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 나는 삶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었다. 진리와 깨달음에 대해, 행복에 대해, 인생의 의미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그 질문들에 삶이 평생 동안 답을 해 주고 있다. 그때는 몰랐었다. 삶에 대한 해답은 삶의 경험들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스승을 찾아 나라들을 여행하고 책들을 읽었으나, 내게 깨달음을 선물한 것은 삶 그 자체였다. 이것은 ‘우리는 자신이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여행이 우리를 만든다.’는 명제와 일치한다.
시인은 다른 시인을 대변할 수 없고, 작가도 다른 작가를 대신할 수 없다. 모든 시는 존재하지 않는 시였으며, 모든 책은 존재하지 않는 책이었다. 작가든 독자든,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나가는 일이다. 타인의 기대나 정답이 아니라 자신의 답을. 어느 날 삶이 말을 걸어올 때, 당신은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어떤 상실을 겪고 아픔의 불을 통과했다 해도 삶에게 예라고 말할 수 있는가? 계속 거부당해도 삶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가?
여기 모은 산문들은 내가 묻고 삶이 답해 준 것들이다. 인도의 시인 갈리브는 “내 시와 함께 나를 준다.”라고 썼지만, 어떤 글도 본연의 나를 다 표현하지는 못할 것이다. 또한 내가 쓰는 글들이 본연의 나를 능가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 불확실한 시대에 내 글이 위로나 힘이 되진 않겠지만, 나는 다만 길 위에서 당신과 인생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도시에서 살거나 시골에서 돌집을 짓고 사는 것이 반드시 삶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더 올바르고 더 조용하고 더 가치 있는 삶, 그리고 자신의 삶에 물음을 던지고 곰곰이 생각하고 깊이 들여다볼 시간을 갖는 것은 이미 건강한 삶이라고 스콧 니어링은 말한다. 삶을 넉넉하게 만드는 것은 소유와 축적이 아니라 꿈과 노력이라고. 어느 순간이나, 어느 날이나, 어느 달이나, 어느 해나 잘 쓰고 잘 보내는 삶 말이다. 《조화로운 삶》을 처음 번역해 소개한 지 스물세 해가 지난 지금도 모든 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아니, 삶이다.
소설가의 꿈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낡은 타자기 한 대와 영화감독들이 쓰는 접는 의자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바람 부는 길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생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로부터 영감을 얻어 즉석에서 한 편의 짧은 소설을 써내려 갔다. 그가 소설을 완성하는 데는 1분 정도가 걸렸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60초 소설’로 불리게 되었다.
우화처럼 들리는 이 이야기는 댄 헐리라는 유명한 미국 소설가의 실화이다. 그는 전 세계에서 단 한 사람밖에 없는 60초 소설가이고 그가 16년 동안 길거리에서 완성한 소설은 22,613편에 이른다.
60초라는 매우 한정된 시간에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려면, 당연히 주인공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기진 것만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댄 헐리의 『60초 소설가』가 갖는 특별한 매력이다. 그는 어떻게 행복을 발견할 것인가, 삶에서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것들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진정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이며, 어떤 것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가를 정확히 지적한다. 뛰어난 재치와 기발한 상상력, 때로는 우화적인 기법 등을 동원해 삶의 본질, 보편적인 메시지를 훌륭하게 전달한다.
숲을 지나온 한 시인이 있었으니, 그곳에서 그는 청춘의 방황을 했고 삶을 알았다. 여기 그가 숲을 지나오면서 때로 열정에 들떠 읊조리던 시 몇 편이 있으나, 그 듣는 대상은 늘 나무요, 까마귀요, 거미였다. 이제 그것들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그러나 사실 이제 와서 그 숲을 되돌아보면 그곳에 한때 타오르던 옛날의 불꽃은 가고 없다.
숲을 지나온 한 시인이 있었으니, 그곳에서 그는 청춘의 방황을 했고 삶을 알았다. 여기 그가 숲을 지나오면서 때로 열정에 들떠 읊조리던 시 몇 편이 있으나, 그 듣는 대상은 늘 나무요, 까마귀요, 거미였다. 이제 그것들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그러나 사실 이제 와서 그 숲을 되돌아보면 그곳에 한때 타오르던 옛날의 불꽃은 가고 없다.
세 권의 시집에서 고른 시들을 한 권으로 묶으며 내 시에서 깜박이는 신호는 ‘절망과 희망’, 혹은 파블로 네루다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도 말했듯이 ‘질문에 답하는 질문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중첩된 우연들이 모여 운명이 되듯이, 중첩된 단어들이 모여 내 시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삶은 경이롭고, 외롭고, 절망적일 만큼 희망적이다. 그러는 사이 꽃은 적멸로 지고, 비는 우리를 잠재운다.
