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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국내저자 >
시
이름:
채상우
성별:
남성
국적:
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
,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주
최근작
2021년 8월 <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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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 속에는 나무가 산다
ㅣ
파란시선 150
이필선
(지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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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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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 배롱나무, 목련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대추나무 그리고 주목나무…… 이필선의 시는 온통 나무들로 은성하다. 그런데 그 나무들은 하나같이 “그림자조차 만들지 못한 삶을 세워 놓고” “시작도 끝도 없는 동그란 흉터”로 어루러기져 있다(「서시」). 사람으로 치자면 어느 “홀아비”처럼 그리고 그와 함께 떠난 “애 딸린 과부”처럼(「소문」), 또는 어느 “외진 곳 공중전화 부스에 송화기를 손으로 막고/가늘게 어깨를 떠는 비구니”처럼(「비거스렁이」), 혹은 “좌판도 없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노점상 노파처럼(「노점상」), “파스 냄새가 나는 어머니”처럼(「김치에게 들키고 싶은 날」), “그믐달처럼 누워 천천히 가라앉”은 어느 배송 기사처럼 말이다(「상어는 움직이지 않으면 물에 가라앉는다」). 물론 흉터의 연원은 모두 다르겠지만 그런데 이 “몸의 흔적들”은(「양수리에서」), 놀라워라, 시인의 눈길이 닿는 순간 그 하나마다 “꽃잎이 앉았던 자리”로 화한다(「삶은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옮기자면 “상처는 꽃의 모습을 닮아 가고 있었다”(「우울한 갈증」). 그러니 이렇게 말해도 되지 않겠는가. 흉터는 다만 상한 자리 혹은 상처가 아문 흔적이 아니라 그곳이 바로 지금 꽃이 피어나는 곳이라고, 아니 실은 흉터가 다름 아닌 꽃이라고. 시인이 “기억이 얼마나 많은 망각을 키우는지” 경계하는 까닭도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고백―작은딸 민솔에게」). 시인이 행간 도처에서 행하는 ‘기억하기’는 선택과 배제의 책략이 아니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오래된 사진」) 즉 생의 본질을 구축하고자 하는 충실성의 실천이다. 비유컨대 그것은 “텅 비어 있는 저 심연 속으로 빨간 등”을 “다시” 켜는 일이다(「정암사 주목나무」). 그 심연마다 흉터마다 꽃이 핀다. 시가 맺힌다. 참 아슬아슬한 시경(詩境)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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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 환했다
ㅣ
파란시선 143
성명진
(지은이) |
파란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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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슬픔을 “이기고 돌아와” “너를 안아 주겠다”고 ‘들꽃’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는 시인이 있다. 그런데 그건 아무래도 불가능한 일이지 않은가. 누군들 슬픔을 이길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슬픔을 이기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차마 지켜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슬픔이 비록 “한 가지”고 “우리를 괴롭혀 온” 것으로 한정된 것이라 해도 그렇다. 아니 오히려 우리 앞에 당도하는 슬픔은 아무리 헤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을뿐더러 매번 “한 가지”씩 늘어나기만 한다. [몰래 환했다]의 면면마다 적힌 시인이 다녀온 “어디”들 곳곳에 스며 있는 저 막막(漠漠)한 슬픔의 내력들을 보라.(「들꽃에게」) 시인은 단 한 번도 슬픔을 이긴 적이 없으며 책엽을 넘길수록 그 질량과 밀도만 더할 뿐이다. [몰래 환했다]는 예컨대 “농가의 작은 방구석에 자빠져 있”다가 “벌떡 일어”나 차비 얼마를 얻어 상경한 “까무잡잡한 얼굴”의 ‘소년’이(「복서」) 결국엔 “서둘러 햇빛이 빠져나가는 도시의 끝자리”에서 죽은 채 “밀거래되”는 ‘김 과장’이(「고라니」) 되는 비루하고 비참한 역정이며, 그를 둘러싼 “멍하게 바깥을 바라보던 어미”와(「마루 끝」) “어째서 이리 됐냐” “그러게 세상일에 나서지 말라고 했잖어”라며 “자식을 보자마자 버럭 소리 지르”는 아비(「가지가 다쳤을 때」), 그리고 우리 곁의 누구여도 상관없을 “광식이”(「도마뱀」), “김삼구”, “판식이 대호 명기”(「오래된 냉장고」), 때로는 “얼마 전 사랑하는 이를 여읜 사람”의(「나물국」) 슬픔의 책력이다. 