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지나간 일들을 알아보는 것,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로 미래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지침이 되기도 한다.
역사를 처음 접할 때는 구시대적 유산의 기록으로만 여기고 관심 없이 대충 대하게 된다. 그러나 자주 역사를 접하게 되면서 흥미를 갖게 되고 차차 그 의미를 다소나마 알게 되면서 빠져들게 되는 것 같다.
저자도 2007년 3월 의대 교수직을 정년퇴임을 한 후 시간적 여유가 생겨 우연히 <조선왕조실록>을 접하게 되었다. 그 후 <승정원일기>, <연려실기술> 등 한국 고전에 대한 책을 읽게 되었다. 점점 조선 역사에 대한 흥미가 생기면서 욕심도 생겨 내친김에 조선시대 의학에 관련된 역사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조선왕의 죽음에 대한 책을 발간하게 되었다. 이후 조선 왕실사에도 관심을 가지고 책을 발간하다 보니 올해에 여섯 번째 책인 <조선 왕녀들의 생사고락>을 내놓게 되었다.
조선 27명 임금 중 자손을 두지 못한 4명의 임금 단종, 인종, 경종, 순종과 딸을 낳지 못한 명종을 제외한 22명의 임금 소생 왕녀는 총 142명(공주 43명; 옹주 99명)이나 된다. 이들 142명의 왕녀 중 37명
은 영유아기에 조졸하였고, 왕녀의 평균수명은 40.2세였다. 그리고 다수의 왕녀들은 한창나이 40세 이전에 세상을 떠났다.
왕녀는 임금의 딸이라는 지체가 높고 귀한 신분을 갖고 태어나 가문이 좋은 집안 도령을 남편으로 맞아들여 혼인했지만, 그녀들의 결혼생활은 행복하고 다복한 것만은 아니었고, 오히려 다수의 왕녀들은 불행한 삶을 살았다.
좋은 조건을 갖춘 왕녀들이 불행한 삶을 산 요인을 살펴보면, 그 당시 왕녀의 혼인 적령기가 11세에서 14세로 너무 어린 나이에 빨리 결혼한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조선시대는 남성 위주의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가장 큰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왕녀 중 죽은 남편을 잘 섬기는 열녀, 남편 죽음을 애통히 여겨 아사한 왕녀, 남편의 비행을 감싸주는 왕녀가 있는가 하면, 반면 남편을 투기하여 독살 자작극을 벌인 왕녀, 어머니와 노비 문제로 송사를 벌인 왕녀, 이복 오빠와 근친상간한 왕녀, 사위와 불륜을 저지른 왕녀, 왕녀 모녀가 공모해 벌인 저주 사건과 역모로 인해 고난을 받은 왕녀 등 별의별 왕녀도 있었다. 또한 이와는 달리 한글 창제에 일조한 왕녀, 고양이를 사랑한 애묘가(愛猫家) 왕녀, 서예나 시에 대한 실력이 남 달리 뛰어난 왕녀 등 재주 있고 특색있는 왕녀들도 있었다.
일반 백성들과는 달리 왕녀로 태어났기 때문에 난, 반정, 음모 등에 연루되어 유배를 가는 등 수모를 겪은 왕녀들도 다수 있었는데, 여자라는 신분때문에 살해나 사사를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는 난, 반정, 역모 등에 연루되면 대부분의 왕자들은 살해되거나 사사되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이다.
왕의 부마가 되면 축첩을 할 수 없고, 왕녀가 죽어도 재혼을 할 수 없는 엄격한 왕실의 법도가 있었지만, 다수의 부마는 첩을 거느리고, 심지어는 왕녀를 학대 내지 박해하는 경우도 있었고, 왕녀 사후 재혼한 부마들도 있었다
왕의 사위인 부마는 왕녀와 혼인하면 학식과 재능이 있어도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따라서 공직을 가질 수 없고 시간적 여유는 많아져 같은 처지의 부류 남자들과 어울려 다니며 틈만 나면 술과 가무에 빠지게 된다. 또한 여자들과 어울리는 기회도 많아져 자연히 축첩하게 되고 비행에 빠져 문란한 생활이 일상이 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부마라는 지위는 속 빈 강정처럼 허울뿐인 자리였지만, 지체 있는 집안일수록 부마 자리를 탐했는데, 이는 아들 한 명이 왕의 부마에 뽑히면 가문의 영광으로 위상도 높아졌고, 또 집안의 다른 자손들의 출세와 영달의 지름길이 되었기 때문에 자식을 둔 양반 집안은 아들이 부마 간택 명단에 오르면 부마에 뽑히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오늘날도 이와는 똑같지는 않지만, 유사한 일들을 왕왕히 볼 수 있는데, 권력 앞에서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높은 자리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차지하려는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끝으로 원고를 교정하고 틀과 본을 잡아 한 권의 책이 완성되게 만들어 주신 메디안북 김용덕 사장님과 출판사 직원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올해는 저자가 의사의 길로 입문한 지 60년이 되는 해이자, 결혼한 지 50년 되는 금혼식을 맞이하는 해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여러 지인들의 도움으로 오늘의 나 자신이 존재할 수 있어서, 이 지면을 통해 많은 지인 여러분들께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 결혼생활 50년 동안 한결같이 본인 곁을 지켜주면서 내 삶에 있어서 나침반이 되어준 영원한 동반자 노경희 여사, 항상 미덥고 고마운 마음뿐이다.
