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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김광수

출생:1883년

사망:1915년

최근작
2024년 1월 <만하몽유록>

김광수

자(字)는 중선(仲宣), 호는 만하(晩河), 본관은 울산이다. 울산 김씨 시조를 기준으로 하면 35세, 하서(河西) 김인후를 기준으로 하면 13세손이다. 아버지는 회회(晦悔) 김창중(金昶中)이며 어머니는 김시묵(金時?)의 딸이다. 김광수는 아들 셋 중 장남이다. 그의 선대는 조부 요평(堯平), 증조부 시환(時煥), 고조부 완휴(完休)로 올라간다. 김광수는 아내 창녕 조씨(昌寧曺氏)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남겼다. 그 자손 관계는 석인본 《만하유고》에 붙인 〈행장〉과 〈묘지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본래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둘째 아들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덕지(德摯)를 시조로 하는 울산 김문은 조선 개국 초에 활동했던 흥려군(興麗君) 김온(金穩)을 중시조로 한다. 이후 태종 13년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옥사에 연루되어 멸문의 위기를 맞게 된다. 이때 그의 부인이 아들 셋 중 장남과 삼남을 각기 다른 지역으로 보내고 자신은 둘째 아들만 데리고 장성으로 피난한다. 결국 장남과 삼남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고 둘째 아들이 살아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때문에 회암공파에 속한 울산 김문의 후손들은 장성을 세거지로 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후손 다수가 장성을 중심으로 한 남부 지방에 살고 있다(울산김씨대종회 편, 《울산김씨약사(蔚山金氏略史)》 1집 참조). 김광수 역시 장성군에 살았다. 특히 김광수가 직접 《만하몽유록》 표지에 ‘장성군 북하면 하만리 김광수’라고 적어 두기도 했으니 《만하몽유록》은 장성에서 탄생한 것이다. 또한 김광수의 호 역시 ‘하만’을 뒤집은 ‘만하’인 것을 여기서 볼 수 있다.
그는 정미년(1907) 6월에 《만하몽유록》을 썼다. 이는 친필본 표지에 그 스스로 써 놓은 것이다. 그러나 작품 속에 군대해산(1907. 8. 1)의 일을 썼으니, 작품을 완성한 것은 최소 그 이후일 것이다. 그가 1883년에 태어났으니 이 작품을 쓸 무렵 그는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그의 《만하몽유록》에는 청년의 자유분방함과 기개와 낭만적 인식이 동시에 묻어난다.
김광수는 우암 송시열의 9대손인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문하에서 수학했다. 《만하몽유록》 안에 연재 송병선을 등장시키기도 했고, 늘 김인후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마음을 담아 김인후까지 소설에 형상화시키기도 했다. 그 내용은 ‘제7회 저승에 들어 충신역적의 상벌을 보고, 신궁에 가서 조손간의 정을 펼치도다’ 부분에 있다.
후손(손자 김병욱 전 충남대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김광수는 도술(道術)과 이행(異行)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다. 절벽에서 뛰어내리기, 문을 닫은 상태에서 문 안쪽의 촛불 끄기, 상자 속 물건 알아맞히기 등 기이한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만하몽유록》 안에 실린 수많은 도술 이야기나 기이한 행적 등을 두고 그저 작가가 박식했던 탓으로 다양한 내용을 포함시킨 것이라고만 하기에는 주저되는 바가 있다. 하서 김인후의 후손이며 연재 송병선 문하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점만을 들어 그를 유교적 세계관에 철저했던 인물로 단정하는 것 역시 재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서른셋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후손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일제시대 일본 헌병의 만행에 항의하다가 붙잡혀 가서 매를 맞아 그 장독으로 죽었다. 김광수의 부친이 팔순을 넘기셨고 김광수의 아내였던 조씨가 칠순을 넘긴 나이까지 살다가 돌아가셨다는 점을 생각할 때 후손이 증언하는 김광수의 행적이나 죽음은 비교적 신빙성이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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