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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저자 >
시
이름:
장석원
성별:
남성
국적:
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
1969년,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
직업:
시인 대학교수
최근작
2023년 11월 <
Parting After Part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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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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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향집
ㅣ
서정시학 시인선 221
이관묵
(지은이) |
서정시학
| 2024년 10월
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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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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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스트
청빈한 언어를 읽는다. 언어의 주인은 마음이다. 마음이 사는 “몸은 이미 헌 집”이다. 언어의 몸을 어루만진다. ‘나’는 “길 걸어 잠그고 / 나를 내 안에서 피우려 한다 / 얼음장 밑 물살처럼”(「물살」). 마음의 유로流路를 응시한다. 뼈 속의 피 같은 물살의 소리를 듣는다. 귀는 동결 파쇄했다. 청빙廳氷. 얼음 아래 꿈틀거리는 힘이 있다. 비릿한 울음이 차오른다. “엄마가 자신의 몸에서 / 엄마를 다 꺼내 써버린 것”(「매미 껍질」)이라고 비탄하는 시인이 있다. (......) 모자母子가 살고 있는 「서향집」 안으로 들어간다. 키우던 소를 “읍내장에 내다” 팔았던 적이 있었다. “소 장수 손에 끌려가던 소가 / 뒤돌아 허공에 큰 울음 띄”웠다. 소가 살던 외양간 너머에 지금도 “저녁 해만 한 소 울음이 떠 있”다. 팔려간 소는 죽었을 것이고, 완전히 해체되어 사람들의 식량이 되었을 것이고, 그 소는 돈으로 돌아와 한 가족을 먹여 살렸을 것이다. 시인은 ‘서향집’에 감춰진 서사를 한 문장으로 응축하여 “그런 집을 나는 살았다”고 발화한다. 무의식이 가둬버린, 몸에 내장된, 먼 과거의 사건이 드러난다. ‘나는 그런 집에 살았다’가 아니라 ‘나는 그런 집을 살았다.’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집을 살았다. 공간이 집 안에 살았던 주체의 삶을 대체한다. 목적어와 서술어의 호응을 깨트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시인의 마음에 잠재한 설움과 울음과 그리움이 노래처럼 터져 나온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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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슬픔
ㅣ
파란시선 146
한명희
(지은이) |
파란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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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과 떨림 사이”에 “눈물과 한숨 사이”에 “바람과 바람 사이”에 “이승과 저승 사이”에 “그대와 나”의 광휘로운 비탄의 휘장이 걸려 있다. 생의 슬픔과 아픔과 기쁨을 감싸안는 시집을 연다. “꽃잎을 쥐고 흔드는” 바람이 시의 경계를 넘어 넘어 불어 간다.(「간(間)」) 나비 날갯짓 같은 시 편편(片片)이 영롱하게 반짝인다. 시의 빛이 넘실 넘실거린다. 하나의 언어가 단독적인 이미지를 획득하여 새로운 시가 되는 길. 한명희의 언어는 세필이었다가 망치와 정이었다가 봄날 벚꽃잎 스쳐 지나가는 한없이 부드러운 바람의 손길이었다가 직정 흘러넘치는 웅혼한 외침이 된다. 천변만화의 광폭(廣幅)을 펼쳐 낸다. “나는 돌이다 가지치기 당한 가로수이며 비 오는 들길을 걷다 납작 엎드린 민들레꽃이며 바람에 흔들리다 바람에 주저앉은 나비이다”(「이렇게」). 언어의 운동이 가닿은 곳에서 독자는 찬란한 ‘이미지-사건’을 목도한다. “죽은 자의 몸에서 그림자를 떼어 내”면(「타동사의 시간」) “나를 두고 간 사람”을 잊을 수 있을까(「아마도 사월」). 아니, 버릴 수 있을까. 이별과 사별이 있었다. 남겨진 사람과 떠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도 있다(「시인의 말」). 