마지막으로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나를 의사의 길로 이끌어 주신 부모님께 감사를 드린다. 늦게나마 철이 들어 평소 부모님이 하신 말씀이 내 삶의 지침이 되었음을 인지하고서 두 분의 은혜를 다소나마 갚으려고 할 때는 이미 늦었고 부모님은 이 세상 분이 아니었다. 생존 시 자주 부모님을 더 잘 챙겨드리지 못한 것이 회한(悔恨)이 되어 자책하지만 이미 늦은 후회란 것을 알게 되었다. 부모님 생존 시 잘 섬기라는 말을 되새기며 <시경>의 한 소절을 읊조리면서 부모님의 은공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려고 한다.
『부혜생아(父兮生我) 아버지 날 낳으시고
모혜국아(母兮鞠我) 어머니 날 기르시니
애애부모(哀哀父母) 슬프도다 부모님이여
생아구로(生我劬勞) 나를 낳아 기르시느라 애쓰고 수고하셨네
욕보심은(欲報深恩) 그 깊은 은혜를 갚고자 하여도
호천망극(昊天罔極) 넓고 큰 하늘처럼 끝이 없구나 』
2023년 5월 - 머리말
어느덧 의사 생활 반백 년!
촌스럽고 애된 모습으로 연세대 백양로를 거닐던 학창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은 흘러 의대교수를 정년퇴임하고도 10여 년이 지나 칠순의 막바지에 다다르니 감회가 새롭다.
의사 초년시절 힘들고 고된 생활도 많았지만, 오직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돌봐준다는 보람과 자부심을 가지고 이겨냈다. 그러나 노년이 된 이 시점에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가 환자에게 베푼 것에 비해 환자들을 통해 얻은 삶의 지혜가 더 많았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들로부터 얻은 삶의 지혜가 나의 노년 생활에 원동력이 되고 있다.
법정 스님 어록 중에 “세월은 우리 얼굴에 주름살을 남기지만 일에 대한 흥미를 잃을 때는 영혼이 주름지게 된다. 탐구하는 노력을 쉬게 하면 인생이 녹슨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나이 들어서도 육체와 머리가 녹슬지 않게 끊임없이 활용하라는 것이다. 이 길만이 또한 노화를 늦추는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떠나야 한다는 말인데,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방법들은 다양하지만, 기록을 남기는 것도 한 방법이다.
경제가 발달할수록 장년이 되기 전에 할 일을 잃고 놀면서 지내는 사람도 많은데, 저자는 노년에도 할 일이 있고 또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이처럼 노년에도 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것은 신분이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과 소통할 수 있고, 그들의 애환을 스스럼없이 들어주고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의사라는 직업 때문이다. 또한 개원하지 않고 교수 생활을 한 점도 큰 몫을 하고 있다.
교수 시절 환자 진료, 학생과 전공의 교육, 학술연구에 열중하면서 나름대로 나만의 삶에 대한 노하우를 쌓게 되었다. 특히 의대 교수 생활을 하면서 논문을 많이 쓰다 보니 책이나 논문, 신문 기사, 기타 기록에서 관심 있는 부분을 접할 때마다 메모하거나 요약 발췌하는 버릇이 생겨나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밴 것이다. 미리 메모나 요약 발췌를 해 두면 논문이나 책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한편 교수 생활 중에도 틈이 나는 대로 은퇴 후 나의 앞날에 대한 계획과 꿈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 왔다. 정년 후 환자로부터 얻은 삶의 지혜를 활용해 의사의 일 이외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노년의 내 삶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도 세웠다. 그러나 막상 정년을 맞이하게 되니 얼마 동안은 갈등의 시간도 있었으나, 곧 마음을 가다듬고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그러던 중 우연히 조선시대 역사를 접하게 되었고 점점 흥미가 생기자 자료 수집에 나섰다. 처음에는 자료를 찾아 헤매 어려움도 많았으나 곧 핵심을 찾아 역사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자 욕심도 생겨 역사와 의학을 접목하는 책을 만드는 작업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그 결과 의사의 시각으로 본 조선시대의 왕, 왕비, 왕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세 편의 책을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의사 생활 50년을 맞이한 해에는 조선시대 왕의 소실(첩)에 대한 자료를 정리해 한 권의 책을 내게 되었다.
그러면 조선왕 소실(첩)들의 삶은 어떠하였을까?
소실(첩)에 대한 자료는 왕이나 왕비에 비교하면 문헌 수도 적고 내용도 빈약했으며, 심지어는 정사나 야사 등 어떤 역사 자료에도 실려있지 않은 경우도 있어 생각보다 어려움이 많았다.
사료나 저서 등 문헌에서 저자가 찾을 수 있었던 조선왕 소실의 수는 169명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알려지지 않은 더 많은 여인이 왕의 소실살이를 하였을 것이다.
