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영화광 세대로 성장하지 않은, 직업으로서 영화를 만든 사람으로, 수 십년의 경륜에서 우러나는 경험과 본능적인 감각을 엮어 한국 고유의 정서와 인생의 깊이를 그려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감독.
소도구 조수, 조명 조수를 거치며 충무로의 전통적 도제 시스템을 통해 경험을 쌓으며 성장. 51번째 영화인 73년작 <잡초>부터 작가 의식을 담기 시작했다고 자평하며, 동양적 여백의 미가 가득한 영상과 인본주의적 지향의 작품을 만들어왔다.
81년 <만다라>가 베를린영화제 본선에 진출한 데 이어 86년 <길소뜸>으로 또한번 베를린영화제 본선에 진출했으며, 86년 <씨받이>로 국내 처음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강수연)을 수상, 이듬해 몬트리올에서 <아다다>로 다시 여우주연상(신혜수)을 수상했다.
<증언>으로 13회 대종상(특별상 감독), <족보>로 17회 대종상, <만다라>로 20회 대종상, <왕십리>로 12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낙동강은 흐르는가>로 13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안개 마을>로 19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국내 영화 사상 최고 흥행작 <장군의 아들>을 거치면서 92번째 작품인 <서편제>로 상해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고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을 거두며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거장이 되었다. <춘향뎐>으로 칸느 영화제 본선에 진출했으며, 2002년 <취화선>으로 마침내 칸느 감독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2005년 베를린 영화제에서는 그간 영화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