요컨대 [몰래 환했다]에는 “워낙 힘들게 살아” 온 사람들로(「감자꽃」) 그만 한가득이다. 그런데 놀라워라. 그 “가늘고 휜 조각 등들”이 “여럿 모이니” “둥글어졌다”. 그리고 “거기서 빛이 났다”.(「보름밤」) 그리고 “그게 충분히 행운이 되었다”(「농부 김천식」). 그리고 “몰래 환했다”(「우수 무렵」). 대체 어떻게 이게 가능하단 말인가. 당장 말하건대 그 까닭은 이들이 다름 아닌 시인이 “예뻐라”라며 찬탄했던(「들꽃에게」) 저 ‘들꽃’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시인이 슬픔을 이기고 돌아와 안아 주겠다는 ‘들꽃’이 실은 바로 슬픔 그것인 것이다. 그러니 [몰래 환했다]는 이미 도착했으나 또한 이미 다시 출발하고 있는 슬픔의 편력인 셈인데, 단지 여기저기를 떠도는 천력이 아니라 오롯이 슬픔을 향해 무한 귀환하는 오디세이다. 시인이 적은바 “적막 속 한 사람이” “먼 곳을 향해” “목을 기울”이듯(「목례」), 나도 시인을 향해 고개를 숙여 다만 그 순순함에 고마움을 표할 따름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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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로 하는 귓속말
ㅣ
파란시선 132
정창준
(지은이) |
파란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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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를 자른다. 먼 것들이 오히려 선명하게 다가오는 시간, 두부를 자른다. 세상은 뜻 없이 나를 만들었기에 너는 나에게 그래서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했다. 두부를 자른다. 서울이 아름다운 건 우리가 없기 때문일까. 분실한 색들은 어디에 있을까. 부드럽지만 부서지지 않는 두부를 자른다. 당신에게 끌리는 것을 눈치챘습니까. 연필심을 뚝뚝 부러뜨리며 너는 대답했다. 마음만 닿았는데 죄짓는 기분입니다. 왜 어떤 기억은 기화되지 않고 와락 쏟아져 스며드는가. 나쁜 짓만 저질러 온 내 손이 네 젖은 얼굴을 더듬는다. 어리석게도 오래 당신을 잊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면 정말 먼저 잊혀질 수 있나요. 더 여위고 붉어지기 전에 두부를 자른다. 위험하지 않은 모서리를 모서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은 영혼에 상처가 없는 소년의 이름을 부르는 일. 진짜 상처는 열여섯 살 이후에 생긴다. 뭐든 감추고 싶었던 소년의 세계. 그러나 여전히 나는 젊어서 불안합니다. 다행히 진짜 얼굴은 들키지 않았습니다. 술자리에 앉은 시간보다 바깥에 나와 서성이는 시간이 더 긴 사람들. 오직 여윈 몸만이 선량하다. 일하다 죽은 사람들에 대한 뉴스를 들으며 두부를 자른다. 나는 조금 더 위험한 사람이 되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나는 이제 나를 믿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덜 새로운 날들을 살아야 한다. 망각은 꽃 속처럼 깊고 아득해서 멍든다. 우리는 얼마나 더 개량되어야 하나요? 단지 나는 조금 더 정의롭고 쓸모 있고 싶었습니다. 지난 세기는 지나서 아름답고 낯설구나. 역사 교과서 사진 속 이름 없는 의병처럼, 미얀마의 총성처럼, 재개발지구의 세입자처럼, 홍콩의 우산처럼, 망월동의 무연고 묘역처럼, 아프가니스탄의 기도처럼. 제 몸을 갈아 넣어야 원하는 삶이 가능한 걸까. 검은물잠자리만 수면을 만져 보다 달아난다. 밤이 되면 나의 수어는 사라진다. 문득 가지 않을 문병을 나서고 싶어졌다. 그래도 끝까지 비명을 지르지 않는 두부를 자른다. 혼자였고 혼자일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새들은 죽을 때 한결같이 허공을 움켜쥔다. 없는 것, 그러나 없지 않은 것.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것. 오늘은 당신의 흰 얼굴 앞에 부동의 자세로 선 소년이 되어 두부를 자른다. 잘라 낸 시간의 단면은 오직 눈부신 흰빛입니다. 당신은 어디에도 없어서 아름답습니다. 그리하여 안녕. 정녕 안녕. 언제나 거기 있는 것. 뜻 없이. 고인 것들이 가진 악력이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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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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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기대”도 없고 “어제”도 없다면 달리 말해 미래도 없고 과거도 없다면 그리하여 우리에게 수락된 시간이 다만 현재뿐이라면 삶은 대체 가능할까? 