후궁은 내명부 품계 상 종 4품 숙원 이상의 품계를 받은 법적인 왕의 소실로, 간택후궁과 승은후궁이 있다. 간택후궁은 사대부 출신의 여성으로 간택 절차를 거쳐 정식으로 책봉된 경우를 말하며, 승은후궁은 궁녀나 기녀 등 중에서 사사로이 왕의 승은을 입고 후궁으로 책봉된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왕의 승은을 입었다고 해서 모두 승은후궁이 되는 것이 아니고 공식적으로 후궁 첩지를 받아야만 했다. 후궁의 첩지를 받지 못하는 궁녀나 기생 등은 그들의 원래의 신분을 지니고 없는 듯이 소실로 지내야만 했다.
간택후궁과 승은후궁은 비록 같은 후궁이라도 출신과 선발 과정에서 큰 차이를 보였고, 그 차이는 궁중에서의 예우와 역할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개개인의 노력에 따라 달랐다. 즉 첫째 왕의 총애를 받아 가능한 혼자서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 둘째 왕비 궐위 시 왕비가 되는 것, 그리고 셋째 후궁 자신이 왕자를 생산해 그 아들이 왕이 되게끔 하는 노력이다.
그러나 상기 기술한 요건이 충족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했던 것만 아니었다.
왕의 소실 되어 오히려 기구한 운명을 맞이한 여인들이 더 많았다. 예를 들면 정종 첫 번째 후궁 가의궁주 유씨, 태종 후궁 효빈 김씨, 세종 후궁 혜빈 양씨, 성종 후궁 정귀인과 엄귀인, 연산군 후궁 장녹수, 중종 후궁 경빈 박씨, 광해군 소실 상궁 김씨, 인조 후궁 귀인 조씨, 고종 후궁 정화당 김씨 등 많은 소실들이 고난의 역경을 맞이했다.
조선왕 27명 중 18대 현종, 20대 경종과 27대 순종 3명의 왕은 소실이 없었고, 23대 순조는 한 명의 후궁만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임금은 2명
(단종)에서 16명(태종)의 소실을 두어, 한 임금이 6명꼴로 소실을 거닐었으나 실은 더 많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들 소실의 평균 수명은 57.1세, 왕보다 10년, 왕비보다 7년 이상을 더 오래 살았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조선왕의 소실 중에는 80세 이상 장수한 여인도 10명이나 돼, 왕이나 왕비와 비교하면 장수한 여인들이 더 많았다. 이들 장수한 소실들의 공통점은 대체로 자식이 없거나 자녀가 있었어도 어릴 때 조졸하여 자식 걱정 없이 일생을 보낸 여인들이다.
이와는 반대로 젊은 나이에 비극적으로 삶을 마친 여인들도 많았는데, 살해된 경우가 10명, 사사 6명, 독살 1명, 자살 1명, 벼락 맞고 죽은 경우 1명으로, 총 19명의 소실들은 비참한 죽임을 당했다.
결론적으로 조선왕 소실살이는 왕의 사랑을 듬뿍 받고 영화를 누리며 살았던 여인들은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 왕의 여인들은 비참하고 쓸쓸한 궁중 생활을 하면서 삶을 마쳐 “빛 좋은 개살구”, “화무는 십일홍(花無 十日紅)”이라는 말처럼 겉만 화려하고 곧 시들어지는 꽃과 같았다.
끝으로 나의 원고를 교정하고 기본 틀을 잡아 매번 책으로 만들어 주신 메디안북 김용덕 사장님과 출판사 임직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조강지처(糟糠之妻)란 후한 광무제 시절 송홍(宋弘)이 “고생할 때 술재강
(술을 거르고 남은 찌꺼기)과 겨로 끼니를 함께 때우던 아내는 결코 내치지 말아야 한다(糟糠之妻 不可堂).”는 말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첩 정은 삼 년, 본처 정은 백 년”?이라는 속담도 있는데 본처는 변함없이 한결같고 끈기있으며 속도 깊고 지혜롭다는 것이다.
46년간이나 묵묵히 저자 곁을 지켜 준 조강지처인 노경희 여사가 있어 항상 마음 든든하고 행복감을 느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고마움을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했지만, 지금처럼 건강하게 항상 내 곁을 지켜주기 바라는 마음뿐인데, 이런 바람은 나의 지나친 욕심은 아닐는지? 그 고마움을
“당신은 단 하나의 나의 사람이며 사랑입니다.”라는 말로 나의 마음을 표현할려고 한다.
「세상에 많은 여인 있지만
내 부족함 채우고 아픈 곳 보듬어
바로 서게 한 여인은
포도향 머금은 한 사람뿐이지
물러서서 그윽히 바라보면
병마와 가난의 긴 세월 궂은 시름
쓸어내리는 비질같은 여인은
옹달샘 물 같은 한 사람뿐이지
세상에 많은 여인 있지만
거친 세상 바다에서 스스로를 이기고
오색 둥지 일궈온 여인은
가을 햇살 같은 한 사람뿐이지.」
조봉제의 시 <오직 한 사람 중에서>
2018년 늦 가을 청목 - 머리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