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 세상 이치인 줄 알았다. 그러나 가끔은 질러가는 것에 익숙한 습관을 털고 빙 둘러서도 가고, 세상일 남의 일 보듯 무심해져야 한다는 것을 늦게나마 깨달았다. 그것이 쉼이고 여유라는 것도.
그런 마음을 함께 나누고 사랑하고 슬퍼할 늙은 절을 찾아 떠난다.
그곳에 가면 옛 모습 그대로 곱게 늙어 온 아름다움이 있고, 풍경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이 있고, 영화보다 더 솔깃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쉼의 여백이 생겨난다. 사찰건축의 미학이나, 석탑과 당간지주의 멋들어짐이나, 바람 때가 묻어 더 아름다운 처마 밑 단청을 바라보는 일은 근사한 덤일 뿐이다. 옛 선사들의 선문을 붙잡고 씨름 할 일은 아니다. 그저 차나 한 잔 하고 가면 그뿐.
미얀마 병에 걸린 사진작가의 말
미얀마 병에 걸렸습니다. 십여 년 전, 수많은 불탑을 보러 미얀마를 찾아갔다가 그만 병에 걸려버린 거지요. 누군가 미얀마를 한 번 다녀오면 미얀마 병에 걸린다는 농처럼 흘려들었던 이야기가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병이냐고요? 궁금증에 몸살이 나는 병입니다. 비루하다 느껴질 정도로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인데 순한 미소와 너른 마음을 가진 사람들. 자본과 문명이란 이름에 상처받은 저에게 손을 내밀어 위로를 나눠주었던 곳입니다. 이상하고 궁금해서 다시 찾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얀마 병은 그런 병입니다.
두 달 만에 다시 찾아갔습니다. 그 후 짬만 나면 미얀마 행 비행기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녔습니다. 고대 유적지도 가고 오지 마을도 다녔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 수만큼 많은 부처를 보았습니다. 십년이 훌쩍 지나가니 비로소 보였습니다. 그 얼굴이 그 얼굴이란 것을!
처처부처라는 말이 있습니다. 곳곳에 부처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랬습니다. 미얀마에는 부처상 부처도 사람 부처도 곳곳에 있었습니다. 그 얼굴이 바로 그 얼굴이었습니다. 그런 미얀마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민주를 위해 군부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오월 광주의 데자뷰처럼 다가옵니다.
유적으로 남은 부처상과 닮은 사람을 찾아내 하나의 형상으로 만든 사진작품 이십 점과 미얀마의 풍경, 일상을 담아 사진집으로 발간합니다. 사진집 판매 수익금은 미얀마 민주와 평화를 위해 후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