그리고 그런 삶은 정녕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런데 이런 질문들은 생각해 보면 지극히 속화된 윤리나 신념에 지나지 않는다. 왜 아니겠는가. 앞에 적은 질문들은 어쨌거나 현재를, 미래를 위해 복무하거나 과거를 복기하는 시간으로 철집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냉정하게 적자면 “기대”와 “어제”로 에워싸인 삶이란 실은 현재를 소거해 얻은 바다. 이은기는 아마도 여기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그녀는 “기대 없이 어제 없이” 오롯이 현재를 쓴다. 그래서 이은기가 쓴 문장들은 미래를 향해 전진하지도 않고 과거를 되돌아보지도 않는다. 믿기지 않을 만큼 이은기의 문장들은 자신이 불현듯 솟아오른 자리에서 매번 고립을 자청한다. 이은기의 시가 낯선 까닭은 무엇보다 이 때문이다. 요컨대 이은기의 시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접촉해 보지 못한 “진짜” 현재가 단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놀라워라. 그 “진짜” 현재는 기이한 “깊이”를 가지는데 역설적이게도 현재가 “깊이는 없고 둘레만 있는 연못”과 같기 때문이다. “둘레만 있는 연못”이 지니는 “깊이”란 물론 실제 깊고 얕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이때 “깊이”는 깊이가 사라진 깊이이고 그래서 “둘레만 있는 연못”은 무엇이든 빨아들이고 감당할 수 있는 도저한 심연으로 작동한다. 에두르지 않고 말하겠다. 이것이 바로 시다. 이은기의 시를 읽으면서 매혹되었던 생경하나 충만한 미감의 정체를 이제는 알겠다. “비어 있는 곳에서 물줄기가 솟구치고 음악이 나온다”. 단연코 아름답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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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파란시선 72
손석호
(지은이) |
파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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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고 있다. ‘마포대교’가 불타고 있다. ‘마포대교 난간’이 불타고 있다. ‘공단’이 불타고 있다. ‘구의역’이, ‘승강장 9-4’가 불타고 있다. ‘계약직 청년’이 불타고 있다. ‘꽃잎 한 장’이 불타고 있다. ‘반지하방’이 불타고 있다. ‘남편의 죽음을 모르는 아내’가 불타고 있다. ‘가족’이 불타고 있다. ‘묘지’가 불타고 있다. ‘컨베이어 벨트’가 불타고 있다. ‘사무실’이, ‘넥타이’가 불타고 있다. ‘소주잔’이 불타고 있다. ‘낮과 밤’으로 불타고 있다. “얼굴에서 꺼지지 않는 화염”, “노을에 불을 붙인다”. ‘골목’이 불타고 있다. ‘야근’이 불타고 있다. ‘야근을 마친 동료들’이 불타고 있다. ‘새 떼’가 불타고 있다. ‘용융점’이 불타고 있다. “육신이 화장로에 피고 있다”. ‘타워크레인’이 불타고 있다. ‘오래된 회전축’이 불타고 있다. ‘신도림역’이 불타고 있다. ‘지구’가 불타고 있다. “굴뚝이 내뿜는 화염이 밀려오는 어둠을 끝없이 태”우고 있다. ‘아버지’가 불타고 있다. ‘아버지’가 들고 선 ‘들돌’이 불타고 있다. ‘내성천’이, ‘갱빈’이 불타고 있다. ‘동사리’가 불타고 있다. ‘송아지’가 불타고 있다. ‘논둑’이, ‘뙈기밭’이, ‘난전’이 불타고 있다. ‘농자금 대출이자’가 불타고 있다. ‘생장점’이 불타고 있다. ‘저무는 빈 전깃줄’이, ‘서녘 길 윤슬’이, ‘은하수’가 불타고 있다. ‘제비 새끼’가, ‘처마’가 불타고 있다. ‘독촉장’이 불타고 있다. ‘숟가락’이 불타고 있다. ‘밥솥’과 ‘밥그릇’이, ‘밥’이 불타고 있다. ‘홀로 깬 실직의 한낮’이, ‘늦은 저녁상’이 불타고 있다. ‘대리기사’가 불타고 있다. ‘연탄재’가 불타고 있다. ‘유서’가 불타고 있다. “사람들이 죽음을 에워싸고 있다”. ‘목련’이 불타고 있다. ‘허공의 심장’이 불타고 있다. ‘청보리밭’이, ‘비 갠 마당’이, ‘모시나비’가 불타고 있다. ‘장기수’가 불타고 있다. ‘풀잎배’가 불타고 있다. ‘무량수전’이 불타고 있다. ‘저 밑바닥’이 불타고 있다. ‘대합실’이 불타고 있다. ‘맨발’이, ‘내일’이, ‘길’이, ‘사라진 길’이 불타고 있다. ‘혼잣말’이 불타고 있다. ‘당신의 입술’이 불타고 있다.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당신’이 불타고 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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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
ㅣ
파란시선 53
신미균
