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 주문과 설명을 담은 저자의 긴 메일을 이 책 번역을 시작할 때 출판사를 통해 전달받았다. 저자가 번역에 신경을 쓰고 세심하게 도움을 주려 하는 것이 무척 고마웠다. 그런 한편 이 짧은 소설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지만 말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드러내지 않고 암시하고자 한 부분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고 빙산의 일각 같은 이 글을 과연 어떻게 옮겨야 할지 난감했다. 이 짧은 소설은 차라리 시였고, 언어의 구조는 눈 결정처럼 섬세했다. 잘못 건드리면 무너지고 녹아내릴 것 같았다. 클레어 키건은 무수한 의미를 압축해 언어의 표면 안으로 감추고 말할 듯 말 듯 조심스레 이야기한다.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고 미묘하게 암시한다. 두 번 읽어야 알 수 있는 것들, 아니 세 번, 네 번 읽었을 때야 눈에 들어온 것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번역을 하기 위해 이 책을 무수히 읽으면서 내가 알게 된 것을 번역에 설명하듯 담지는 않으려고 애썼다. 그랬다가는 클레어 키건이 의도한 대로 삼가고 억누름으로써 깊은 진동과 은근한 여운을 남기는 글이 되지 못할 터였다. 그래서 독자들도 이 책은 천천히, 가능하다면 두 번 읽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얼핏 보아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4년 전이다—는 솔 애들러에게 완전히 공감을 못 했다. 자기애가 강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좋아하기는 힘들었다. 형식과 아이디어가 뛰어난 소설이라고 생각했지만, 감동을 느끼지는 못했다. 출간을 준비하며 다섯 번째인가 여섯 번째, 다시 이 책을 읽었을 때, 뜻밖의 감정이 몰려와 당혹스러웠다. 교정지를 3분의1쯤 읽었을 때 시작된 울음이 그치지 않아 아예 휴지통을 옆에 두고 끝까지 읽었다. 책은 달라지지 않았을 테니 내가 달라진 거였다. 그 사이 4년이 흘렀고, 이제는 애비 로드에서 사진을 찍히던 스물여덟 살의 솔보다 병원에 누워 있는 쉰여섯 살의 솔이 더 많이 보였다. 젊은 시절의 나와 나이 든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믿을 수 없고 나도 모르게 중요한 무언가를 너무나 많이 잃어버렸음을 뒤늦게 깨닫고 당황하는 사람이 나였다. 『모든 것을 본 남자』는 시간과 기억에 관한 소설이다.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두루마리를 반으로 접어 겹치듯이, 젊은 날의 솔과 죽음을 앞둔 솔의 이야기가 하나로 합해지며 온전해진다. 아직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젊은이와 지난 잘못과 상실과 후회를 어쩔 줄 모르는 늙은이가 같은 몸 안에 있다. ‘조각난 남자’의 모습으로. 조각난 남자의 어느 면을 보느냐에 따라, 삶의 어떤 시기에 이 책을 읽느냐에 따라, 우리는 때로는 웃게 되고 때로는 울게 되고, 때로는 애비 로드 횡단보도의 흰 선을, 때로는 검은 선을 밟게 된다.
억압과 폭력, 희망의 가능성에 대한 어떻게 보면 익숙한 이야기를 진부함이라고는 없이 전달할 수 있었던 놀라운 힘은, 소설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강력한 서사의 목소리와 결합시켜서 이야기하는 행위 자체를 저항이자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으로 만들어버린 독특한 솜씨에서 나온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화자의 억눌린 사고 구조 안에서 생각하게 되고 억눌렸기 때문에 차마 멈추지 못하고 한없이 이어가는 목소리를 따라가며 숨이 답답해진다. 이 책을 다 읽은 독자는 물 건너 나라의 과거를 관망한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스스로 살았다고 느낄 것이다.
