맞고 처마밑에서 사람들과 수다 떨던 우연, 수 백년 된 건물에서 오랜 시간 내려오는 지혜를 습득하는 재미 등 지금도 친구들과 만나면 온종일 그곳에서 지냈던 얘기를 꺼내놓는다. 그렇지만 다시 그곳에 살라고 하면 선뜻 용기는 나지 않는다. 힘들었던 시간도 많았다. 집 주인이 대문열쇠를 안줘서 담을 넘다가 다리뼈가 부러졌던 고통, 언어를 못해서 차별받았던 순간, 주차하다가 오토바이를 살짝 부딪혀서 냅다 주먹에 맞은 아픔, 아꼈던 사람을 갑자기 잃어야 했던 슬픔 등. 프랑스에 살려면 완전히 프랑스 사람이 되거나 아예 외국인으로 살 수 밖에 없다. 그 중간 애매모호한 위치는 허용하지 않는다. 특히 프로방스는 프랑스에서 가장 보수적이며 전통을 고수하는 동네였다. 그에 따른 문화도 완전히 흡수해야 살 수 있었다.
모든 시간은 나를 만들어줬다. 그래서 소중하다. 내가 좋아했던 순간을 선택할 수 없고, 싫어했던 순간을 지울 수 없다. 프로방스에서 살았던 시간은 매일 자신 있게 내리쬐는 햇살처럼, 내 인생에서 무엇이든 용기 내어 할 수 있었던 멋진 나날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푸르렀던 시기에 나는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꿈을 품으며 살았다.
이 책에 내가 꺼낼 수 있는 기록만 정리해서 담았다. 그때 그곳에서 살았던 솔직담백한 이야기다. 아름다운 장소를 소개하거나 맛집을 알려주고 관광객이 유용하게 다니기 위한 내용은 아니다. 그저 낯선 곳에서 한 사람이 살았던 이야기다. 한 번쯤 집을 떠나 다른 곳에 살고 싶은 우리의 로망을 조금이나마 충족시켜줄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