망각이 시인을 포식한들 그가 사랑 없이 살 수 있을까. “사랑할 게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날”이 우리를 기다린다(「짱돌」). 우리는 오늘도 바로 그날을 살고 있다. 이 시집을 압축하는 구절 “기쁨의 슬픔”은 음악이 되어 따스한 불빛처럼 우리를 위무한다(「질문은 의문의 사생아」). “내게 온 모든 음악은 헤어지고 싶은 것들의 미래”가 되겠지만, “새로 태어나기 위해/우리가 뭔가를 찾아 헤맬 때 떨어져 소멸을 기다리는 꽃들의 상처”만 남겠지만(「녹턴」), 한명희의 시는 생의 깊은 어둠을 따스하게 껴안는다. 먹먹해진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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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빛을 찾아서
ㅣ
PARAN IS 3
황봉구
(지은이) |
파란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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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스트
‘아직, 여전히’ 그리고 ‘길게, 짧게, 기다랗게’. 시집을 열면 만나게 되는 머리말과 목차의 부사와 부사어. 시인의 염원이 바람을 끌어안은 팽팽한 돛처럼 부풀어 오른다. 황봉구는 베수비오의 용암 같은 언어를 폭발적인 힘으로 뿜어낸다. 그는 언어의 라가를, 언어의 시나위를, 언어의 재즈를, 언어의 교향악을, 더불어 헤비메탈을 연주한다. “한없이 가이없이 아스라이” 언어의 무도(舞蹈)가 펼쳐진다(「새벽에 추산의 단소를 들으며」). 가쁜 숨이, 생명의 호흡이 시인의 거주지 남해 미조 앞바다에 일렁이는 찬란한 햇빛 같다. “한세상 살려는 이 세상에/들릴 듯 말 듯/숨소리” 가득하다(「숨 쉬는 하루가 고맙다」). “미치도록 새까만 소리들이” “그냥/그냥/숨소리”가 “검은 날개의 그리움”을 뚫고 독자의 가슴에 박힌다(「검은 날개의 그리움」). 소리와 음악의 춤이 광기와 평정 사이에서 폭발한다. 이 시집에서 가장 뜨거운 작품인 「언어의 춤」은 장대하고 무변한 음악. 작품을 읽은 후 겨우 발화할 수 있는 단어. 압도와 숭고. 가르강튀아가 벌이는 언어의 축제에 동참한다. 카니발리즘의 실현을 체험한다. “느낌의 폭풍우 속에서 춤을” 춘다. “느낌의 춤들이 언어의 바다를 횡단한다.” 언어의 에너지 댄스가 카오스 속으로 독자를 빨아들인다. 「언어의 춤」은 트래쉬(thrash)에서 블랙(black)을 거쳐 데쓰(death)를 잡아먹고 마침내 익스트림 메탈(extreme metal)이 되어 초신성의 광휘로 우리를 휘감는다. 프로그레시브(progressive)의 새로운 몸으로 탄생한 시집 [어둠에 빛을 찾아서]. 프리즘을 통과한 찬란한 빛의 향연이 끝나면, 그는 “내가 나를 모르는 것처럼 그냥 잠이 들겠지”만 그것은 ‘아직’ 도달하지 않은 내일의 이야기(「한세상」). 그는 오늘 이 자리에서 ‘여전히’ 독자에게 시의 폭풍을 선사한다. ‘길게, 짧게 그리고 기다랗게’ 황봉구의 언어는 지속될 것이다, 음악처럼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펄떡이는 느낌의 짜임새”를 독자의 가슴에 아로새기며 “원초의 몸뚱이로 빛을 받아 혼신을 다해서 춤을 추”는 황봉구(「언어의 춤」). 그는 언어의 음악을 복사(輻射)하는 흑체(黑體)다. 그는 머나먼 우주의 펄사(pulsar)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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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눈물
ㅣ
문학들 시인선 8
최미정
(지은이) |
문학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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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최미정이 실현해 낸 색채의 태극적인 변용을 이미지의 마법이라고 부를 것이고, 감각의 영광스러운 승리라고 선언할 것이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돌연 변이되는 곳, 여기 최미정의 ‘감각의 제국’에서 - In the Realm of the Senses - 우리는 존재의 유와 무 사이에 던져 놓은 “유통기한 지난 영양제 플라스틱 통”(「미명未明」)을 발견한다. 그리고 “티벳 사람의 각진 아래턱 살점/독수리 한 마리 물어뜯고 있”는 광경을 관통하는 이미지의 화살을 본다. “엄마가 없는가/자지러지는 아이의 아래턱은 또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가”(「경락」). 절정에 가까워진다. 상승하고 상승한다. 극광 같은 이미지의 향연에 초대된 우리의 몸에 불꽃이 인다. - 장석원 시인·광운대학교 국문과 교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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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과 세계적인 슬픔