(지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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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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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균의 시는 재밌다. 그런데 또한 슬프다. 요컨대 웃프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미균의 시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게 만든다. 물론 신미균 시의 곳곳에서 마주치게 되는 이러한 난처는 망설임 없이 모순과 역설과 자기부정으로 구성된 바라고 금방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미균이 제시하는 곤혹들은 단지 수사나 기지로 마련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삶이 바로 그런 모양새이기 때문에 어쩔 도리 없이 그렇게 적은 것이다. 난경은 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신미균은 이 사실을 더하거나 빼서 적당히 맞추거나 슬며시 한쪽을 편들거나 그럴듯한 깨달음 따위에 기대거나 하지 않고 다만 곧이곧대로 적확하게 쓸 뿐이다. 그래서 신미균의 시는 간명하다. 그러나 그래서 읽고 나면 불편하고 무참해진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신미균이 딱 여기까지만 쓴다는 점이다. 이는 절제가 아니라 어쩌면 초과다. 우리의 삶 자체가 요령부득의 난경이라면 그것은 부정과 극복이 아니라 긍정과 사랑의 대상이자 기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름 아닌 시다. 그러니까 신미균은 지금 사랑을 갱신하고 있는 셈이다. “길은 처음부터 없었”다. 이 길 없음의 길에 당신이 함께하면 좋겠다. 약속하건대 당신은 그때 문득, 비로소 웃을 수 있을 것이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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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을 태우고 바람이 난다
이원호
(지은이) |
파란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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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이제” 와서 “다시” <노동의 새벽>을 읽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물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의 새벽”은 “아직도 흥건한 붉은 피를” 흘리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저 과거 속으로 떠밀어 버린, 이원호가 이십대를 보냈던, 1980년대와 1990년대는 지금-여기 도처에 여전한 것이다. 과거에 대한 애도의 완결이 불가능했다면 그 이유는 타의에서든 자의에서든 성급하게 그 시절을 닫아 버려서가 아니라 아직도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원호가 첫 시에서 발견한 “화두”는 이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떠나보냈지만 결코 떠나보낼 수 없는 그 무엇, 떠난 듯하지만 실은 여전히 떠나지 않은 그 무엇, 이곳에 현재로 지속하는 과거, 그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 말이다. 그것은 멈추지 않는 애도다. 애도는 멈추어서는 안 된다. 애도가 멈추는 순간 삶도 시도 불가능해진다. 과거가 삭제된 현재는 자폐에 지나지 않으며 그때 언어는 그저 독백에 불과하다. 애도는 윤리이자 미학이다. 이원호는 그 작업을 “다시” 시작하려 한다. “이제 다시” “멈추지 않는 자유로운 행군” 말이다. 그가 시인인 까닭은 이 때문이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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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연애
ㅣ
파란 is 1
전윤호
(지은이) |
파란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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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라면 누구나 연가집을 꿈꾼다. 괴테가 그랬고, 릴케가, 네루다가 그랬다.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도 궁극적으로는 한 편의 연가다. 연가는 받아쓰는 것이다. 사랑을 행하는 주체는 ‘나’인 듯하지만, 실은 ‘사랑’이 나를 급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운명을 직감하게 하며 열병을 앓게 만든다. 어떠한 시련이나 난관도 사랑에 휩싸인 자에겐 그저 하찮을 뿐이다. 사랑에 빠진 자는 이미 천국에 이르렀고 역경은 차라리 구원의 약속일 따름이다. 사랑에 수몰된 자에게 모든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일들이 우주적인 의미를 지니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사랑은 미풍에 흔들리는 나뭇잎도 신의 계시로 전치시키며 단 한 번의 미소만으로도 생 전체를 충만하게 한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사랑은 극히 잠깐 행복을 속삭이고 이내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사랑은 자신의 그림자를 통해 스스로를 입증한다. 