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부터 사실상 여름일 거라고 엄포를 놓은 일기예보가 엇나가 다행입니다. 2025년은 생각보다 봄이 길어 봄밤을 즐길 수 있는 시간도 연장되고 있습니다. 밤 산책을 하다 서늘함이 덜 느껴지면 봄밤도 이제 가는구나... 하면서 이 시집을 떠올리게 됩니다.
에세이 <우리의 여름에게>로도 사랑받은 최지은 시인의 첫 시집입니다. 습한 계절이 다가오고, 시는 슬픔으로 어룽진 유년을 꿈을 꾸듯 기억합니다. 어두운 다락방에서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갑자기 어두워져있는 하늘을 볼 때처럼 차분해집니다. 봄을 보내며 읽고 싶은 시집입니다.
노래하는 시
11쪽
어머니의 벌어진 앞니 사이로
흰 눈, 붉은 자두, 멀어지는 새.
나의 여름이 시작되는 곳
_「칠월, 어느 아침」
15쪽
아침이었다. 아버지는 물을 푸고 있었다. 나는 집을 나서려 했다. 물을 푸는 아버지를 한번 보기는 하고. 문이라는 생각도 없이 문을 찾았다. 문은 벽에 붙어 있었다. 벽은 끝에 있었다. 손잡이를 돌리자 내 손에도 물이 조금 묻어났다. 왔던 길을 거슬러 나는 돌아갔다. _「전주」
25쪽
미래는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미래는 나를 앞질러 걸어가고요. 나는 꿈에서부터 가져온 답을 보냅니다. _「사랑하면 안 되는 구름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름에 대해」
45쪽
오월이었다
다리를 절뚝이는 어린애가
허밍을 흘리며 나를 앞서 지날 때였다
_「열일곱」
48쪽
어두운 나무 계단
조금 습하고 서늘한 공기
나는 학교가 끝나면 언니가 읽던 책을 품고 다락에 올랐다
작은 창 너머
여름 매미 소리 다락 안으로 흘러들었다
_「한없이 고요한, 여름 다락」
55쪽
몸 안으로
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_「여름」
88쪽
나는 걸어가는 역할을 맡은 사람
테두리를 잃어버린 넓고 높고 깊은 무대 위에서
_「얼음의 효과」
91쪽
아버지가 시를 읽는다. 나는 아버지를 들여다본다. 딸이 쓴 시를 읽는 아버지의 표정이란 이런 것이구나. 오늘은 봄이구나. 밤이구나. _「히어리의 숲」
100쪽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오. 우리등 창밖에는 보랏빛 물고기가 맴을 돌고 있는데요. _「창문 닫기」
다음 계절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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