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소감을 보내기로 한 저녁이 다가오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시인들의 글을 찾아 읽기로 합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얼굴의 부드러운 입술모양을 흉내 내며 더듬더듬 발음하기 시작한 유년 시절로 돌아간 듯이 말입니다. 그이들이 지닌 각양각색의 성품대로 정갈하거나 치열하며 유머러스하거나 비장한 수상소감들입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비슷합니다. 상 받는 일이 황홀하지만 그 황홀함의 팡파르에 무슨 독이라도 섞여 있다는 듯이 다들 경계하고 의심하고 확인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수상소감이라기보다는 무슨 중대 과실에 대한 자백 같고 반성문 같은 느낌입니다. 수잔 손탁의 말처럼 시인이 쓴 산문의 가장 큰 특징이 시인의 고귀한 사명에 대한 언급이라면, 아마 수상소감만큼 ‘시인의 산문’다운 글은 없을 겁니다.
모처럼 황홀함의 쾌락에 빠져들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시인은 스스로가 문학에 부여한 사명을 떠올리며 그 달성량을 혹독하게 측량하고 확인하는 아이러니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분들로부터 배웁니다. 자신들의 시가 보잘것없다는 한탄도 단순한 겸양의 말이 아님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문학을 시작하면서 세운 시인의 사명이 얼마나 드높고 고귀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 세상의 모든 상들보다도 더 빛나는 모습으로 제게 과분하게 수여된 여러 시인들 곁에서 함께 사랑하고 살고 시 쓰겠습니다.
- 수상소감
작가들은 진심으로 독자를 믿는다. 그들에게 그런 믿음이 없다면, 어떤 슬픔 속에서도 삶을 중단하지 않는 화자, 자기와 꼭 들어맞지 않는 세계 속에 자기의 고유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싸우는 주인공을 등장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목소리가 이해받을 수 있다는 믿음, 그런 삶을 소망하는 사람이 이 세계에 적어도 한 명은 존재하고 그가 분명 내 책을 읽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만 작가는 포기하지 않는 인물을 그리고, 희망 없이도 포기하지 않는 능력에 대한 철학을 펼칠 수 있다. 그렇다면 포기하지 않는 삶을 말하는 책이 포기하지 않는 독자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이다. 혹은 용감한 독자와 용감한 책이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릴케의 시구처럼 우리는 책에서 자신의 그림자로 흠뻑 젖은 것들을 읽는다.
—「책머리에」에서
솔직히 고백하건대(솔직히 말한다는 것은 늘상 어떤 빌미를 제공하는 일이지만 용기를 내자면) 나는 가끔은 이상한 허무감에 휩싸여 '나는 철학을 믿지 않는다'라고 중얼거릴 때가 있다. '그렇다면 너는 무얼 믿는지?' 이렇게 반문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불탄 집의 부서진 창으로 신선한 향기를 날려보내는 식물들이다. 철학이든 문학이든 말과 사유로 지어진 집들이 작은 불꽃에도 얼마나 쉽게 타버리는 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꾸 철학과 문학의 주변을 기웃거리게 되는 것은 그 허술한 집 둘레로 모여든 자들의 묘한 향기 때문이다.
이 책을 써나가면서 나는 칸트의 고유한 문제의식과 칸트철학의 풍요로운 가능성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오랜 시간 칸트가 가보았던 모든 사유의 샛길과 막힌 골목까지도 직접 걸어가 보고, 사유자로서 그가 겪었던 그 모든 기쁨과 슬픔, 놀라움을 다시 살아보려 노력했던 훌륭한 칸트 전문가들이 많이 있다. 그들이 전할 수 있는 칸트철학 고유의 풍요로움과 그들이 지닌 칸트에 대한 극진한 애정과 비교할 때 내 사랑과 능력은 정말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칸트와 함께 하는 동안 최선을 다해 그에게 공감하고 그를 이해하려고 애썼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나는 이 책이 다른 존재와의 공감능력을 지닌 시인의 칸트 읽기가 되기를 바랐다. 이 책은 칸트보다는 니체나 푸코, 들뢰즈를 더 즐겨 읽고, 그들에게 쉽게 매혹당하는 감수성을 지닌 연구자의 칸트 읽기이다. 칸트철학과 관련하여 전공자들 사이의 논쟁이 분분한 부분에서 이 책은 푸코나 들뢰즈가 칸트를 생산적으로 독해하는 방식에 근접하는 해석을 채택했음을 밝힌다.
서른살 무렵,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카프카가 죽은 나이까지는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런데 하느님은 내 소원을 잘못 알아들으신 것 같다. 카프카가 쓴 것처럼 쓸 수 있을 때까지 살게 해달라는 이야기로. 그리하여 나는 그 누구보다 오래 살고, 어쩌면 영원히 살게 될지도 모른다. 이 불미스러운 장수와 질 나쁜 불멸에 나는 곧 무감해질 테지. 문학은 나에게 친구와 연인과 동지 몇몇을 훔쳐다주었고 이내 빼앗아버렸다. 훔쳐온 물건으로 베푸는 향응이란 본래 그런 것이지, 지혜로운 스승은 말씀하실 테지만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소중한 것을 전부 팔아서 하찮은 것을 마련하는 어리석은 습관을 여전히 버리지 못했다.
2012년 8월
서른살 무렵,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카프카가 죽은 나이까지는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런데 하느님은 내 소원을 잘못 알아들으신 것 같다. 카프카가 쓴 것처럼 쓸 수 있을 때까지 살게 해달라는 이야기로. 그리하여 나는 그 누구보다 오래 살고, 어쩌면 영원히 살게 될지도 모른다. 이 불미스러운 장수와 질 나쁜 불멸에 나는 곧 무감해질 테지. 문학은 나에게 친구와 연인과 동지 몇몇을 훔쳐다주었고 이내 빼앗아버렸다. 훔쳐온 물건으로 베푸는 향응이란 본래 그런 것이지, 지혜로운 스승은 말씀하실 테지만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소중한 것을 전부 팔아서 하찮은 것을 마련하는 어리석은 습관을 여전히 버리지 못했다.
2012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