그것은 비탄과 절망 속에서 더욱 굳건해지며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탄생시키고 마침내 현재와 미래마저 잠식한다. 요컨대 사랑은 부재로서 자신을 완성한다. “당신이 없는 바로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곧 글쓰기의 시작이다.”(롤랑 바르트) 그렇다. 진정한 연가는 환원 불가능한 상태의 지속이며 매 순간 죽음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러나 놀라워라, 연가는 바로 그 순간 시작한다. 사랑은 그것의 소멸을 통해 끊임없이 재림하며, 연가는 그때 비로소 불멸의 기록으로 갱신된다. 전윤호 시인은 《세상의 모든 연애》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적었다.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일 뿐이다”!(「수몰 지구」) 이 문장을 올바르게 번안하자면 ‘이제야 정녕 사랑이 시작되었다’일 것이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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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거리는 북쪽
ㅣ
파란시선 31
김남호
(지은이) |
파란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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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다. 울고 있다. “평생”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울고 있다. “마루 밑”에서 울고 있다. “뼈아픈 후회”를 하면서 “꽃잎처럼” “욕설처럼” 울고 있다. 울수록 “더러워졌고” “더러워질수록 치열해졌다”, “마른걸레처럼”. “긴 바지만 좋아하는 짧은 다리의 사내들과” 함께 “롯데시네마 지하 2관 H열 17번석에서” “목격자도 없이” 울고 있다. “후회도 없이 용서도 없이” “포르노를 보”면서 “증오 끝에 만난 과도처럼” 울고 있다. “기를 쓰고” 자신의 “나이만큼” 울고 있다. “너무 빤”하게 “너무 단순”하게 “처방전대로” 울고 있다. “하품을 참아 가며” “루주를 고쳐 가며” 울고 있다. “가을이 가고 여름이 가도” 울고 있다. “잠시 빌려 온 궁금한 평화”를 의심하며 울고 있다. “조심조심 왼쪽으로 돌아”누우며 울고 있다. “아직도 내가 나”라니! “나를 싣고 상여는 가네 앗싸!” “망각하고 망각하고 더 이상 망각할 게 뭐 없나 생각하다” 울고 있다. “당신이 저지를 죄들을!” “전후도 좌우도 모두 정면이다”. “얼레리꼴레리” “꼴릴 대로 꼴려서” 울고 있다. “후줄구레한 잠바” 차림으로 울고 있다. “구두도 벗고 팬티도 벗고” 울고 있다. “술만 취하면” “웃통 홀랑 벗고” “으르릉거리다 크르릉거리다” 울고 있다. “개처럼”, “연탄가스처럼”, “숟가락을 기다리는 입술처럼”. “서로가 서로의 뺨을 번갈아 때리”면서 울고 있다. “그래도 그런 내가 안쓰럽고 딱해서” 울고 있다. “빼도 박도 못 하”고 울고 있다. “개작두 앞으로” “끌려”가면서, “안 돌아보려고 애쓰”면서 울고 있다. “밀밭 옆 측백나무 아래서” “컵라면을 먹을까” “봉지라면을 먹을까” “고민하”면서 “죽기만 기다리고 있”다. “온몸으로 날아가는 것들은 왠지 아픕니다”. “병신같이 병신같이” 울고 있다. “쇠죽솥에 발을 불린 아버지가” “발톱을 깎으”며 울고 있다. “죽여도 죽여도” “줄지어 몰려오는” “엄마들”. 그런데 “내 딸아,” “네 이름은 뭐니?” “나에게서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내 뒷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피멍 같은 석양”을 바라보면서 “새파랗게 얼어서” 울고 있다. “그 골목에서는 목매달고 죽은 내가” 있다. “박살 난” “유골이 발견되기 전까지” 울고 있다. “내 입속에다” “제 혓바닥을 집어넣고” “마치 나처럼” 운다. 울고 있다. “이젠 대놓고” 울고 있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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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박구리의 봄노래
ㅣ
파란시선 21
홍신선
(지은이) |
