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소설을 탈고하고 나서 20년 만에 비로소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린 듯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치유 불가능한 난치병을 앓고 난 기분이다. 앞으로는 5월에 대한 소설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5월문학은 이제 식상했다는 말이 너무너무 듣기 싫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거대한 역사적 경직성 때문에 소설적 형상화가 너무 어렵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진실 드러내기와 문학적 형상화 사이에서 나는 그 동안 많은 갈들을 겪었다. 진실 드러내기보다 소설미학에 치중하게 된다면 영령들의 죽음을 욕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많은 자료를 수집했으나 그 자료들은 소설미학을 확보하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했다. 애써 모은 많은 자료들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쉽다.
나는 이 소설을 탈고하고 나서 20년 만에 비로소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린 듯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치유 불가능한 난치병을 앓고 난 기분이다. 앞으로는 5월에 대한 소설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5월문학은 이제 식상했다는 말이 너무너무 듣기 싫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거대한 역사적 경직성 때문에 소설적 형상화가 너무 어렵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진실 드러내기와 문학적 형상화 사이에서 나는 그 동안 많은 갈들을 겪었다. 진실 드러내기보다 소설미학에 치중하게 된다면 영령들의 죽음을 욕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많은 자료를 수집했으나 그 자료들은 소설미학을 확보하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했다. 애써 모은 많은 자료들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쉽다.
요즘 나는 밤마다 무채색의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어딘가를 향해 가묘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누구를 만났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리고 현실의 색깔은 더욱 눈부시도록 화려한데 꿈은 오래된 영화필름처럼 무채색이다. 너무 많은 무채색의 꿈을 꾸고 일어나면 아쉽게도 꿈의 내용을 도무지 기억할 수가 없다. 나이가 많아서도 꿈을 많이 꾸는 것은 아직 내가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어렸을 때의 꿈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임방울의 <쑥대머리>를 좋아하면서부터 소리 광대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 광대라는 천대를 받으면서도, 명창이 되기 위해 목구멍에서 피를 쏟는 힘든 독공을 쌓아 온 그들의 삶에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고 싶었다.
소리 광대의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때, 고창읍에 있는 동리 신재효의 생가를 구경하게 되었다. 여러 차례 신재효가 살았다는 이 집을 구경하고 나서, 그가 정리했던 판소리 여섯 마당과 <광대가>, <호남가>, <도리화가>, <방아타령> 등의 단잡가들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집에서 신재효의 지침을 받아 이름을 떨쳤던 이날치, 박만순, 정창업, 김창록, 전해종, 진채선, 허금파 같은 명창들을 알게 되었다 . 특히 59세 된 동리와 24세의 사랑하는 제자 진채선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오간 이야기는 슬프도록 아름답게 느껴졌다.
신재효가 대원군 곁에 가 있는 채선에게 연모의 정을 느껴, 노래를 지어 보내고 그녀가 돌아올 날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봄이 되니…’로 시작되는 <도리화가> 가락이 아련히 들리는 것만 같았다. 대원군의 사랑을 받은 채선은 동리가 죽고 나서야 고창에 돌아왔다. 신재효는 마지막 눈을 감을 때가지 진채선을 기다렸다고 하니, <도리화가>는 그의 애절한 연가가 된 셈이다.
동리 신재효는 1812년에 경주인과 관약방을 맡아 천여 석을 거둘 만큼 부자가 된 신광흡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글공부를 시작하였다. 열다섯 살쯤에는 사서삼경과 제자백가서를 무불통섭하였으나, 양반 출신이 아니라 하여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아전 노릇을 해야만 했다. 비록 그는 아전이었으나 음률, 가곡, 창악, 속요 등에 정통하여, 풍류로 일대를 울린 사람이기도 하다.
‘사나이로 조선에 생겨/ 장상댁에 못 생기고/ 활 잘 쏘아 평통할까/ 글 잘한다고 과거할까…‘라고 읊은 것을 보면, 그가 반상의 신분 차별에 한이 맺혔음을 알 수 있다.