ㅣ
파란시선 77
박민혁
(지은이) |
파란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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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흥건하다. 박민혁의 시집에는 실패한 사랑이 넘실거린다. 흥건하게 넘실거리는 실패한 사랑의 이지러진 상처가 또렷하다. 어두운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떠나간 사랑 때문에 훌쩍거리는 사람. 그의 말려드는 어깨를 토닥이고 싶다. 사랑 때문에 인생이 전복된 청년의 삼키는 울음소리 길게 이어진다. “따뜻한 응달 위에 서서 슬픔에 가려진 내 뒤안길을 오래오래 기렸다.” 견디고 버티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악물고 바닥을 기어가는 사랑의 루저가 보인다. 그의 슬픔은 비릿하고 비루하고 비참하다. 아름다운 이 세상에서 넌 깃털처럼 사뿐한 존재, 난 쪼다야, 벌레야.(Radiohead, 「Creep」) “이별 이전과 이후를 왕복”하는 박민혁의 눈앞에 “불구의 나비가 가득하다.” 사랑에 실패한 자여, 벌 받아 마땅할지어다. 자기 처벌의 황홀한 이미지 가득하다. 사랑이 떠나고 시가 왔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사랑이냐 예술이냐.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한다. 박민혁은 사랑을 붙잡을 것이다. 시보다 사랑이 아름답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랑에 서툴고 모자라고 무딘 그가 말한다. “그리움을 그러모은다. 사실 잘 모르겠어. 이게 과연 사랑이 맞는 건지.” 잘 벼려진 감정을 유려한 수사로 기술하는 박민혁이 부서진 사랑을 부드럽고 따스하게 응시한다. 박민혁은 사랑의 실패에, 삶의 비극에 무너지지 않는다. 사랑의 파국이 재연되겠지만, 사랑의 고통을 다시 껴안고, 몸서리치게 그리운 사람을 그는 우리 앞에 불러올 것이다. 벅찬 사랑의 찬가를 목 놓아 부를 것이다. “너를 앓는 일이, 내 오랜 질병과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일”이 사랑이다. 박민혁의 사랑은 절망 속에 매장했던 사랑의 대상 ‘그/그녀’를 부활시킨다. 바디우의 말과 박민혁의 시가 겹쳐진다. 이 세계에서 저는 그대와 함께하는 행복의 원천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을 직접 봅니다. 심장에서 쏟아진 말. ‘나는 너를 사랑해.’ 이 말은 내 사랑을 위해 그대가 있는 그 원천이 이곳(<대자연과 세계적인 슬픔>)에 있다는 뜻입니다.
6.
미리보기
메이
ㅣ
파란시선 67
이태선
(지은이) |
파란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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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세 개로 시집을 응축한다. 부풀다: 유령, 들썩인다, 스며든다, 파고든다. ‘나’는 ‘너’에게 점령당한다. 환시 환청 환후, 가득하다, ‘나’의 울음, 들려온다. “꿈에 보았던 뜨거운 물살”(「드라이브」)처럼 “멀리 있는”(「습기야 곰팡이들아」) ‘네’가 되살아난다. ‘네’가 말한다. “어디에 있든 당신은 다 나의 것입니다”(「물통이 떠내려가는 바다」). 놓쳐 버린, 분질러 버린, 불태워 버린 ‘너’를 위해 ‘나’는, ‘나’를 처벌한다, 매몰한다. “마른번개가 나를 지지길/발목을 분질러 버리길”(「바나나가 익고 칡꽃이 피는 계절이다」) 갈망한다. “나를 가두는 비가 와야 한다”(「드럼통 물통 저것」). “빠개진 눈으로”(「개같이」) 바라보는 세상이 ‘너’로 채워진다. 부푸는 ‘너’의 냄새. “보도블록 움푹 꺼진 것처럼 먹먹한 냄새”(「냄새」) 퍼진다. “엄마는 널 보여 주려고 날 낳았는지” “너는 사라지지 않는다”(「아스팔트 위에 너는 이글대고」). 시인이 할 수 있는 일. “이불을 뒤집어쓰고 샤우팅 샤우팅” 할 뿐. “뼈가 타들어 가는 느낌”(「샤우팅」)에 빠져 “나는 불 꺼진 집에 이불을 펴고 너를 재운다/작은 잿더미를 다독이며”(「너를 사랑한다! 나를 사랑하지 마세요!」). ‘나’의 “화창한 멸망”(「사치」)이 이루어진다. 우거지다: 어떤 것, 그 누구, 침입한다, 내부로. 찌른다, 울부짖는다, 들끓는다, 불붙는다. “차가워도 빨갛게”(「차가워도 빨갛게」) 이글거린다, 타오른다, 터진다, 튀긴다, 흩뿌린다. 