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의 시골 농가에서 출생한 그는, 일찍부터 성인전에 감명을 받아 종교적인 장면의 데생을 즐겨 그렸다.
재능을 인정한 아버지에 의해 랑글루아에게서 사사하고, 후에 장학금을 받아 파리의 미술 학교에서 배우는 한편, 루브르 박물관에서 푸생의 작품을 연구하였다.
1840년 살롱에 입선되고 일시 귀향하여 결혼하였는데, 생활이 어려워 다시 파리에 나와 간판·미인화 등을 그려 생활해 나갔다. 1848년 살롱에 출품한 작품이 입선되고, 정부에 팔림으로써 이름이 알려졌으나 파리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파리의 교외인 바르비종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농민 화가로서 전원 생활의 정경을 그렸다.
그는 가난에 쪼들렸으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농민의 모습을 종교적인 분위기로 심화시켜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하였다.
만년에 "이삭줍기" "만종" 등 걸작을 발표하고, 차츰 명성이 높아졌으나 빈곤하였을 때 얻은 결핵이 원인이 되어 61세로 사망하였다. 그는 데생과 동판화에도 뛰어나 많은 걸작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