파란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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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시를 두고 이런저런 말을 꿰어 맞추는 일은 아무래도 열없는 짓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그것은 마치 시삼백(詩三百)을 앞에다 놓고 “나부대”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나는 저 <시경>의 웅숭깊은 뜻을 헤아릴 지혜가 없으며, 그 수려하고 빈틈없는 꾸밈을 가늠할 시안도 없고, 옛적 사람들의 살뜰했던 하루하루와 그들의 속정을 살필 정성마저 부족하다. 그러니 나는 감히 읽을 따름이다. 읽고 또한 감히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쓸쓸해하고 안타까워하고 잠시 격분할 뿐이다. 그럴밖에. 누천년을 지나오면서 겨우 삼백 남짓 전해지는 시편들은 하늘의 무늬와 그 무늬를 펼친 법도가 이미 따로 있어 그를 애써 베끼고 옮긴 게 아니라 낱낱의 사람살이의 애틋함과 간곡함과 간혹은 구구해 보이기까지 하는 저마다의 사연들이 곧 세상의 이법이자 생의 별다를 바 없는 궁극임을 그것 스스로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저 없이 말하건대 선생님의 시가 바로 그렇다. 선생님의 시의 출처는 어디 외따로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집 뒤 야트막한 자드락”이나 “아침 녘 버스가 그냥 지나친 휑한 정류장” 혹은 “마을 회관 앞 느릅나무 잎눈”이나 “아파트 후문 근처 맥줏집”―요컨대 바로 다름 아닌 “우리 동네”에 있다. “흐르는 듯 흐르지 않는” 그곳은 그런데 놀라워라, “부정에 부정을 잇댄 순행(巡行)의 끝”에 다다른 “무작정 가려던 언젠가의 바로 그 어느 곳”이면서 더불어 “겨울 세트장 한구석”처럼 “하릴없이” “적막”하고 “소슬”하기 짝이 없는 곳이기도 하다. “쓸쓸해서 더 의연”한 거기, “무너진 축대 위 양귀비 붉은 꽃이 스스로 피었다 저절로 진다”. “어쩌랴 바로 그런 게 삶”인데. 이 경이로운 “막막”함에 무슨 말을 더 얹을 수 있겠는가. 다만 ‘읊고 연주하고 노래하고 춤추면’ “그만”이다. “됐다”. “꽃 진 자리” “푸른 하늘이 무진장 얹혀 있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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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중이 머루 알처럼 까맣게 익어 갈 때
ㅣ
파란시선 17
성선경
(지은이) |
파란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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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의 면면에는 꽃들과 나무들이 지천이다. 어디든 펼쳐 보라. 동백, 매화, 복사꽃, 벚꽃, 금마타리, 노랑제비꽃, 두루미꽃, 금강애기나리, 장미, 봉선화, 사랑초, 달맞이꽃, 석류꽃, 하늘매발톱, 호랑가시발톱, 영산홍, 능소화, 호박꽃, 만데빌라, 작약, 모란, 함박꽃, 구절초, 억새 그리고 까마중과 머루 알, 구상나무, 포도나무, 향나무, 대추나무, 대나무, 산철쭉, 돌단풍, 조팝나무, 백당나무, 앵두나무, 벽오동…. 그런데 어찌하여 이 시집은 이토록 처연한가. 이유는 단 하나다. 목숨을 건 사랑 때문이다(“누가 사랑을 저렇게 목숨 걸고 하는가?”). 그러나 안타까워라. “사랑은 벌써 지나갔다.” “너는 가고 나만 남았다”. “꽃도 풍경 소리로 운다.” 그러니 시인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잊지 않겠다는 생각을 잊으며” “당신을 잊는” 것뿐이다. 그것은 “한 백 년쯤” “밀물과 썰물” 속에 자신을 “유폐”시키고 “오만 평이나 되는 고독”을 경작하는 일이다. 그 고독 “속에 낙타를 키”운 바가 이 시집인 셈이다. 누군가는 시인이 제시하는 사랑의 양상이 지극히 낭만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단, 자신이 실제로 경험했든 그렇지 않았든 시집 전체를 구조화하고 통어하고 있다는 맥락에서 말이다. 그러나 하나 잊지 않아야 할 사실은 이 도저한 낭만적 사랑의 근원에 ‘어찌할 수 없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이제 이 마음의 빈 절간을 어쩐다”, “사랑은 아직도 어쩔 수 없는 거니”, “그래서 어쩔 것이냐?”). 그렇다. 핵심은, ‘사랑’이나 ‘이별’이나 ‘당신’이나 ‘칠월’이 아니라, 짐짓 태연자약 “못 본 척” “못 들은 척” 해도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어떤 정념에 휩싸인 상태다. 그래서 시인은 저 “참 환”한 민화의 끄트머리에도 결국은 이렇게 적고야 마는 것이다. “외상술을 마시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나이” 그러나 “그런데/술을 마시고/외상술을 마시고/진주난봉가를 부르고/뜰에다, 뜰에다 벽오동을 심는 저 화상/넌 누구냐?” 정녕 당신이 시인이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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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을 만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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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시선 14
오석균