시인은 “머리칼을 말리다가 언뜻 뜨거운 널 본다”(「힘 너머의 힘」). ‘나’는 ‘너’에게 점령된 채 “움직일 수 없어 불타고 있는”(「구석방 사람」) 중이다. ‘너’로 무성하게 우거진 ‘나’의 가슴을 뚫고 나오는 “나의 힘 너머의 힘”(「힘 너머의 힘」)을 지닌 “너는 내 허리와 가슴까지 찼다”(「그렇다면 나는 매 순간 너를 믿고」). “까마귀가 건설하는/너울대는 공중을 오가며”(「격한 고속도로」) “나는 너의 끝에 가닿으려 하는가 보다”(「그렇다면 나는 매 순간 너를 믿고」). “울고 난 뺨같이 사과가 익는다”(「사과나무는 더 그리운 사과를」). “한 가지 미지가 흐르는 창문”(「창궐」)이 열린다. 참척을 마감하고 ‘나’는 먼 곳으로 떠난다. 경이롭다: 이미지의 승리. “그늘까지도 버릴 게 없”(「어떤 날은 풍뎅이」)는 날이다. “꽃이 피어 있는 오늘은 무슨 날인가” “잔디는 파랗게//세상은 드문드문 가득히” “돌 하나 환하게 굴러오고//조랑말 발소리 내게 스며드는//오늘은 무슨 날인가”(「신기하다」). 시인을 찾아온 경이. 손 놓고 ‘너’는 흰 날개 펼쳐 창공으로 날아가고 있다. “아이의 입속 흰 별사탕같이”(「눈뜨자마자 빛이 나는」) “모나코쁘띠크 발음 같은 불”이 환하다. “고양이가 흰 종이처럼 울음을 빛내고 있”(「적도」)는 오늘, “세상에 처음으로 솟아나는 샘물 같은 노래”(「Hey, Jude」)를 부른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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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청둥오리였을 때 나는 무엇이었을까
ㅣ
파란시선 61
성선경
(지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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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술과 묘사를 횡단하는 사람, 노래와 시를 아우르는 사람, 양극(兩極) 사이에서 인생이 빚어내는 감정의 변화무쌍을 자재롭게 배치하는 사람. 시인 성선경. 인생을 짊어진 가장의 힘센 어깨와 책임 투철한 장남의 팔뚝을 지녔지만, 그는 순하고, 더불어 그는 강하다. 꽃 피듯 환하게 웃지만 그늘 많은 울음을 머금은 사람. 읽기를 마치는 순간, ‘그 사람’이 마음에 상감(象嵌)된다. 그의 몸과 마음에는 들끓는 고요와 뜨거운 적요가 빡빡하다. 「적막 상점 16」에 출렁이는 반복과 차이의 춤, 리트로넬로의 실현. 시인이 거주하는 ‘적막 상점’은, 그 점방의 주인 성선경은 아름다운 마음-풍경을 펼쳐 보인다. “물끄러미, 물끄러미/한낮의 휘발, 마음의 휘발”로(「몽환」), “사랑 그림자조차 데리고 떠나가는/꽃밭 속의 저 나비도/다 알진 못할 봄날”로(「별리 1」), “사향제비나비”(「선정」)처럼 마실 가는 시인. “늦어도 늦어도 늦지 않은 봄” 한낮에 “사랑초를 옮겨 심”고는 “하염없네”(「네가 청둥오리였을 때 나는 무엇이었을까」) 노래하며 새로 시작할 사랑을 기다리던 그가 찾아낸 이미지. “쥐눈이콩 쥐눈이콩 꼬투리가/뙤약볕을 받아 곧 터질 듯”하다. 고적 속에서 “똘망똘망 까맣고 까만” 쥐눈이콩 반짝거린다.(「행선」) 펑 터지는, 팍 깨지는, 푹 들어오는 몸-이미지-풍경. “밝은 별빛이 눈을 찌른다”(「돋을 별」). 시인의 이름에서 찾아낸 ‘선경(仙境)’. “개나리꽃같이 피는 슈슈슈 햇살”과 “꽝꽝꽝 겨울”과 “가옥가옥 넝마같이 흔들리며 걸린 달”(「보리밭과 까마귀」)을 가슴에 품고서 시인이 묻는다. “나는 또 어떤 풍경에 끌려와/여기 이 자리에 배경으로 맺혔나?”(「적막 상점 12」) “나는 이제 무엇을 버려야 하나/나는 이제 무엇으로 남아야 하나”(「해음 5」). 회답할 수밖에…… 시집 곳곳에서 번뜩이는, 생의 희로애락과 생로병사를 단숨에 압축해 버리는 부사(어)로 말할 수밖에……. “아득하게/막막하게”(「노을에 기대어」) 그리고 “물끄러미”(「별리 3」). “저녁노을을 빈한의 이불로 삼아/지친 어깨를 가만히 묻는”(「적막 상점 15」) 시인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왔다. “맵싹하고 시원 칼칼”하다(「해음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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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밥의 왕자
ㅣ
파란시선 49
양균원
