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십 대 후반은 겁 없이 전공을 포기하고 글쓰기라는 낯선 분야에 도전하기로 결심하면서 동시에 임신, 출산, 육아라는 인생 최대급 과업들도 해결하느라 스스로 자각할 수 없을 만큼 정신없고 뒤죽박죽이었던 시기였는데, 그 무렵의 아주 또렷한 기억 하나는 소설을 쓰고 있던 순간의 행복이었다. 퇴근 후 또는 아이가 잠든 틈을 타서 PC 앞에 앉는 그 짧은 순간, 텅 빈 모니터와 맥주 한 캔이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아까 그 대사는 정말 짜릿했어”라든가 “이러다 정말 소설이 되겠어” 또는 “와, 나 정말로 소설가가 된 것 같아” 싶은 기분들. 글을 쓰면서 그렇게 대책 없이 행복한 나 자신이라니, 이젠 거의 흉내 낼 수도 없을 만큼 아득한 기억이다. 등단 후 20년이 흘렀고 많은 일을 겪으며 어느덧 중견 소설가가 된 나는 그때처럼 해맑게 웃으며 노트북 앞에 앉지 못하지만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나에게 행복한 어린 시절 같은 존재다.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언제까지나 내 안에 남아 힘이 되어주고, ‘이것이 바로 나’라는 의식의 근원이 되어준다.
지금도 힘들고 용기를 잃을 때면 동구를 생각한다. 강건하고 정직한 트럭운전사가 되어 세상을 좀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들고 있을 그 중년 남자를 생각하면 어쩐지 나에게도 그를 닮은 모습이 조금쯤은 있을 것 같고, 대책 없이 행복하게 작가라는 길을 걷고자 하던 오래전의 내가 생각나며, 이 세상의 평범해 보이는 모든 사람에게 빛나는 작은 새의 황금빛 깃털 하나쯤은 숨어 있다는 오랜 존경심으로 이 세상을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받은 오랜 사랑과 격려가 오늘까지 형편없이 휘청거리는 나를 굳세게 받쳐주었다. 초조했던 젊은 나를 소설가의 길로 초청해준 한겨레출판사와 오늘까지 이 소설을 사랑해준 많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쿨한 사람, 쿨한 관계, 쿨한 소설, 쿨한 영화들이 이 세상을 휩쓸어 버린 것이 어느 시점부터였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경쾌하고 은근한 노랫자락에 얹어서 똑같이 쿨하다고 착각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쿨하지 못한 우리네 인생. 아무래도 사는 건 구차하고 남루하다.
뜨겁게. 여한 없이 뜨겁게. 어차피 한 번 왔다 가는 세상 뜨겁게. 가슴의 뜨거움조차 잊어버린 쿨한 세상의 냉기에 질려 버렸다. 맹렬히 불타오르고 재조차 남지 않도록 사그라짐을 영광으로 여기는 옛날식의 정열을 다시 만나도 싶다. 그것이 요즘 유행하고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라 해도.
뜨겁게. 여한 없이 뜨겁게. 어차피 한 번 왔다 가는 세상 뜨겁게. 가슴의 뜨거움조차 잊어버린 쿨한 세상의 냉기에 질려버렸다. 맹렬히 불타오르고 재조차 남지 않도록 사그라짐을 영광으로 여기는 옛날식의 정열을 다시 만나고 싶다. 그것이 요즘 유행하고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라고 해도.
혜나는 내 의견을 무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 계획 따위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멋대로 내달렸다. 그녀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는 걸 알았지만, 나는 그녀를 불러세울 수도 없었다. 그녀는 내 목소리보다 빨리 달렸으니까. 혜나가 욱연을 사랑하는 방식, 그것이 바로 『사랑이 채우다』이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지 신라 사람들을 희화화하거나 과장하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았다. 나는 나의 소설이 최대한 그들의 실제 생활에 가깝기를 바라며,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경건한 심정으로 그들의 삶을 소설화해보려 애썼을 따름이다. 그들은 거인들을 왕으로 섬겼고, 큰 제사에는 당연히 화끈한 섹스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별과 짐승들로 점을 쳤고, 화려하고 떠들썩한 연애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삶이 우리 현실보다 흥겹고 섹시하게 보인다 해도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 어쩌면 이 소설에는 '선데이 서라벌'이라는 제목이 아주 잘 어울렸을지도 모르겠다.
순수한 듯 속물스럽고 닳아빠진 듯 고지식한 이현의 모습은, 일생을 걸어 진실만을 사랑하리라 믿었던 젊은 날의 내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닮았다. 무언가 안에서 뜨겁게 치미는 것을 꿀꺽 삼키고,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다. 어쩐지 나는 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한편 나는 편집적으로 은둔만을 고집하던 이진의 마음 또한 알 것 같다. 사랑한다는 애타는 고백 따위엔 한없이 냉담하고 무관심한, 세상의 속박이 팔과 다리를 억압해도 까짓것 죽으면 그뿐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그 별난 여자의 마음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