(지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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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비가 오지 않는 나라 온 땅이 투서로 가득하다 기린을 만나러 떠나는 밤 한쪽 팔이 없는 아저씨 손가락에 물을 찍어 거울에 쓴다 자꾸만 내려야 할 곳을 찾는다 아무 역이나 내려 개찰구에 쭈그려 앉아 기다린다 국물이 참 따뜻하다 구부러진 아침 길이 꽃 아래 길게 눕는다 정녕 아프지 않고 괜찮을까 매번 발밑이 없다 그냥 멍하니 울다 잠을 깨곤 한다 아침저녁으로 챙기는 작고 예쁜 알약 스무 개 서서 꾸는 꿈을 들여다보는 것 가끔 새소리를 따라 할 수 있기를 내 얼굴이 맑다며 다가와 도를 말해 주는 사람 하루를 걸으면 이틀을 앓는다 닫힌 문 앞 그대가 운다 오늘 하루 마지막 밥상 정작 물어야 할 것은 잊어버리는 것 애인 같은 마음이었을까 밥솥을 열면 슬픔도 뜸이 들어 있을까 지는 꽃도 그럴까 한밤중에 일어나 서랍을 연다 손이 있다면 참 예쁠 텐데 천 개의 학을 단숨에 그려 보던 밤 가장 멀리 기억하리 물구나무서서 시를 외울 것 덜렁거리던 단추 그림자가 춥다 가난한 마음들 광장에 모여 점점이 앉아 있다 이월 눈은 결코 녹지 않는다 마르기 전에 눈감았으면 날은 이리 좋은데 나비 하나 날아 하늘이네 아주 잠시 머물다 떠나간다 머리나 깎고 가라며 비 지나간 칠월의 어깨를 이끄셨나 보다 겹쳐진 생의 이면들 온종일 일렁인다 처음 만난 여자에게서 나무 냄새가 났다 남자는 나무처럼 늙어 간다 한쪽으로만 익숙하게 흘러가는 바람 늘 한두 개씩 놓고 나간다 무지 아프다 나도 없고 지금도 없겠지만 오늘도 당신이 그립다 네가 봄이다: 나는 다만 시인의 문장들을 옮겨 적을 수밖에 없었다. 오래도록 쓸쓸하고 고요할 생에 감히 경의를 표한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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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냥이, 울다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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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
(지은이) |
천년의시작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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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아버지’는 얼마나 힘이 센가, 얼마나 더러운가, 얼마나 음험한가, 얼마나 비굴한가, 그리고 마침내 얼마나 치욕스러운가. 그리하여 아버지여, 당신은, 당신이 되고 싶지 않은/되고 싶은 ‘우리’가 있는 한, 언제나 우리 시대의 우화(寓話) 그 자체다. 그러나 이는 또한 우화(愚話)이지 않은가. 저기 “부러진 부리로/ 먹이를 물어 오는/ 아버지”를 보라. 아버지는 그처럼 비루하지만 “천명을 거역하지 않”고 근근이 하루하루를 살아 가족을 돌보고 자식을 기른다. 어쩌면 아버지에 대한 우화는 자신의 신원에 대한 부정과 망각을 통해 자기를 기획하고자 몸부림치는 우리 시대 아들들이 창안한 편집증적 신화인지도 모른다. 박현 시인의 이번 시편들은 저 상징적 아버지에 대한 거부와 저항, 그리고 실재적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경탄이라는 해소할 수 없는 이부작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리 시대 아들들의 자기 기획의 서사가 얼마나 조악하고 스스로에게 억압적인지를 역설적으로 정확히 드러낸다. 그러니 아들들이여, 기억하고 기억하라. “두고 떠난 아버지가 거기 있었”고 여전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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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손주의
곽향련
(지은이) |
천년의시작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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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면 낯익은 듯하지만, 한 번 읽고 다시 읽으면서 그 새삼스러움과 웅숭깊음에 문득 놀라게 되는 시가 있다. 곽향련의 '배'가 그렇다. “배 한 상자가 배달되었다/ 오목한 자리에 들앉은 둥근 머리/ 합장한 수도승 같다/ 칼등으로 툭 쳐서 승복 벗기면/ 달디단 말씀이 쏟아진다/ 가을볕에 잘 여문/ 민머리/ 묵언 중이다”. 어떤가. 저 꾸밈없는 묵언의 도량(度量)이 헤아려지는가. 나는 아직 고졸(古拙)하다라는 말의 깊은 뜻은 모르지만, 고졸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 극치의 묵언 앞에 다만 아찔할 따름이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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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가 먼지처럼 자라는 동안
김현승
(지은이) |