신재효는 양반이 못된 한을 한으로 삭이지 않고 풍류와 판소리 사설 정리, 명창 배출로 한을 풀어 ‘한량 중 멋 알기는 고창 신 호장이 날개‘라고 할 만큼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고창읍내 홍문거리/ 두춘나무 무지개 안/ 시내 우에 정자 짓고/ 정자 끝에 연못이라…./ 뜰 앞에 벽오동은/ 임신생과 동갑이요/ 아호는 동리오니/ 너도 공부하랴기면/ 가끔가끔 찾어오소/ 에용, 어허 우겨라 방아로구나.
그가 쓴 <동리가>만 봐도 만년에 아전 자리를 그만두고 동리정사에서 얼마나 여유롭고 느긋하게 살았었는가를 알 수가 있다. 그는 66세에 이르러 판소리에 일생을 바친 공으로 양반의 작위를 받게 되었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제수받고, 진채선을 기다리며 73세를 일기로 동리정사에서 눈을 감았다.
소설 <도리화가>는 신재효가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 양반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한 것에 대해 절망을 안고 방황했던 시절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진채선과의 이야기 외에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토별가>, <적벽가>, <<변강쇠 타령>> 등 여섯 마당을 정리한, 73세까지 판소리에 쏟은 삶에 비중을 두었다. 또한 아전 생활을 하면서 재산을 모은 이재의 솜씨, 모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푼 휼민정신, 풍류적 삶과 당시 신흥 부자 세력으로 등장했던 중인 서리들의 역사적 의미를 함께 다루었다.
혹자는 완판본 ‘춘향전’과 신재효가 개작한 <춘향가>를 비교해 볼 때, 신재효의 개작본이 원래 ‘춘향전’이 가지고 있었던 민중의 발랄성을 상실해 버렸다고도 하나, 동리 신재효만큼 판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그것의 정리에 힘쓴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
소설《도리화가》는 1991년 ‘음악동아’에 2년간 연재했고 1993년 도서출판 햇살에서 출판했던 것을 보완하여 이번에 오래 출판사에서 복간을 하게 되었다. 이 작품이 21년 만에 다시 햇빛을 보도록 해 준 오래 출판사 황인욱 사장께 감사드린다.
2014년 12월
앞으로 나는 목화 다래 같은 소설을 쓰고자 한다. 머루, 다래, 으름, 오디, 산딸기 같은 열매 맛을 통해 궁핍했던 고통의 세월과, 가물가물한 무채색의 추억을 꼼꼼히 되작거려보고 싶다.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은근하면서도 담박한 옛 맛을 통해, 자꾸 희미해져가는 내 삶의 근원을 찾아가려 한다.
맛이 자극적인 외래 과일보다는 우리 마음과 정신 속에 자리 잡은 토종 열매의 은근한 맛을 한껏 느끼며 변질되어버린 우리의 오롯한 본디 모습을 되찾았으면 하는 것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노년의 삶 통해 인생의 의미 찾기
두근거리는 마음 여미고 11번째 창작집 『생오지눈사람』을 상재하고 보니 회한이 앞선다. 『생오지 뜸부기』를 낸 지 4년만이다. 우리 나이로 올해 78세니, 아마도 이번이 내 생의 마지막 창작집이 될 것 같다. 이제야 어렴풋이 소설이 보이는 것 같은데 내 영혼이 메마르게 되었구나 싶어 아쉽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더 치열하게 붙안고 매달릴 걸… 어영부영 흉내만 내다보니 어느덧 길의 끝자락이 보인다.
『생오지 눈사람』에 수록된 소설은 70대 들어 쓴 작품들이다 .내 깜냥에는 그래도 생오지에 들어오고 70이 넘어서도 일 년에 한두 편씩 꾸준히 작품을 써 온 셈이다. 생오지로 귀향한 후 10년 동안 소설과 더불어 참으로 오랜만 에 자유롭게 살았다.