억압과 폭력, 희망의 가능성에 대한 어떻게 보면 익숙한 이야기를 진부함이라고는 없이 전달할 수 있었던 놀라운 힘은, 소설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강력한 서사의 목소리와 결합시켜서 이야기하는 행위 자체를 저항이자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으로 만들어버린 독특한 솜씨에서 나온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화자의 억눌린 사고 구조 안에서 생각하게 되고 억눌렸기 때문에 차마 멈추지 못하고 한없이 이어가는 목소리를 따라가며 숨이 답답해진다. 이 책을 다 읽은 독자는 물 건너 나라의 과거를 관망한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스스로 살았다고 느낄 것이다.
(...) 여러 주문과 설명을 담은 저자의 긴 메일을 이 책 번역을 시작할 때 출판사를 통해 전달받았다. 저자가 번역에 신경을 쓰고 세심하게 도움을 주려 하는 것이 무척 고마웠다. 그런 한편 이 짧은 소설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지만 말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드러내지 않고 암시하고자 한 부분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고 빙산의 일각 같은 이 글을 과연 어떻게 옮겨야 할지 난감했다. 이 짧은 소설은 차라리 시였고, 언어의 구조는 눈 결정처럼 섬세했다. 잘못 건드리면 무너지고 녹아내릴 것 같았다. 클레어 키건은 무수한 의미를 압축해 언어의 표면 안으로 감추고 말할 듯 말 듯 조심스레 이야기한다.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고 미묘하게 암시한다. 두 번 읽어야 알 수 있는 것들, 아니 세 번, 네 번 읽었을 때야 눈에 들어온 것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번역을 하기 위해 이 책을 무수히 읽으면서 내가 알게 된 것을 번역에 설명하듯 담지는 않으려고 애썼다. 그랬다가는 클레어 키건이 의도한 대로 삼가고 억누름으로써 깊은 진동과 은근한 여운을 남기는 글이 되지 못할 터였다. 그래서 독자들도 이 책은 천천히, 가능하다면 두 번 읽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얼핏 보아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틀렸다고도 할 수 없는》은 폴 콜린스의 세 번째 책이다. 자기 아들이 자폐아라는 것을 알게 되고, 여느 아버지처럼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결국 눈앞에 있는 자기 아이에게 가닿기 위해 절박하게 현실 속에서, 그리고 그답게 책 속에서 단서를 찾아 헤맨다.
레오 카너와 한스 아스퍼거가 “자폐증”이라는 말을 만들기 전에도 자폐인은 세상에 늘 상수의 비율로 존재했을 것이다. 개념도 이름 붙일 말도 없었을 때에는, 분명히 존재했을 사람들의 흔적이 지워지고 묻혔다. 폴 콜린스는 그렇게 사라진 자폐증의 역사를 먼지 풀풀 나는 책 속에서 좇아간다. 그 길에 만난 사람들은 이미 주목받은 앨런 튜링 같은 인물도 있지만, 수학이나 물리학, 컴퓨터공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 몰두해 더욱 이해받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18세기 궁정에 등장했던 야생 소년 피터, 각 냄새에 해당하는 음이 있다는 이론을 펼친 셉티머스 피스(이 사람의 이론이 향수 제조법에 혁신을 일으켜 아직도 향수 만들 때 “베이스노트”“탑노트” 같은 용어를 쓴다), 아웃사이더 아티스트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조지프 코넬, 헨리 다거.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기이하다, 괴팍하다고 부르는 그 사람들의 특징이, 어떤 모습이 너무나 낯익게 보이기 시작했던 점이다. 나 자신에게서, 옆 사람에게서 늘 보던 모습이 아닌가? 이를테면 우리 집 첫째한테 루빅스큐브를 사 줬는데 정렬된 상태가 흐트러지는 게 싫어서 섞지 않고 계속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고 있다던가. 절대 다른 사람과 눈을 맞추고 인사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던가.
이른바 자폐 스펙트럼을 길게 늘이면, 내 존재도 거기 어딘가에 포함되는 띠가 된다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었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처음으로 일이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나에게는 정말 특별한 책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했던 사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전혀 모르고 있을 것 같은 그런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한시 바삐 들려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