(지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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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 흘러간 것, 돌아오지 않는 것들을 호명하면서, 찬(讚)과 탄(歎)과 모(慕)와 경(憬)을 불러 모아 환하게, 여기에, 불빛을 드리워 주는 사람. 그는 나보다 더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 내 아픔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 내 사랑보다 더 짙은 사랑의 숲을 가꾸어 놓은 사람. 착하고 맑은 그 사람에게 기댄다. <집밥의 왕자>는 육체에 누적된 시간의 양과 상관없이 언어의 청춘을 살아 내고 있는 남편의, 아버지의 비망록(“한바탕 물장난 후에 투명한 웃음 방울을 도처에 떨구다가 수건 한 장으로 닦을 수 없는 향기를 안고 아이는 잠시 빈 내 무릎에 얼굴을 얹고 귀를 내민다”, 「돌아누운 도토리같이」)이다. 그의 짙고 두껍고 무거운 열망(“질리도록 껴안아야/헤어질 것이므로/악 소리 나게 까칠한 턱수염이/언젠가 그리울 것이므로/지금 사무치게 부대끼지 않으면/어쩐지 시작도 끝도 사라질 것 같아서”, 「느티나무 집」)을 읽고서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는 바위’가 되겠다고 다짐할 수는 없다. 시인의 애련(愛戀)이라면 다 열고 받아들이리라, 빨아먹으리라. 슬픔과 기쁨 사이에서 길을 잃어도 좋다. 그 어둠 속에 묻혀도 좋다. 저무는 생의 뒷골목을 헤매다 불타 재가 되어도 괜찮다. “생장하는 것의 정수리에서/투명하게 솟구치는 것들/무중력의 깊이로 날아오르는 것들”(「산티아고 영감이 사자 꿈을 꾸는 새벽」)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초저녁 거실에 비상착륙하는/서녘 빛의 동체/당신의 말이 돌아오고” “식탁 모서리로/당신의 말이 가물가물 번져”(「굿이브닝, 내 사랑」) 오는 순간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양균원과 함께 간다. 그의 뜨겁고 아프고 높고 쓸쓸한 시들을 읽어 가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눈물범벅 웃음꽃 만발 속에서 저리는 어깨 위 짓누르는 어둠을 경험하고 말지만, 동행의 끝까지 늙고 외롭게 걸어가겠지만, 그 명징한 시간의 마지막 지점에 당도하겠지만, 이별할 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랑했으니까, 사랑을 주고받았으니까, 아름다웠어, 당신, 참 좋은 사람이야, 마지막 말이야, 당신을 사랑해.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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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도 당신처럼 외로움을 느낄 때
ㅣ
파란시선 48
최승철
(지은이) |
파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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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히, 가난은 세상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히히, 4」) 진언(眞言)이다. 쓸쓸해진다. 통증과 진동이 몰려온다. 최승철의 시를 읽은 후 동사 ‘견디다’가 쓸모없는 단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처참해진다. 우리가 알지 못했거나 무시했던 가난의 현재와 과거, 가난의 고통과 슬픔. 가난의 모멸과 형극이 그려 내는 이미지를 끌어안은 채 희생양이 되려고 하는 자를 목격한다. 고통이여, 만개하라. ‘나’는 당신들의 모든 아픔이 되리라. ‘나’는 처형되리라. 짊어지리라. 혼돈의 절망향에서 절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대신해서 피 흘리는 자, 최승철이다. 절망보다 빠르게 피, 쏟아진다, 피, 번진다. 피 냄새, 피어난다. 공포가 배회한다. 사랑은 병들었다. 최승철은 패배했지만, 사랑을 잃었지만, 지지 않았고, 상실하지 않았다. 그는 달궈진 강철이다. 시는 해머이고, 세상은 모루이다. 살아 있는 한, 시는 최승철의 애인이고 무기이고 어머니이고 또한 슬픔, 절망, 행복, 사랑이다. 절망 접종. 전염. 죽음의 창궐. 염장된 시. 독자를 담금질하는 빈곤의, 이 국가의, 이 시대의, 이 시집의 단어-문장-통사-시스템-의미-가치. 뜨겁고 들끓어 아프고 아프다. 고독인데 고독이라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인데 고통이라고 응답할 수 없는 시들. 우리는 시들고 말겠지만, 시의 잎들은 지느러미 달고 세상으로, 우리 몸 안으로, 밀고 간다, 밀려온다. 최승철의 시집은 “죽음의 진화된 형식”(「키위 혹은 냉장고」)이다. 시집을 덮을 때, 우리의 모든 발화는 부정어 ‘않다’로 종결될 것이다. 이 시집은 강건한, 부정의 부정의 부정이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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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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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시선 37
