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청소년들을 만나 온 시간이 어느 덧 10년이 되었습니다. 미리 온 통일인 탈북 청소년들의 대변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보고 듣고 느낀 게 많으니까요. 낯선 땅에서 고군분투하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습니다. 자기 길 찾기를 잘하며 사는 친구들을 만나면 절로 뜨거운 눈물이 나왔어요.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그 마음을 일곱 편의 소설로 형상화시켜 보았습니다. 물론 소설의 내용이나 무대는 경험을 토대로 했지만 상상의 산물입니다. 이 소설이 남북 청소년들의 징검다리 역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남북 청소년 모두에게 울림을 주는 종소리 같은 책이길 빕니다.
흔들리며 자라는 아이들 세계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흔히 ‘학교 밖 아이들’이라 말하지요. 우리 주변에 유주, 은우, 나은, 수호 같은 아이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들은 문제아가 아닌 성장통을 앓고 있는 평범한 아이들입니다. 그들이 가는 길을 믿음과 애정으로 봐주고 싶었습니다.
사샤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사실 우리와 한민족이랍니다. 고려인은 19세기 중엽부터 8·15광복 때까지 러시아와 구소련 지역으로 이주한 이들과 친족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연해주 이주 이야기는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아픈 역사이기도 하고요. 사샤와 같은 고려인이 우리나라에 꽤 많이 살고 있어요. 사샤와 독자 여러분은 ‘다르지만 같은’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 주세요. _「작가의 말」에서
저는 오랫동안 북한에서 살다 온 청소년을 만나 왔어요. 탈북 학교에서 책 읽고 글 쓰는 일을 가르쳤지요.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서서히 친구가 되었어요. 즉, 밥 먹는 사이가 된 거지요. 학교 급식을 나눠 먹기도 하고, 햄버거도 먹고, 소풍 가서 도시락도 까먹었어요.
탈북 친구들을 만나며, 남북 음식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았어요. 사랑하는 마음으로 피자를 사 주었더니 별로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느끼하기만 하고, 입맛에 맞지 않습네다.”라며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어요. 제가 더 미안했지요.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먹어 온 음식이 달라도 입맛까지 다를 것이란 생각을 못 한 거예요. 그때의 충격과 미안함이 《리루다네 통일밥상》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어요.
저는 북한에서 살다 온 친구를 불쌍하다거나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았어요. 태어난 곳이 북한이기에 어쩔 수 없이 겪은 일들이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리루다’ 같은 친구를 더 많이 그리고 싶었어요.
탈북 청소년들을 만나 온 시간이 어느 덧 10년이 되었습니다. 미리 온 통일인 탈북 청소년들의 대변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보고 듣고 느낀 게 많으니까요. 낯선 땅에서 고군분투하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습니다. 자기 길 찾기를 잘하며 사는 친구들을 만나면 절로 뜨거운 눈물이 나왔어요.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마찬가지고요.그 마음을 일곱 편의 소설로 형상화시켜 보았습니다. 물론 소설의 내용이나 무대는 경험을 토대로 했지만 상상의 산물입니다. 이 소설이 남북 청소년들의 징검다리 역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남북 청소년 모두에게 울림을 주는 종소리 같은 책이길 빕니다.
'그 아이' 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담장을 휘감고 오르던 붉은 장미가 유난히 빛나던 날이었다.
어쭙잖은 공명심으로 나는 그들 앞에 섰던 적이 있다. 대부분 평범한 아이들의 눈빛과 말투 그대로였다. 다만 한순간의 실수로 잠시 자유를 저당 잡힌 채, 좁은 공간에 머물고 있던 아이들. 난 그 아이들에게 편지쓰기를 권해 보았다.
모두가 글쓰기 흉내라도 내고 있는데 유독 '그 아이'만은 먼산바라기만 하고 있었다.
살며시 다가가 조용히 아이의 어깨를 툭, 쳤다.
"네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을 많은 사람에게 털어놔 봐. 솔직하게."
"난 그 딴 것 안 키워요!"
흠칫 놀라, 아이의 눈을 보았다. 독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너무나 아파 보였다.
그 날 행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담장 밑의 장미를 보는 순간, 난 오한을 느꼈다.
