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무엇보다 '침묵.' 그러니까 "인간은 말을 통해 침묵을 듣는다. 진정한 말은 침묵의 반향이다"라고 했을 때의 그 '침묵'을 듣고 싶었다. (...) 인간은 '침묵'과 접촉함으로써, 아니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자기 삶의 저 너머로 뻗어간다. (...) 나는 이 '침묵'이 관념이 아니라 생생한 실재로 내 안에 머물고 있음을 기쁘고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살아생전의 미당 서정주 시인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뵈온 때를 가만히 떠올려 보니 어언 27년 전인 1997년 한여름이었다. 당시 갓 창간된 <한국문학평론>의 주간이었던 평론가 임헌영 선생과 함께 사당 남현동 자택을 떨리는 마음으로 찾아들었다. 나는 그때 이 계간지에 1933년~1955년 사이 작성되었으나 시대 탓이든 개인의 판단 탓이든 미당의 어떤 문집에서도 실리지 못한 시 37편과 산문 6편에 대한 소개와 해석의 글을 실었던 차였다. 고작 스물예닐곱의 나이에, 여든셋의 성상星霜을 헤아리던 문제적이며 예외적인 시혼詩魂을 처음 대면하는 기쁨과 경외감은 정말 대단했다. 영향에 대한 불안과 초극의 욕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는 선배 문인 정지용과 임화에 대한 미당의 회상은 1930년대 중반 언저리로 나를 몰아갔다. 남북분단 이후 다시는 눈에 넣을 수도, 입에 붙일 수도 없게 된 시우詩友 이용악과 오장환에 대한 그리움은 선생의 눈시울 말고도 나의 그것을 붉히기에 충분했다. 미당의 생생한 목소리와 감정을 고스란히 전해 듣던 옛 순간을 떠올리자니 지금 당장 몸과 마음이 떨려오기 시작한다.
그런 뒤 작은 학술 논문들과 박사 학위 논문을 작성하며 내 나름의 ‘미당론’을 건축해 가다가 2000년 12월 24일 교환 학생 차 건너가 있었던 일본 도쿄의 어느 낯선 연구실에서 굴곡 많은 미당 선생의 타계 소식을 들었다. 결국 2003년 2월 제출된 박사 학위 논문 「서정주와 영원성의 시학」, 그리고 이것에 몇 편의 학술 논문과 비평문을 합해 출간한 <서정주 시의 근대와 반근대>(소명출판, 2003)는 미당 선생의 손에 잠시라도 얹힐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채 나의 서가에 얌전히 꽂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자료와 주제는 확보되고 결정된 상태였으나 당시 미처 쓰이지 못했거나 미진한 채로 남아 있던 요목要目들은 어떤 식으로든 미당 선생을 향한 나의 관심과 대화의 욕망을 끊임없이 충동질했다.
2004년 이후 그렇게 작성된 비평문과 학술 논문이 15편여에 달하게 되었다. 그것들을 쭉 펼쳐놓자니 1930년대~1993년 사이에 쓰인 미당의 시 생애 전반에 걸친 시(집)와 산문(집)에 대한 소견과 해석이 얼추 매듭지어진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 글들의 시대성과 입체성을 살려 미당 서정주의 시사詩史를 구성해 보자는 욕망이 싹트고 자라났다.
(…)
숱한 고심 끝에서야 이 책의 제목을 “서정주라는 문학적 사건”으로 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13편의 글에 대한 안내가 얼마간 길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각각의 글에서 다룬 시와 산문, 주제와 담론들은 고비마다의 한국 현대 시에 대해 만만찮은 파장과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한 텍스트들이었다. 나의 경우로 한정하여 말한다면, 나는 미당 시를 공부하며 한국 근현대 시의 근대성과 반대근성의 세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분석하는 고통스러운 행운(?)을 누려왔다. 아무려나 책의 제목 “서정주라는 문학적 사건”은 미당의 한국 시에 대한 숱한 긍정적 기여와 몇몇 부정적 국면을 함께 기리고 기억하기 위해, 또 미당 연구자이자 비평가인 나에 대한 선한 영향과 준엄한 계고를 잊지 않기 위해 붙여진 것이다.” (‘책머리에’에서)
한국시는 어쩌면 '위기'를 먹고 자라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1997년 등단했을 때도 지금도 시는 위기에 처해 있다는 풍문은 여전하다. 그러나 한국시는 쉽게 휘갈겨 쓴 진단서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여전히 건재하다. 물론 그냥 존재하고 있다고 해서 위기가 아닌 것은 결코 아니다. 어제와 오늘의 시를 넘어 내일로 도약하는 미학적 갱신이 없다면, 분명 한국시는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