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으로부터 정인군자正人君子란 말을 듣는 원학圓學 스님은 삼국유사의 성지 인각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그는 수행자다운 곧은 기개와 계행, 정연한 논리와 달변, 문화적 예술성을 지니고 있는 등 신언서판身言書判 모두가 반듯하다는 평을 듣는다.
원학 스님은 해인사로 출가 해인승가대학 12기로 “해인승가상”을 수상했고 해인승가대학 총동문회장을 역임했다. 동국대 교육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 수료하였다.
조계종 총무원 재정국장, 문화부장, 총무부장, 중앙종회 사무처장, 제 10,11,12,15대 중앙종회의원, 봉은사, 조계사, 봉국사, 진주 연화사, 대구 용연사 주지 등을 역임해 종무행정에 두루 밝다. 2009년 총무부장으로 일할 때 스스로 <삼이三耳>란 호를 지었다. “총무원 소임은 봉사하는 자리. 즉 머슴살이와 같은데 귀 밝은 머슴이 되기 위해서는 귀가 세 개쯤 있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1994년 종단 개혁 당시에는 개혁회의 재정분과 위원장으로 조계종 개혁에 앞장 섰다가 1998년 종단사태 때 깊은 좌절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이후 제주도로 내려가 “청묵예원”을 설립하고 묵향에 파묻혀 인고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를 하심下心과 인욕忍辱을 수련한 귀중한 수행이었다고 되새긴다.
국무총리실 소속 “10.27 법난 피해자 명예회복 심의위원장”으로서 종단과 피해자 스님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국방부차관(당시 장수만)을 설득 끝에 1,500억원의 국회예산 확보를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2008년에는 종교편향종식 범불교도대회(시청앞 광장)의 봉행위원장으로서 성공리에 행사를 치루어 종정예하로부터 표창패를 수상했다. 또한 1997년 총무원 문화부장시절 종교문화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종교 예술제”를 창설 제1회 운영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전통문화와 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전문성으로 2012년 중앙불교박물관장을 역임하고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역임하였다.
남종화의 본맥을 잇고 있는 원학 스님은 남종화의 거장 의재 허백련 선생의 수제자인 우계 오우선 화백에게 전통산수화를, 국전심사위원장을 지낸 청남 오제봉 선생에게서 서예를 40년 넘게 사사했다. 불교미술제 우수상(1974년), 국전, 동미술제 입선(1980년) 등을 통해 불교계 안팎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스님은 1977년 서울 중앙불교회관에서 열린 첫번째 개인전을 시작으로 2015년(아라아트미술관) 모두 7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1994년 초의선사가 주석했던 해남 대흥사 부주지 소임을 볼 때 10여 년간 이끌어 왔던 사찰분규를 종식시키고 오늘의 대흥사를 발전케 하는 토대를 만들었다. 또한 각계 다인茶人들과 함께 초의 문화제를 창립 발기하여 초의선사의 다도정신을 계승하였고 초의선사의 ≪동다송東茶頌≫을 번역 해설한 ≪향기로운 동다여 깨달음의 환희라네≫를 2014년에 출간하였다. 차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제22회 초의문화제 초의상을 수상했다.
1996년도에 번역 해설한 금강경 야부송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음을 꾸짖지 않는다≫를 윤문 보완하여 이번에 개정 출간을 하였다. 2015년 봉은사 주지 소임을 끝으로 시골 암자에서 다도회 모임을 주관하여 매주 토요일 강의와 함께 인각사 일연선사의 복원 불사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