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살이 몇 해당가?
손꼽아 시어봉게 삼십육 년이네그려.
그런디 아직도 목포는 생소하기만 허다.
이유는 딱 하나 목포에서 태어나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이 없었기 때문이다.
목포 벗들과 약주도 허면서 잘도 지내다가도 행여 용댕이바다를 건넜다느니, 동목포역에서 공짜 기차를 탔다느니, 동명동과 용당동이 순 뻘밭이었다느니, 수문포니 불종대니 멜라콩다리가 어쩠느니, 외팔이니 물장시니 쥐약장시가 어쩠느니, 이런 추억담으로 흐를 때는 머리가 하얘진다.
그런디 교직을 은퇴하고도 여길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내 고향 당봉리가 그리운디도 여그 머무는 까닭은 목포에서 살아온 세월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귄 벗들이 수두룩허고 거리거리 골목골목이 산도 바다도 섬들도 나를 붙들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 목포에 들어와서 6월 항쟁을 겪었고 전교조 문제로 해직이 되어 거리의 교사로 살아야 했다. 1990년대 교육운동, 시민운동을 계속허다가 복직이 되어 그리운 아이들과 해우도 허고 월드컵 때 아이들과 거리응원도 허고 압해도, 가거도를 거치면서 강산을 세 번이나 바꿨으니 목포는 나에게 체화된 그 무엇인 것이다.
그런디 나에게 목포를 소재로 하는 시가 별로 없다. 이제라도 목포에서 살아온 세월을 담금하고 간을 쳐서 짭짤한 밥상을 차린다. 에말이요∼ 목포가 고맙다.
세상살이 갈수록 힘들다. 물질적으로는 넘쳐나는데 정신적으로는 빈곤하기만 하다. 무한경쟁 시대다. 일상에 베이고 찔려서 피 흘리는 사람 많다. 그늘에 가리고 묻혀서 얼굴 없는 사람들 많다.
아픔도 슬픔도 나에게서 비롯된다. 위만 바라지 말고 눈 한번 아래로 내리면 이 세상 잔잔해진다. 앞만 보지 말고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새 길이 보인다. 아픔도 껴안으면 새로운 아픔이 된다. 슬픔도 친구하면 새로운 슬픔이 된다. 슬픔아, 놀자.
1982년 고금중학교(전남 완도)로 첫 발령을 받았다. 지도를 보니 남쪽 끝 섬이었다. 이불 보따리 하나 들고 먼 길 나섰다.
광주행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에서 강진까지 직행버스를 타고, 강진에서 마량까지 비포장도로를 달려서 마량 선착장에서 고금도까지 철부도선을 타고 가교리 선착장에서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소재지에 도착하니 벌써 땅거미 지고 있었다.
교단생활 33년, 되돌아보니 첫 발령지로 가던 하루처럼 짧기만 하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지나온 학교들이 징검다리처럼 놓여있다. 함께 했던 선생님, 아이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이 시집은 전교조 교사로 살아왔던 교단의 기록이다. 입시위주의 교육을 타파하고 교육민주화를 염원했던 시대의 에너지였고 학교를 학교답게 하고자 했던 검붉은 지층이기도 하다.
사실 처음 교육운동 할 때만해도 힘써 싸우면 옥죄는 교육모순이 곧 사라질 줄 알았다. 우리 아이들이 즐겁고 행복한 학교에서 꿈꾸는 세상을 열어갈 줄 알았다. 하지만 아직도 학교 현장은 변하지 않았다. 아직도 학교는 불야성이고 아이들은 대학 가는 동아줄에만 매달려 있다.
이 시집이 이루지 못한 자의 풀씨였으면 한다. 힘써 이루려는 자의 노래였으면 한다. 꿈꾸는 선생님들에게, 깨어있는 학부모들에게, 별 같은 우리 아이들에게 그리고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아이들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나무나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