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2월
첫시집 ‘섬을 떠나야 섬이 보입니다’를 낼 때의 설렘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모든 것을 다 갖고 싶고, 다 하고 싶었던 젊은 시절엔 떠나야 바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70이 넘어 욕심을 하나하나 내려놓으며 생각해보니 내가 곧 섬이었고 바다였고 산이었음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떠나지 않아도 볼 수 있게 되었나 보다. 그래서 쓴 시가 ‘섬에 있어도 섬이 보입니다’이다.
그러다보니 시가 쉬워졌다.
꾸미는 말과 기교가 사라지고 더러는 실체를 보게 됐다.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보는 것! 그것이 어른의 진실임을 알게 되었다.
시집을 내는 일은 부끄럽다. 늘 모자라니까. 그래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 보다는 쓰는 것이 덜 부끄럽다.
앞으로도 덜 부끄러운 작업은 계속될 것이다.
2020년 가을
<열며>
첫 시집
『섬을 떠나야 섬이 보입니다』
둘째 시집
『가슴에 닿으면 현악기로 떠는 바다』
넷째 시집
『섬에 있어도 섬이 보입니다』를 통해
섬을 노래했고
‘우린 모두 섬이었구나’를 알았다
고독과 단절의 섬으로
그냥 있어야 할 것인가?
아니다
이제
그 섬과
이 섬을 잇는
다리를 놓을 시간이다
이 시집은 징검다리를 놓는 디딤돌에 불과하다.
<닫으며>
골육종
난생 처음 듣는 병명이라 검색창을 열었을 때
(정확히 10월 14일 문태준 시인 시 토크가 있던 날 아침)
왈칵 울음이 쏟아졌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우리 여민이(11살)의 뼛속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었다니
그 아픈 항암 치료를 어찌 받을까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여민이는 마른 막대기 하나도 날카로운 칼을 만들어 악당을 물리치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었고(졸시 ‘막대기 하나에도’)
내가 마음이 흐려질 때 바라보는 작은 바위 얼굴(졸시 ‘얼굴’)이었는데….
정류헌情流軒은 혼자 울기 좋은 곳이다.
한참 울다 생각하니 지금까지 이렇게 울어본 적이 있었던가.
우리 여민이보다 더 아픈 사람이 많았을 텐데 갑자기 부끄러웠다.
다섯 번째 시집을 마무리하고 내 노트북 바탕화면에 새 폴더를 만들고 폴더 이름을 ‘제6 시집’이라 명하고 바로 다음 시집을 준비하기로 했다. ‘누구를 위해 울 것인가’가 화두가 될 듯하다.
이제 다리를 놓을 시간
그 다리는 ‘만남과 배려’
그가 나에게 와서 만나기도 하고
내가 그에게 뛰어가 만나기도 한다.
나와 대상과의 거리를 좁히고 연결하는 다리가
이제는 ‘눈물’이어야 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의 눈물이 시가 되어
어느 한 사람에게라도 다가가
다리가 되는 작은 기적을 기다린다.
모름지기 시인은
이름 모르는 들꽃에게 다가가 그 향기 속에 숨어 하나가 되는
그런 신비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들꽃인지
들꽃이 나인지
몰라도 그냥 좋다!
이 시집을 씩씩하게 항암 치료를 받을 여민의 가슴에 놓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