그 역설 앞에서 인간은 저마다 시인이다. 언제부터 시인이 되고자 결심했는지 묻는 기자의 물음에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다. 다만 그것을 언제 그만두었는지는 각자에게 물어봐야 한다.”라고 대답한 어느 시인의 말은 진실이다. 언어를 흔들어 전율케 하는 것은 이 불가사의한 세계가 주는 선물이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라고 썼지만 이렇게 돌아보게 되었다. 모든 시인의 마지막 시 제목은 ‘이제 안녕’이어야 할 것이다. 시는 마지막 단어를 읽고 난 후에야 비로소 의미가 떠오른다. 여행이 끝난 후에야 지나온 길들의 의미를 깨닫듯. 고통은 지나가고 한 편의 시가 남는다. 그때까지 단어들을 찾는 것이 시인으로 산다는 것이다.
나의 시가 절망에 대한 위안이나 질문에 대한 해답이 되진 않겠지만, 시인으로 입문한 지 35년 만에 시선집을 낸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를 읽어 낸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때로는 고상한 단어들로 시적 기교를 부리려고 애쓴 나의 시가 기댈 곳은 ‘시를 읽어 내는’ 독자의 눈과 마음뿐이다.
-2015년 가을 - 시전집을 내며
타고르의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마음의 평화를 얻고 영혼이 투명해진다. 그의 시는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듯 읽다가 잠시 덮어 놓고 눈을 감게 하는 감동이 있다. 그리고 갈증 속에서 샘물을 마시듯 가슴 밑까지 전율이 전해진다. 내면을 응시하게 하는 것이 시 본연의 역할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내가 태어날 때 탄생을 주관하는 천사가 상자 하나를 주며 내 귀에 속삭였다. 세상에 내려가 마음이 힘들 때면 이 상자를 열어 보라고. 그 투명한 상자에는 시가 들어 있어서, 삶에 불안을 느껴 상자를 열 때마다 인간 영혼의 원천에서 흘러나온 시들이 내 앞에 한 편씩 펼쳐졌다.
어떤 시는 비바람을 이겨 낸 꽃이고, 어떤 시는 히말라야 산길에서 언 발을 녹여 준 털실 양말이었으며, 어떤 시는 절망의 절벽에서 떨어져 내리는 나를 받쳐 준 손이었고, 또 어떤 시는 번갯불의 섬광을 닮은 새였다.
‘여기, 내 인생의 방에서는 물건들이 계속 바뀐다.’라고 미국 시인 앤 섹스턴은 썼지만, 내 인생의 방에서는 운율, 단어, 길이가 다른 시들이 계속 이어졌다. 지혜와 통찰력에서 나온 그 시들을 읽으면서 나는 고개의 각도를 돌려 나 자신을 보고, 삶의 진실과 마주하고, 의문의 답을 찾는 문을 열었으며, 온전한 삶을 방해하는 ‘진짜 얼굴이 될 뻔한’ 가면들을 벗을 수 있었다.
당신의 탄생을 주관한 천사가 당신에게 준 상자에 무엇이 들어 있든, 그 천사가 당신에게 부여한 눈썹과 이마의 넓이, 턱의 생김새에 어떤 차이가 있든, 우리에게는 한 가지 공통의 운명이 있다. 바로 삶의 모든 순간들을 경험하되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는 일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영혼을 소유한 채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빛과 어둠, 여러 번의 이사, 무서운 병 진단, 실직 등을 헤쳐 나가는 여행자(traveling soul)가 아닌가. 별에서 별로,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그렇다면 영혼 안에 무엇을 지니고 여행하는가? 사랑인가, 그리움인가, 아니면 순간들의 깨달음인가?
마음챙김 명상의 선구자인 존 카밧 진은 말한다.
“바로 오늘의 당신의 삶을 여행으로, 모험으로 보라.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금 여행의 어느 단계에 와 있는가? 만일 당신의 삶이 책이라면 현재 머물고 있는 장의 제목을 무엇이라 붙일 것인가? 이 여행이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 자신만의 여행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따라서 길도 당신 자신의 길이어야 한다. 당신은 다른 누군가의 여행을 흉내 내면서 당신 자신에게 진실할 수는 없다.”
시를 읽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일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마음챙김의 소중한 도구이다. 카밧 진이 설명하듯이 ‘마음챙김’은 그냥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 미약한 숨소리일 뿐인 자신의 호흡에 집중하는 것, 주위에 있는 것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그리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무엇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온전히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 두려움, 고통, 질병, 죽음, 전쟁, 자연재해 등이 우리의 삶을 흔들 때 마음의 중심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도피가 아니다. 그것이 영성이다.