천년의시작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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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에는 시인 자신의 참담한 성장담이 그 심연에 놓여 있는 경우가 흔하다. 김현승 시인 또한 그러하다. 예컨대 '소녀의 방'을 보라. “소녀가 먼지처럼 자라는 동안” 시인이 감당해야 했던 저 불안과 공포의 기억들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끔찍하고 절망적인 기억이란 실은 극화된 모멘트라는 것을, 그 기억-모멘트의 정도가 시집 안쪽의 벡터라는 점을,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시인의 내면과 세계관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렇지만 김현승 시인의 이 첫 시집에는 이를 능가하는, 이보다 더 주목해야 하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공감할 줄 아는 능동성이다. 이사한 집의 “무표정한 벽지 안에 두런거리는 활자들”에서 “젖니 나던/ 나”를 읽어 낼 줄 아는('벽에서 온 사람들') 혹은 혼잡하기 짝이 없는 아침 출근 버스에서 “헐렁한 등을 입고 있어 푹신하다”(&'출근 버스')는 깨달음을 구할 수 있는 공감의 역능은 이제 참으로 드물고 귀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믿는다. 김현승 시인은 “먼지처럼 자라는 동안” 이미 자신의 첫 시집의 세계를 훌쩍 뛰어넘었으며, 앞으로 그 누구보다 더 웅숭깊은 시인이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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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술 속 분홍으로 들어와
장정자
(지은이) |
천년의시작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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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자 선생의 유고 시집 원고를 읽다가 문득 깨달았다. 시가 왜 필생의 업인지에 대해 말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가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다만 이런 시 앞에서 나는 내 생 전체가 무람해졌다. “그날 까마귀는 목구멍 깊숙이 울고 한 번 더 울었다 밤을 까맣게 앉아서 새운 돌탑 그 웅그린 색과 캭 뱉는 막막함이 길몽과 흉몽이겠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있는 새까만 새// 나는 바퀴에 깔려 죽은 잠자리와 메뚜기를 풀숲에 놓아준다 땅속 깊이 묻혔던 돌들을 꺼내어 탑을 쌓아 눈(目)과 지느러미를 달아 준 나무 지팡이를 짚고 돌탑을 돈다// (…중략…) // 언제쯤 그 유계의 동공에 들어가 그 검은 곡비의 내력을 까마귀의 언어로 울 수 있는지// 돌탑을 돈다”('돌탑'). 어쩌면 장정자 선생은 생전에 이미 저 <유마경>과 <금강경>을 거쳐 달마의 '무심론(無心論)'에 다다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평생 마음을 다해 시를 지어 얻은 바는 마음 없이 돌탑을 도는 일이었으니, 선생은 이룬 바 없이 모든 것을 이루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알겠는가. 다만 장정자 선생의 시를 읽고 다시 읽을 따름이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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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사슴동굴
ㅣ
시작시인선 158
김정임
(지은이) |
천년의시작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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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임의 <붉은사슴동굴>은 “없었던 시간들”('매직 플라워') 곧 기원(들)의 부재에서 출발한다. 부재는 지금-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맥락보다는 더 이상 “읽을 수 없는 세계”('향유고래 주파수')라는 층위의 없(었)음이다. 김정임은 툰드라와 아타카마 사막 그리고 호스슈 협곡, 붉은사슴동굴 등을 바로 그러한 “없었던 시간들”의 공간적 현전의 대표적 장소들로 호명한다. 그리고 김정임은 이곳에서 “목울대를 깊숙이 움직여 여러 겹의 음색을 공명시”켜 불렀다는 저 고대 뚜바 족의 노래 후메이를 통해 “말하지 않아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숲의 시간')과 “마른 돌가루 사이 숨은 그림처럼 웅크린 꽃잎”('장미석')을 현재화한다. 놀랍지 않은가. “없었던 시간들” 속에서 새로운 시원이 꽃피고 “몸 밖으로 사라진 부족들”('그레이트 갤러리')과 교감하며 마침내 불멸이 피어오르는 이 순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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