김건영
(지은이) |
파란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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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조정하는, 변경하는, 재배치하는 김건영의 전략적 시 쓰기는 단어와 통사(統辭)를 무기화하여 독자가 살고 있는 세계에 다련장 로켓처럼 새로움을 쏟아붓는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고,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선과 악이 서로를 갉아먹고, 사랑과 증오가 몸을 섞는다. 푸른 불꽃놀이. 터지는 것들. 『파이』의 꽃불이 환하다. “알약 세 개를 세게 삼”킨 후 “나는 여전히 더러 울고 더러울 테니 너희들은 비를 맞으라”고 명령하고(「모잠비크 드릴」), “불 안에서 불안 참기”에 매진하다가 “버드나무 속에는 버드”가 살고 있다고 우기고(「B」), “추악한 것은 날개가 있”기에 “망국의 노동자여 간결하라”고 외치고(「0―蛇傳 0」), “교무실에서 촌지 난사가 일어”나자 “罪送합니다”라고 조아리고(「받아쓰기―蛇傳 1」), “난 爭議가 쏘아 올린 작은 鳳” 앞에서 “나를 키운 것은 페라리 바람이었다”고 자백하고(「일요일―蛇傳 7」), “왜 난 조그만 일에만 붕괴하는가” 자괴하면서 “미녀와 외야수”가 공을 던지고 치는 9회 말의 “폐허 플레이”를 기념하기 위해 “라면이 분다/살아 봐야겠다”고 다짐하는(「야구―蛇傳 9」), 이 시인의 달콤한 ??파이??를 베어 물 때 떠오르는 신밧드와 앨리스의 얼굴. 절망과 열망이 들끓던 김건영의 얼굴. 등단 무렵 강화도에서 목격한 그의 내면. “태풍이 닮으려던 것은 꽃잎의 형상”(<21>)이라는 것, 그 자신이 그러하다는 것. 섬세하고 깊어서 여리고 연약하기까지 한 그의 안에서 퍼져 나오는 환등기 빛. “나무를 타고 올라 목련 꽃의 고개를 똑똑 분지르는 뱀”이 가슴팍을 지나간다. 김건영의 ‘蛇傳’은 “소실점으로 떠나는 뱀의 뒷모습으로” 기록되고 있다.(「미미크리」) 당신은 지금 막 그의 포로가 된 것이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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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책
ㅣ
조정권 유고집 1
조정권
(지은이) |
파란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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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책』은 선생이 우리에게 보낸 “절복(切腹)의 편지”이다. ‘결단코 완독할 수 없는 삶이라는 책’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았던/기다림”의 가치를 발견한다. 선생이 남겨 놓은 사랑의 말을 되된다. “기다린다는 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선생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겨 놓은 말, 낮게 소곤거리지만, 번개처럼 몸을 갈라 버리는 구절. “우리가/함께한다는 것./우리가 하루하루/곁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서로 머문다는 것/한 송이 어깨 옆에 또 하나의 어깨처럼.”(「히비스커스라는 꽃에 바친 일곱 편의 시와 오늘 하루의 노래」) 세간에서 선생의 시 세계를 지칭했던 단어 ‘정신’을 『삶이라는 책』은 거부한다. 선생은 공허한 정신과 축약한 언어를 교환하지 않았다. 선생의 짧은 시에는 이미지즘에 기반을 둔 강렬한 이미지가 크롬처럼 반짝인다. “파란만장한 사람 혼자 가기엔 너무나 환한 햇빛/매미 소리 돗자리 들고 아카시아 숲으로 누우러 간다.”(「환한」)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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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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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시선 30
박용진