이번 창작집에는 주로 노인의 삶과 소통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실려 있다. 삶의 끝자락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뒤돌아보며, “노인은 어떤 존재이며 어떻 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를 생각해보았다. 한 때 세상의 중심에서 치열하게 살아 온 그들의 삶은 고통스러웠지만 화려했던 순간도 있었다. 성공한 삶이 거나 실패한 삶이거나 저마다 삶의 흔적이 뚜렷하다. 6·25와 4·19, 5·16군사 쿠데타와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전쟁, 가난, 민주화, 산업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장의 그늘 속에 천덕꾸러기가 되어 자기방기의 학대에 이른 이들은 경제적 약자로 버림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노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박물관이고 도서관이며 이야기 창고라고 생 각한다. 그들의 축적된 삶 속에 엄청난 이야기와 빛나는 문화, 역사적 가치가 옹근히 살아 있다. 그런대도 우리는 낡았다는 이유로 그 가치를 꺼내 보려고 하지 않는다. 노인들 생애에는 약자의 슬픔과 오랜 세월 충분히 발효된 지혜와, 불행을 행복으로 환치시키는 비법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그들의 지혜를 인생의 길라잡이로 삼아야 한다.
소설은 각성과 치유와 교시적 기능을 뛰어넘어 사회변혁의 힘을 가졌다. 그 렇다면 지금까지 내 소설은 인간의 삶과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까? 내가 작가로 등단했던 70년대 초 우리 사회는 암울하고 답답했다. 닫힌 사회의 불안을 온몸으로 체감했던 나는 “작가는 시대의 병을 앓는 환자이고 그가 쓴 작품은 투병기와 같다”고 말하고 싶었다. 따라서 한때는 ‘문학은 역사의 칼’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문학이라는 지적인 칼로 잘못된 사회와 역사를 담대하게 베어내고 새 싹이 돋게 해야 한다
고 믿었다. 그래서『징소리』, 『청소부』, 『그들의새벽』 등 70~80년대에 쓴 내 소설들은 사회성이 강하다.
이순을 넘기고부터 세상의 빛깔은 오방색도 무지개색도 아닌, 수천 수만 가 지의 오묘한 빛깔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빨강 안에 초록, 노랑, 주 황, 갈색 등 여러 가지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질적인 것들의 어울림이야 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나는 나이가 들수록 시력은 나빠졌으나 세상은 더욱 명징하게 잘 보였다. 총체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자 거시적 세계관이 미시적 세계관으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거대담론이 리얼리즘소설의 중요한 미학이긴 하지만 미시적 세계관도 놓치
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작가는 역사변화의 현장인식도 중요 하지만 먼지만큼 작은 별꽃이나 코딱지꽃을 통해 광대한 우주를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터득했다.
나는 노인이 되면서부터 노인의 삶을 통해 인생의 의미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보고 싶었다. 키르케갈의 말처럼 인생이 “고통이라는 열차를 타고 불안이라는 터널을 지나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이르는 것”이라면 얼마나 허무한 가. 인생은 드라마도 아니고 소풍도 아니다. 쏜톤 외일더는 ‘우리읍내’에 나오는 대사에서 “인생은 커피 마시고 싶을 때 커피 마시고 만나고 나은 사람 만나는 것”이라며, 일상성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나는 ‘눈뜨고 눈 감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눈 떠서 이 세상이 갖고 있는 모든 색깔을 다 보
며 느끼고 깨닫고 마지막에 눈 감는 것. 문제는 한번 밖에 살지 못하니까 아무렇게나 살자는 것이 아니라, 한번 밖에 살지 못하니까 의미 있게 살자는 것이다.
