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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윤치호

출생:1865년

사망: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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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우순소리>

윤치호

본관은 해평(海平), 호는 좌옹(佐翁)이다. 1865년 충남 아산(牙山)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당시 충청감영중군(忠淸監營中軍)을 지낸 윤웅렬(尹雄烈)이다. 9세 때 서울로 유학하여 체계적으로 학문을 익혔다.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을 다녀온 부친의 권유로 1881년 어윤중(魚允中)을 수행하여 유길준(兪吉濬), 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당시 조사 시찰단의 일부는 일본에 남아 신학문을 공부하였는데 윤치호도 도진샤[同人社]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서양학문을 익혔다. 김옥균, 서광범, 유길준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조선의 개화를 위해 노력했다. 1883년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 비준 때 초대 주한(駐韓) 미국공사 L. H. 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여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주사(主事)에 임명되었다.
조선에서 개혁정책이 번번히 반대파에 의해 가로막히자 개화파는 급진적인 정변을 꾀하였다. 윤치호는 이에 반대하였지만 1884년 김옥균 등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고 윤웅렬은 형조판서, 윤치호는 외아문(外衙門) 참의(參議)로 임명되었다.
개화파 인사라는 이유로 위기에 몰리게 되자 청나라 상하이[上海]로 유학, 중서서원(中西書院)에서 3년 동안 공부하며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감리교 신자가 되었다. 선교사 A. J. 앨런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가서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에서 5년간 머물면서 영어·신학·인문사회과학 등을 공부하였다. 그는 서구의 문명을 신봉하였고, 특히 조선은 기독교를 통해 문명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아가 조선과 청국은 미개한 문명으로 서구화된 문명에 의해 개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하이에서 중서서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1895년 귀국, 총리대신 비서관을 거쳐 학부협판(學部協辦)이 되었으나, 친미파 세력들이 주도한 춘생문(春生門)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1896년에는 민영환(閔泳煥)을 수행하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 대관식에 참석하였다.
1897년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에 가입하였으며, 1898년 2월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서재필이 미국으로 추방되자 독립협회를 이끌며 국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같은해 8월 독립협회 회장에 취임하여 자주국권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중추원(中樞院)을 개편한 서구식 의회설립운동을 펼쳤다.
고종을 설득하여 만민공동회의를 개최하기로 허락받고 헌의6조(獻議六條)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최초의 국민참정권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독립협회가 왕을 몰아내고 박정양을 대통령으로,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하는 공화제 정부를 구성하려 한다는 설이 수구파에 의해 퍼지자 고종은 독립협회 임원을 체포하고 만민공동회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이로써 윤치호가 주도한 독립협회의 개화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는 법무대신이었던 부친의 권유로 함경도 덕원부윤(德源府尹), 천안군수 등을 지냈다.
1906년 장지연(張志淵)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 회장이 되었으며 교육사업에 힘썼다. 1907년 안창호, 양기탁, 이동휘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설립하여 국민 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1907년 애국가를 작사하고 찬미가를 역술했다.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을 조직한 후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 1911년 105인 사건으로 6년형을 선고받았다가 3년 만인 1915년에 출소하였다. 1914년 일본 천황 명의의 목배(木杯)를 하사받았으나 거절했다.
1916년 YMCA와 연희전문‧세브란스의전 이사를 지냈고, 1925년 흥업구락부를 결성해 회장에 취임했다. 1929년 태평양문제연구회 교토대회에 조선대표로 참가했고,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검찰에서 조사를 받았다. 1941년 연희전문 교장을 지냈으며 1945년 9월 애국가 친필본을 ‘1907년 운치호 작’이라고 써서 셋째 딸 문희에게 주었다. 하지만 윤치호는 조선총독부 일간지인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중일전쟁에 청년들이 자원입대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일본제국의회의 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그의 부친은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그해 10월 조국의 미래를 위한 ‘한 노인의 명상록’을 썼다. 1945년 12월 치과병원에 다녀오다 뇌일혈로 졸도, 개성 고려동 장남 영선(永善)의 집에서 주치의 김근배(金根培) 박사와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12월 6일 오전 9시 별세했다. 향년 80세. 송도와 서울 종교교회에서 장례식을 거행하고 아선 선영에 안장했다. 저서에 《우스운 소리》, 《영어문법첩경(捷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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