(지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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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묻는다. 박용진은 가슴속에서 사라진 ‘나’들을 꺼낸다. 부활이다. 갱생이다. 돌아서면 잊히는 것들, 애써 외면했던 것들, 산 채로 파묻힌 것들을 불러 놓고 박용진은 묻는다. 지울 수 있느냐고, 이길 수 있느냐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느냐고. 이 시집은 두 개의 극성(極性)을 지닌다. 박용진의 체온 묻은 언어가 정교하게 구축한 시들은 다감하고 냉철하다. 울부짖다가 콧노래에 젖는다. 애원하다가 저주한다. 탄생의 고통과 죽음의 쾌락을 탄주한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 ‘나’를 낳은 아버지와 아이를 낳아서 아버지가 된 ‘나’ 사이에, 에로스와 타나토스 사이에 박용진은 변화무쌍한 시를 펼쳐 놓는다. 찬란한 극성(極星)이 하늘을 수놓는다. 박용진에게 다시 묻는다. 사랑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수평선 따라 뼛속 깊이 기울어”지는 그대여, 오늘은 “천천히 달빛이나 풀어놓”고 “슬금슬금 술잔이나 기울입시다”(?Kronos?). 그대가 나에게 선사한 사랑 한 잔이면, 울지 않고, 다른 사랑으로 옮겨 갈 수 있을 것이오. 출렁거리는, “까맣게 터질 것 같”은 “까만 울음”(?까만?)을 기억하기 위해, 나는 지금, 그대의 비기(?記)를, 검은 발광체(發光體)를 펼친다. 방사(放射)되는 푸가가 들린다. 사랑에 절망한 자의 새 사랑이 시작되고 있다. 박용진은 철필로 살갗에 기록한다. 박용진의 시집은 삶이 부식시킨 과거를, 우리가 망실한 피붙이의 사랑을 되살리는 “술탄을 위한 문서 복원술”(흥분의 역사)이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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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흥문화 답사기
임상태
(지은이) |
몽트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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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영원한 여행자이다. 그는 예술과 자신의 영육을 교환한 광인이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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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이
ㅣ
파란시선 19
최원
(지은이) |
파란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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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은 소리치지 않는다. 최원은 웃지 않는다. 최원은 침묵에 빠지지 않는다. 최원은 들뜨지 않는다. 최원은 소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최원은 사랑을 주문하지 않는다. 최원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최원은 시 속에서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 최원은 자신의 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잊지 않는다. 최원은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등 돌리지 않는다. 최원은 인생의 슬픔과 행복을 교환하지 않는다. 최원은 삶의 상처를 시로 봉인하지 않는다. 최원은 언어를 장식하지 않는다. 최원은 이 세계를 망각하지 않는다. 최원은 진보를 포기하지 않는다. 최원은 자신을 배반하고 시를 배반하기 위해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최원은 흔들리지 않는다. 최원은 스스로 돌기 시작한, 자신이 품고 있는 사랑을 변주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지금 시작하고 있는, 시인이다. 최원은 말했다. “나는 먼 곳으로부터 가까운 곳으로/흑점으로부터 붉은 불꽃의 눈동자에게로/다가왔으므로 필연이다”(?융?). 그의 시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사랑의 필연과 결연한 고투로 이룩한 결실이다. “구워진 숯처럼 바삭거리는/생의 꼭짓점”(?청맹?)에 도달해서, 생의 진경산수를 펼쳐 놓고 최원은 순교를 떠올린다. “당신이 나를 허용한 후에/자백한 포로처럼 꽃잎은 시든다”(?벌과 罪?). 그리하여, 최원은 운다. 최원은 손을 내밀고 제 몸의 일부를 비워 타자를 껴안는다. 사랑으로, 더 많은 사랑으로, 더욱더 깊은 사랑으로, 허물어진 우리의 삶을 채워 나가기 위해 최원은 “깊어질수록 소멸에 기우는 밤” 속으로, “저기 깊은 곳에서/아득한 곳으로”(?미영이?) 걸어간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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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두건의 배 속에 잠들어 배고픈 늑대의 꿈