인생에 대한 무명씨들의 잠언 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에 이어 새롭게 엮어진 이 시집은 새와 나무, 대지와 꽃, 벌레와 바람에 바쳐진 자연에 대한 잠언 시집이다. 만일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그 하루를 정원에서 보내리라. 허리를 굽혀 흙을 파고, 그곳에 작은 풀꽃들을 심으리라.
하이쿠는 5 ·7·5의 열일곱 자로 된 한 줄의 정형시입니다. 16세기에 유행하던 귀족들의 고상한 언어유희인 렌가(連歌)를 서민과 민중의 언어로 패러디한 것이 하이카이 렌가, 즉 해학적인 렌가입니다. 렌가는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첫 번째 사람이 한 줄의 시를 읊으면 두 번째 사람이 그것을 받아 또 다른 시를 이어가는 일종의 시 짓기 놀이입니다. 이때 첫 번째로 읊는 시는 다음에 이어질 시들의 주제와 분위기를 결정짓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특히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17세기에는 이 첫 번째 시가 독립되어 한 줄의 시로 발전하게 되었고, 언어유희를 뛰어넘은 높은 문학성이 담긴 이 시들은 훗날 ‘하이쿠(俳句)’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숨 한 번의 길이만큼의 시 ’라고 불릴 정도로 짧기 때문에 압축과 생략이 특징이며, ‘모습을 보이고 마음은 뒤로 감추라’가 하이쿠의 기본 원칙입니다. 단순히 촌철살인의 재치나 말장난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은유와 감성을 통해 인간의 고독과 허무, 자연과 계절에 대한 느낌, 삶에서 얻은 순간적인 깨달음을 단어들 사이에 숨겨 놓는 시가 하이쿠입니다. 따라서 '하이쿠 읽기'는 그 숨겨진 것을 '읽어 내는 일'입니다. 하이쿠의 매력은 바로 독자의 '읽어 내기'에 있습니다. 숨은 의미를 읽어 내지 못하면 하이쿠는 전혀 시 같지 않은 싱거운 한 줄의 문장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의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상징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띄기를 고대하는 그것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사물들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 합니다. 공감의 시선으로 자연 속 상징들을 읽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하이쿠입니다.
제가 하이쿠를 처음 접한 것은 30년 전쯤의 일입니다. 영어로 된 책들을 통해 명상을 공부하던 중, 책들에서 가끔 인용되는 하이쿠(영어로 번역된)를 읽고 시인으로서 관심과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원문으로 하이쿠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독학으로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일본에 갈 때마다 하이쿠 시집과 관련 서적들을 구해 읽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저는 여전히 하이쿠의 세계에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저 자신도 종종 한 줄의 시를 쓰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것들을 발표할 계획입니다.
시인이 다른 나라 시인들의 시를 번역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며, 시인으로서의 의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학자나 전공자들에 비해 배경 지식과 자료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겠지만 시를 이해하는 감성의 깊이는 오히려 뛰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의 번역은 정확한 직역만이 아니라 시인이 그 시를 쓸 때의 감성과 의도를 공감하는 능력, 나아가 그것을 자기 나라의 단어들과 운율로 표현하는 언어 감각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는 일본어에 능숙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바쇼의 하이쿠를 스페인어로 번역하는 일에 참가했습니다. ‘당신의 부재가 나를 관통하였다 / 마치 바늘을 관통한 실처럼 /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그 실 색깔로 꿰매어진다’(<이별>)를 쓴 미국의 계관 시인 W . S. 머윈은 일본인과 함께 바쇼와 부손의 하이쿠 영역 시집을 출간했으며, 작년에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여성 시인 제인 허쉬필드도 하이쿠를 번역했습니다.
정치는 싸우고 문학과 예술은 교류하는 것입니다. 문학과 예술은 국경 을 뛰어넘어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진 삶과 존재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일본을 알려면 일본인의 키워드인 하이쿠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외국의 대통령이나 수상, 유명한 CEO들이 일본을 방문하면 연설에 하이쿠를 인용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일본의 시인들이 자신들의 감성과 깨달음을 한 줄의 시 형태로 표현해온 하이쿠를 읽는 것은 일본인의 감성에 접근하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저는 단지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 하이쿠를 읽거나 번역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징들, 인간 존재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계절적인 느낌들, 아름다움은 영원이 아니라 변화와 소멸에 있다는 자각,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새로운 형식의 시를 소개하기 위해 이 작업을 해 온 것입니다. 책이 두껍지만 즐겁게 읽어 주시고, 앞으로 계속해 나갈 저의 이러한 작업들에 대해 변함없는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출가한 지 50년이 흘렀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진정한 자유는 정신적인 데 있다고. 깨어 있는 영혼에는 세월이 스며들지 못한다. 삶을 마치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늙음이 아니라 녹스는 삶이다.