암턴 나는 노인의 삶을 살아가면서부터 인생도 소설에 대한 생각도 변했다. ‘역사의 칼’에서 ‘구도의 길찾기’로 변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작가는 깨달음에 안존하는 도인이 아니다. 시대정신을 꿰뚫어보되 이웃들이 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지혜를 빌려주는 역할로 충분하다. 장검을 휘두르는 검객이거나, 견성이라도 한 듯 도인행세를 하며 자만해서도 안 된다. 소설은 아름다운 삶을 흐리게 하는 환각제도 세상을 가르치는 교편도 아니다. 주머니칼처럼 끝이 날카로운 펜으로 위선적인 삶이나 모순된 사회, 왜곡된 역사를 콕콕 찔러 정상궤도에 진입하도록 자극을 줄 수 있어야한다. 날카로운 침으로 잠 든 영혼을 일깨울 수 있다면 족하다. 소설은 “걸어다니는 거울”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거울을 통해 개인과 사회와 역사를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자성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내 소설은 ‘역사의 칼’에서 ‘구도의 길찾기’를 거쳐 ‘성찰의 거울’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2016년 가을 ‘생오지’ 에서
소쇄원에 누워 봉황을 기다리다
소쇄원(瀟灑園)은 내가 살고 있는 생오지마을에서 자동차로 15분 거리에 있다. 나는 이틀에 한 번꼴로 소쇄원 앞을 지난다. 심란할 때 소쇄원에 들러 소쇄한 대바람 소리를 들으며 머리를 식히는가 하면, 광풍각 마루에 한가롭게 걸터앉아 얼핏 낮잠에 빠지기도 한다. 이곳에 가 있는 동안 내 자신이 소쇄처사 양산보가 된 것처럼 유유(幽幽)하고 유유(悠悠)한 기분을 느낀다.
나는 소쇄원에서 몇 가지 궁금한 생각을 갖게 되었고 이같은 의문들을 풀기 위해 소설을 쓰기로 했다. 앞길이 창창한 17세 선비 양산보는 왜 출사의 꿈을 접고 평생 이곳에 은둔하게 되었으며, 그가 이곳에서 일구고자 했던 이상세계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왜 대봉대(待鳳臺)라는 초정을 짓고 상상의 새 봉황새를 하염없이 기다렸을까? 호남유림들의 담론의 장소이자, 창작공간이었던 소쇄원은 이 시대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양산보는 15세에 큰 뜻을 품고 한양에 올라가 조광조의 문하에 들었다. 조광조에게서 글을 배우게 된 것은 불과 3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심성이 올곧은 청년 양산보는 그 기간 동안에 정치체제를 바꾸려는 조광조의 개혁이념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1519년 12월 그믐께, 한양에서부터 배종하고 따라온 양산보는 적소인 능주에 20일쯤 머물렀다. 그는 스승이 사약을 받고 절명한 것을 절망과 비통 속에서 지켜보았다. 한양에서 조광조의 아우인 조숭조를 비롯하여 양학포와 학포의 동생, 성수침, 홍봉세, 이충건 등 친구와 제자들이 비보를 듣고 급히 왔다. 친구들과 제자들은 조광조를 능주에서 가까운 쌍봉사 중조산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양산보는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내 분노와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통곡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창암촌으로 돌아온 양산보는 정자를 짓고 나무를 심어 이상향을 꾸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창암촌은 지금의 주차장에서 11시 방향의 언덕바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양산보의 집을 비롯하여 13채의 집이 있었고 지금의 소쇄원은 잡목에 둘러싸인 조붓한 계곡 안이었다. 양산보는 계곡을 돌아보다 말고 문득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떠올렸다. 무이구곡은 중국 북건성 무이산 계곡의 아홉 굽이를 가리키는데, 남송 때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가 1183년에 무이정자를 짓고 성리학을 연구한 곳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성리학자들에게 무이구곡은 이상적인 은일처로 통했다.
조광조는 개혁성향 사림파를 제거하려는 훈구파의 모함을 받고 죽었다. 결국 조광조의 죽음이 양산보를 이곳 담양군 남면 지곡리 창암촌에 은둔하게 만들었고 소쇄원을 일구게 한 것이다. 양산보는 스승인 조광조가 죽자 크게 비관, 세속과 명리를 멀리하고 소쇄원을 무릉도원과 같은 이상향으로 만들어 철저하게 은일하려고 한 것이다. 인생의 좌표였던 조광조가 죽었으니 양산보에게는 하늘이 무너진 듯했을 것이다. 얼마나 큰 절망과 비탄에 젖었겠는가. 그렇다고 현실도피는 아니었다.
