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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복호원과 함께 그 명성을 나란히 했으며, 송학(宋學)의 선구자로 일컬어진다. 그의 자는 명복(明復), 호는 태산(泰山)·부춘(富春)이며, 지금의 중국 산시성(山西省) 핑양(平陽) 사람이다. 네 번 과거 시험을 쳤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물러나 태산의 남쪽 기슭에서 살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를 ‘태산’이라고 호칭했다. 석개(石介)는 산동 지방에서 저명한 사람이었는데, 몸소 제자의 예를 갖추고 그를 스승으로 모시며 배웠다. 석개는 손복의 지팡이와 신발을 들고 곁에서 모시면서, 손복이 앉으면 자신은 서 있고, 손복이 절하고 일어서면 즉시 그를 부축했다. 이 모습을 본 당시 사람들은 비로소 스승과 제자 간의 예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감탄했다고 한다. 손복은 40세가 될 때까지 결혼하지 못했다. 승상 이적(李迪)이 그의 현명함을 알아보고 동생의 딸을 시집보냈다. 석개가 학관(學官)이 되자 <명은편(明隱篇)>을 지어 ‘손복이 태산에 은거해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도를 닦은 것은 홀로 그 한 몸만을 깨끗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라 밝히고, 손복을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그리고 범중엄과 부필(富弼)의 추천으로 국자감직강에 제수되고, 이영전(邇英殿)의 지후설서(祗候說書)가 되었다. 하지만 손복의 학설이 이전의 학자들과 많이 다르다는 이유로 양안국(楊安國)이 주청해 파직되었다. 또한 서주(徐州) 사람인 공직온(孔直溫)이 모반을 꾀하다가 잡혔는데, 그의 집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손복의 이름이 적힌 시가 나왔다. 이 일로 손복은 다시 좌천을 당했다. 그 후 한림학사 조개(趙槪)의 주청으로 다시 직강이 되고 전중승(殿中丞)으로 이임되었다. 1057년 7월 24일 별세하니, 향년 66세였다.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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