"살 때는 삶에 철저해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해 그 전부가 죽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귓속의 귀에 대고 묻는다.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여기 이 잠언집은 여느 책처럼 그 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고 덮어버리기에 어울리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끝까지 읽지 않아도 옆에 오래 놓아두어야 할 책이다. 내 방은 많은 책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법정 스님의 책만큼은 그 숫자에 포함하고 싶지 않다. 그의 책들은 한 권의 책으로서가 아니라 늘 하나의 도반으로 곁에 있다. '법정'이라는 이름이 그 자체로 산이고, 오두막이고, 청정함이며, 어디에도 걸림 없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 류시화 (엮은이)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 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꽃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서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젊었을 때 나는 삶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었다. 진리와 깨달음에 대해, 행복에 대해, 인생의 의미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그 질문들에 삶이 평생 동안 답을 해 주고 있다. 그때는 몰랐었다. 삶에 대한 해답은 삶의 경험들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스승을 찾아 나라들을 여행하고 책들을 읽었으나, 내게 깨달음을 선물한 것은 삶 그 자체였다. 이것은 '우리는 자신이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여행이 우리를 만든다.'는 명제와 일치한다.
시인은 다른 시인을 대변할 수 없고, 작가도 다른 작가를 대신할 수 없다. 모든 시는 존재하지 않는 시였으며, 모든 책은 존재하지 않는 책이었다. 작가든 독자든,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나가는 일이다. 타인의 기대나 정답이 아니라 자신의 답을. 어느 날 삶이 말을 걸어올 때, 당신은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어떤 상실을 겪고 아픔의 불을 통과했다 해도 삶에게 예라고 말할 수 있는가? 계속 거부당해도 삶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가?
여기 모은 산문들은 내가 묻고 삶이 답해 준 것들이다. 인도의 시인 갈리브는 "내 시와 함께 나를 준다."라고 썼지만, 어떤 글도 본연의 나를 다 표현하지는 못할 것이다. 또한 내가 쓰는 글들이 본연의 나를 능가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 불확실한 시대에 내 글이 위로나 힘이 되진 않겠지만, 나는 다만 길 위에서 당신과 인생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세상에서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은 단 한 권이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라는 책이다.
진정한 만족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마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욕망의 자유가 아니라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세상에는 행복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그 원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다.
원한다는 것은 고통이다. 갈망하는 코끼리를 소유하려고 하는 시도, 조종하는 것, 생각하는 것, 계획하는 것 모두가 고통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원하는 것에는 끝이 없지만, 원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는 끝이 있다. 만일 전혀 원하는 것도 없고 계획도 필요없다면, 얼마나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내려놓는다면 모든 문제는 사라진다. 그때 당신은 이미 코끼리등 위에 올라앉아 있다. 이것은 깨달음의 아름다운 순간이다.
이상하다.
과거에 쓴 시를 자꾸만 고치게 된다.
전부 다시 쓰고 싶을 때도 있다.
동경과 환상, 순수한 사랑을 노래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때 내가 사랑했던 어떤 것들은
영원히 나의 것이 된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시를 여러 편 덜어 냈지만
버려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나는 아직 인생을 다시 쓰고 있는 중이다.
도시에서 살거나 시골에서 돌집을 짓고 사는 것이 반드시 삶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더 올바르고 더 조용하고 더 가치 있는 삶, 그리고 자신의 삶에 물음을 던지고 곰곰이 생각하고 깊이 들여다볼 시간을 갖는 것은 이미 건강한 삶이라고 스콧 니어링은 말한다. 삶을 넉넉하게 만드는 것은 소유와 축적이 아니라 꿈과 노력이라고. 어느 순간이나, 어느 날이나, 어느 달이나, 어느 해나 잘 쓰고 잘 보내는 삶 말이다. 《조화로운 삶》을 처음 번역해 소개한 지 스물세 해가 지난 지금도 모든 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아니, 삶이다. - 고침판 옮긴이의 말
나는 여행이 좋았다. 삶이 좋았다. 여행 도중 만나는 기차와 별과 모래 사막이 좋았다. 생은 어디에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켜놓은 불빛이 보기 좋았다. 내 정신은 여행길 위에서 망고 열매처럼 익어 갔다. 그것이 내 생의 황금빛 시절이었다.
여행은 내게 진정한 행복의 척도를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철학이나 종교적인 신념 같은 것이 아니었다. 신발을 신고 나서면 나는 언제나 그 순간에, 그리고 그 장소에 존재할 수가 있었다. 과거와 미래,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여기에 살아 숩쉬는 것을 가슴 아프도록 받아들여야만 했다. 매 순간에 춤추라. 그것이 여행이 내게 가르쳐 준 생의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