왜? 누가? 저 아이의 눈에 독을 심어 주었을까.
그건 바로 나였다. 그들을 향한 편견이 나이 어린 아이들을 '특수한 틀' 속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그 후로도 나는 수없이 '그 아이의 눈'을 보았다. 대학로를 휘젓고 다니는 폭주족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학교 골목길에서 삥을 뜯고 있는 아이의 눈 속에서.
난 알 수 없는 부채감에서 이 소설을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오래 전부터.
이제 내 안에서 '그 아이' 를 풀어주고 싶다. 자유로운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거라.
또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질풍노도의 시기를 그야말로 극렬하게 보낸 아들을 바라보았던 어미의 마음으로 시작했다. '분홍벽돌집'은 나의 상상 속의 공간이다. 하지만 르포 쓰듯 발품을 팔았다. 그리고 가슴으로 이 작품을 썼다.
첫 소설이 『분홍벽돌집』이어서 행복하다. 정말 쓰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비록 문학의 지경에 접근하지도 못했고, 미흡한 형상으로 내놓은 초라한 집일지언정.
삶이 나를 힘들게 할 때, 거름 냄새 물씬 풍기는 시골길을 걸을 때가 있습니다. 볼 것 없는 초라한 고향이지만, 맑은 냇물과 늙은 밤나무는 여전히 나를 반겨 줍니다. 마룻바닥에 무릎 꿇고 기도하던 언덕 위 빨간 교회의 십자가가 나를 바라봅니다. 햇빛이 미치는 십자가에서 "힘내라"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싶습니다.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뭉클 끌어오르는 충만감이 나를 행복하게 했지요.
흔들리며 자라는 아이들 세계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흔히 ‘학교 밖 아이들’이라 말하지요. 우리 주변에 유주, 은우, 나은, 수호 같은 아이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들은 문제아가 아닌 성장통을 앓고 있는 평범한 아이들입니다. 그들이 가는 길을 믿음과 애정으로 봐주고 싶었습니다.
시골 교회 앞마당에는 오래된 꿀밤나무 한 그루가 있었어요. 선생님은 꿀밤나무 아래 앉아 하늘을 바라보곤 했어요. 엄마가 보고 싶어 소리 없이 울다 보면 가슴이 후련해졌지요.
얼마 전에 꿀밤나무는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지금까지 하나님이 너의 길을 인도하신 것 잊지 않고 있지?”
맞아요.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손길로 지금까지 선생님을 인도해 주셨어요. 선생님이 탈북 아이들을 만나게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송희처럼 북한에서 힘들게 사는 아이들은 많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해요. 그 아이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동화로 쓰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중략)
위험천만한 두만강을 건너온 송희가 엄마와 함께 따뜻한 나라에 안전하게 도착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엄마는 감자꽃 향기』를 썼어요. - 작가의 말 중에서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라는 말을 믿으며. 나는 떠나기 위해 오늘을 치열하게 살았다. 여행지에서 만난 낯섦과 새로움 속에서 희열을 느꼈다. 그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곳이 몽골의 ‘흡스골’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몽환적인 호수, 흡스골로 소설 속의 아빠와 딸을 이끌었다. 갈등을 내려놓고 서로를 감싸 안는 장소로 최고라 여겼기에.
어느덧, 마흔의 중반 고개를 넘고 말았다.
청바지만 입어도 당당했던 그 젊은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능소화 꽃처럼 농익은 아름다움이 마흔의 속살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제 더는 휘청거리지 않는다. 아니 휘청거릴 시간이 없다. 절반의 삶을 산 경험으로 앞으로 남은 생 앞에 성실해야 한다는 명제가 남았기 때문이다.
질풍노도의 길을 걷다 회색 벽돌집에 갇힌 청소년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세상 모든 짐을 짊어진 듯, 지치고 힘든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을 향한 절망으로 이미 자신을 포기한 아이도 있었습니다.
푸르른 청춘들이 왜 회색 벽돌 속에 갇혀야 하는 걸까?
언론에서 촉법소년 문제라든가 청소년 범죄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안타깝고 아팠습니다.
어른들에게 주는 강한 메시지로 들렸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문제아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믿고 지지해 주면, 패륜아일지언정 반드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