ㅣ
문학들 시선 32
김청우
(지은이) |
문학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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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빨간 두건의 배 속에 잠들어 배고픈 늑대의 꿈』을 읽고 단번에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시각 이미지의 상호텍스트적 혼합, 정신분석적 차원의 담화들, 복수 주체의 전면적 등장, 환상과 실재의 교직…… 김청우의 시는 낯설고 복잡하고 새롭고 아름답다. 그가 이번 시집에서 시도하고 있는 다양한 실험 양식의 스펙트럼이 보여 주는 화려한 새로움의 문양은 첨단에서 미학적 혁신을 시도하는 투사의 의지를 강렬하게 드러낸다. 김청우의 격렬한 실험이 매우 공격적(aggressive)으로 느껴지는 이유이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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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튬
ㅣ
시작시인선 152
채상우
(지은이) |
천년의시작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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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절멸한 뒤, 채상우가 지르는 비명 소리, 세계의 비명 소리가 여기에 있다. 채상우는 절규하지 않는다. 과거의 습격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듯이, 채상우는 오늘의 검은 절망을 피하지 않는다. 채상우의 저녁은 세계가 내일의 문을 닫아 버리는, 괴멸될 오늘의 운명을 문자로 기록하여 영원한 기억이 되게 하는, 절멸될 존재들의 마지막 비명 소리가 압착되는 때다. 그리하여, 오늘 저녁 “하늘에 남겨진 새의 주저흔들”이 새겨지고, “어느 목숨에나 기생하는 적멸의 기원”이 탄생하고, “내가 지금껏 공들여 필경해 온 연대기”가 완성된다. 채상우는 “곳곳에 나부끼는 다정한 迷妄과 痴毒”과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머릿속의 목소리들”에게 “안녕 안녕”을 고한다. “이젠 더 이상 내가 궁금하지 않”은(시작 메모―浪人情歌) ‘나’는 지금 “끝장나는 중이”지만(<一片丹心>), 저 세계의 비명 소리가 채상우를 횡단할 때, 검은 사랑은 “그날 저녁 이후 궁금해지는 生死”(저녁이면 저녁이)로 귀소한다. “죽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스며들고 있는 허공” 속을 “새가 날고 있다”. 채상우는 “죽은 산수유나무 가지”에 “잎이 돋”고 있는 광경을 바라본다. “이곳을 떠날 수가 없다”고 침묵의 비명을 지른다.(세계의 끝) 채상우는 묻는다. “이 흔들리는 저녁에 담긴 그날 저녁은 정녕 무엇인가 그 많던 저녁들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그날 저녁만 남아 저녁이 되었는가”.(저녁이면 저녁이) “그날 저녁”에 벌어진 일을 잊을 수 없다고 절규한다. 잊을 수 없기 때문에, 채상우는 기억한다. 여기 그날이 있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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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 시인선 423
류인서
(지은이)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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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점을 향해 류인서는 전진한다. 고요를 다스리고, 침묵으로 세계를 조종하고, 도래할 파열의 순간을 기다리는 어떤 짐승의 검은 눈빛이 여기에 있다. 이것이 류인서의 힘이다. 그의 고요는 조화와 균형으로 생성된 것이 아니다. 시인의 감각이 벌어짐과 다묾 사이에서 깊이를 장전할 때, 균형과 조화가 이룩되려는 그 순간, 끓는점 직전에, 류인서의 시는 야수적 감각의 이빨을 드러낸다. 전체성을 물어뜯고 균형과 조화를 배반한 시는 생생한 감각으로 으르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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