내가 「소쇄원에서 꿈을 꾸다」를 쓰면서 얻은 결론은 조광조가 죽지 않았더라면 양산보는 정치개혁을 실현하는 중심인물이 되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소쇄원도 조성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소쇄원은 그냥 조선시대 자연을 이용한 대표적인 민간정원이라는 보편적 상식을 초월한 공간이다. 이곳은 양산보가 꿈꾸어왔던 이상세계다. 그는 나무 한 그루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심었으며 한평생 대봉대에서 봉황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았다. 대나무에 맺힌 이슬을 먹고 오동나무 가지에만 앉는다는 봉황은 무엇일까. 스승 조광조의 순결한 영혼일 수도 있겠고 뜻을 같이 할 친구, 진인(眞人)이 아니면, 요순과 같은 성군이거나, 도학정치가 실현된 새로운 세상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이곳을 찾는 봉황은 양산보의 인품과 학덕에 끌려 쉼 없이 찾아든 선비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양산보가 소쇄원을 일군 뒤에 이곳을 찾는 선비들은 송순을 비롯하여 김인후, 임억령, 유성춘, 유희춘, 김윤제, 김성원, 기대승, 고경명, 정철, 백광훈 등이었다. 김인후는 소쇄원을 소재로 180편의 시를 지었고 송순과 임억령, 고경명 등도 이곳에서 많은 작품을 썼다.
제월당과 광풍각을 비롯하여 14채의 정자와 집이 있었던 소쇄원은 양산보 당대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양산보에서부터 아들과 손자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꾸준히 조성되었다. 정유재란 때 완전히 소실된 것을 복원하기까지는 실로 5대에 이른다. 본격적으로 소쇄원을 일군 것은 둘째 자징의 아들이며 양산보의 손자 천운(千運)에 의해서였다. 양산보의 성품을 그대로 물려받은 천운은 누구보다 할아버지의 유지를 잘 받들었다.
나는 소쇄원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로부터, 눈에 보이는 것들만 건성으로 대충 둘러보고는 “별로 볼 것도 없다.”고 투덜대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나는 그들에게 양산보 선생의 외로웠던 삶과 이상세계에 대한 철학을 이해시켜주고 싶었다. 나는 2006년 생오지로 귀향하면서부터 소쇄원을 소재로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자료를 찾고 관련서적을 골라 읽느라 많은 시간이 흘렀다. 소설미학인 픽션에 치중하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도록 했으며 되도록 양산보의 삶과 그의 생각들을 보여주려고 했다. 또한 소쇄원과 관련이 있는 시대의 실존 인물들을 등장시켜보려고 노력을 했다. 실제로 소설을 쓰는 동안 양산보 선생의 꿈을 꾸기도 했다. 꿈속에서 양산보의 모습은 유유자적과 함께 깊은 골짜기의 달빛처럼 은은하면서도 외로워 보였다.
2015년 이른 봄, 생오지에서
내 소설의 뿌리는 바로 황토 같은 우리 어머니의 질척한 삶에 있다. 나는 어머니의 척박한 삶을 통해서 소설의 정신을 본다. 지금까지 소설을 써 오면서 가능한 한 어머니의 정서와 가치관을 통해 가식 없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했다. 어머니의 삶 속에는 해방공간 이후 6.25의 비극적 고통과 궁핍의 슬픔, 가부장적인 남성적 세계관이 빚어낸 비인간적인 폭력, 아름다운 모성 본능, 한과 끈질긴 여자의 생명력이 오롯이 담겨져 있다. 나는 어머니를 통해 그것들을 열심히 찾아내서 소설 속에 담아내려고 했다.
70년대 말 나는 <징소리>를 쓰기 위해 도시 빈민으로 전락한 수많은 실향민들을 만나, 그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이 소설을 쓰면서 나는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아픔이 얼마나 큰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고향만이 아니라, 그들이 간직해온 역사, 문화는 물론 희망, 믿음까지도 포함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다시 고향을 생각한다. 고향은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는 공간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처음 이 소설을 쓰면서 고향을 인간존재양식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고향을 잃어버렸다고 한 것은 인간의 진정성을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 시대에 고향을 다시 생각하고 그리워한다는 것은 퇴영적 사고이고 낭비적 과거집착이라고 비난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파편화된 익명사회에서 고향은 삶의 진정성을 회복하기 위한 마지막 희망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