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가. 이번 소설은 시작하기가 어려웠다. 마로니에 꽃이 피고 지던 토지문화관에서 5월과 6월을 보내면서 내내 이 소설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쓴 시간은 얼마 안 되고, 무엇을 쓸지 결정하는 데 시간을 다 보냈다. 이것저것 마음에 두었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건드려보았으나 매번 엎어야 했다. 글이 나가주지 않았다. 숨 쉬듯 눈이 내리던 아오모리의 풍경만이 계속 눈앞을 가로막았다. 그 이야기는 안 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오모리에서 만난 다자이 오사무에 대해선 언젠가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그건 여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자가 아니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이번 소설은 남자에 대해 써야 했기에 아예 처음부터 젖혀놓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다른 글은 써지지 않고 봄이 지나 초여름에 접어들도록 내 눈앞에는 눈 내리는 풍경만이 아른거렸다. 나는 소설을 시작도 못한 채 초조해하기만 했다.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점심을 먹고 나면 텅 빈 세미나실에 들어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상아색 마로니에 꽃들이 보였다. 푸른 나뭇잎의 갈라진 손가락을 세었다. 일곱 개, 마로니에 나무는 칠엽수로도 불린다고 했다. 건물 처마에 집을 지었는지 작은 새들이 오르락내리락 부산스러웠다. 주인공을 남자로 바꿔 써볼까, 생각했다. 눈 내리는 빈 들판에 중년의 한 남자가 막막하게 서 있었다. 그 얼굴 위로 다시 여자의 얼굴이 겹쳐졌다. 남자의 탈을 씌운다고 될 얘기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번 소설집에선 빠져야겠다고 포기하려는데 문득, 남자 얘기를 먼저 쓰고 여자 얘기를 나중에 쓰면 되잖아, 하는 생각이 솟아났다. 이 글은 ‘사양관 1’이고, 나중에 ‘사양관 2’를 쓰는 거야. 그럼 정말 쓰고 싶던 얘기는 나중에 할 거니까 여기서는 부담 없이 얘기를 풀어도 되잖아.
그 생각이 겨우 소설을 시작하게 해주었다. 글은, 여전히 머뭇머뭇, 잘 나가주지 않았지만 도망만 치지 말자고 나를 달랬다. 그런데 처음을 벗어나니 오히려 이 글이 원래 쓰려던 글인 것처럼 편해졌다. 낯선 ‘현준’을 조금씩 알아가는 일이 설렜고, ‘유경’이 피아노를 치는 여자란 것도 알게 되었다. 유경의 얘기를 먼저 썼다면 현준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으리라. 아니,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유경도 피아노하곤 거리가 먼 여자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이 글을 먼저 썼어야 했다. 나는 현준이 좋아졌으니까. 피아노를 치는 유경도 마음에 드니까. 애인과 이별하고, 친구와 사별하고 홀로 떠난 눈의 나라에서 비로소 상실의 슬픔을 제대로 바라보는 한 남자한테 나는 서서히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