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붙여
음악을 듣는다. 흰 돌을 바라본다. 요즘 말로 돌멍을 한다. ‘난 그대를 원해(Je te veux)’는 에릭 사티(Erik Satie)의 곡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냥 하고 싶은 행위를 하면 된다. 사티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 라투르의 시 「오래된 것들」에서 영감을 얻은 ‘세 개의 짐노페디’로 바뀐다. 어디 먼 데서 오는 찬양의 소리, 빛의 흔들림 그렇게 느꼈다. ‘벡사시옹’ 곡은 840번을 반복해서 연주하라고, 어떤 곡은 마딧줄이 없다. 단순함을 갈망했다면 그가 추구한 영지(靈知; gnosis)란 무엇이었을까.
저 변할 줄 모르는 흰 돌 한 개는 얼마나 오래된 것일까? 또한 더 이상 단순할 수가 없다. 겨우 840번의 밀려오는 파도 치기를 받아냈겠는가? ‘멀리서부터 자신의 내면에게 집요하게 질문하며 통찰력으로 무장하여’ 이런 곡 앞의 지시어는 초발심자경문을 읽는듯하다.
도입부도 종결부도 없이 침묵의 언어가 담긴 음악은 시간을 초월한다. 프네우마(Divine Spirit)를 아는 것은 동서양을 관통한다. ‘느리게(Lent)’ 그러나 ‘놀라움을 가지고’, ‘절제해서’, ‘확신과 절대적 슬픔을 가지고’ 이렇게 지시어는 더욱 특이해진다. ‘매우 기름지게 혀끝으로’ ‘구멍을 파듯이’ ‘치통을 앓는 나이팅게일처럼’ ‘너무 많이 먹지 말 것’ ‘난 담배가 없네, 다행히 담배를 피우지 않는군’ ‘뻔뻔함’ ‘유쾌한 절망’ ‘바싹 마른 태아’ ‘개를 위한 엉성한 전주곡’ 등.
작곡가 다리우스 미요, 시인 콕도, 화가 피카소, 사진작가 만레이는 ‘예술의 일상성’을 취했다. 사티도 추구했다. 그가 작곡한 ‘절대적 슬픔’은 먼 곳을 응시하는 것 같은 분위기라고 전한다. 이제 나도 들어도 좋고 안 들어도 좋은 사티의 은자의 음악을 듣는다. 안 듣는다. 일어나서 커피 물을 끓이거나 샤워실로 가거나 먼지를 닦기도 한다. 27년을 방문자 없이 혼자 지낸 사티. 나와 관류하는 ‘지긋지긋한 고상한 왈츠’ 같은 패턴이다. 나는 22년째 혼자 지낸다.
꽃과 구름을 버리지는 못했지만, 저 하찮은 돌 그리고 63년째 가지고 있는 옥돌 원숭이 비례물청(非禮勿廳)의 조형물이다. 불과 약지 두 마디 크기이다. 초등학생 때 소풍 가서 지금 해남 대흥사 입구 가게였다. 용돈으로 먹을 것을 사지 않고 이 완구라기엔 너무 생뚱한 물건을 왜 샀을까? 그리고 수없이 이사를 했어도 언제나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나의 시에 이런 제멋대로 또는 극피주의자 같은 명상 등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긍정의 마음이 든다. 에릭 사티 덕분이다. 그노시엔느를 들으면서 아니 듣는 둥 마는 둥 도다리쑥국을 끓인다. ‘쥬 뜨 브(Je Te Veux; 그대를 원해)’를 들으며 사티의 단 한 번의 연애가 얼마나 스윗 했을까 아니었을까 나도 좀 이상한 제목을 붙이고 특이한 부제를 달고 나만의 사유를 펼쳐보고 싶다.
임인년 4월,
지훤당에서
오소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