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가 저는 뜻밖의 인물을 만났습니다. 그는 바로 소크 박사(Jonas Edward Salk),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성공한 학자였습니다. 소아마비는 1950년대 중반만 해도, 미국에서 해마다 58,000여 명의 환자가 생겨날 정도로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소크 박사가 이런 무서운 병의 백신을 발견했으니 이제 돈을 버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겠지요. 수많은 제약 회사가 특허를 양도하라며 많은 돈을 소크 박사에게 제의했을 테니까요. 그러나 소크 박사는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나는 백신을 특허로 등록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 태양을 특허 신청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인류를 괴롭히던 소아마비를 박멸에 이르게 한 것은 의학 연구 덕분이기도 하지만 소크 박사의 ‘이익을 포기할 줄 아는 마음’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세계 보건 기구에 납품되는 소아마비 백신 1개의 값은 100원 정도에 불과해 누구나 맞을 수 있다고 합니다. 1993년 시사 주간지 <타임>이 소크 박사를 20세기의 100대 인물에 선정한 까닭은 자신의 연구 성과를 인류의 공동 자산으로 함께 나눈 사랑의 정신에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죠.
이익을 보면 옳음을 생각하라는 뜻의 ‘견리사의見利思義’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의 삶을 보세요.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안달하는 모습, 바로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요? 더 많은 것을, 더 빠른 시간 내에, 더 적은 힘을 들이고 생산하겠다는 것이 ‘돈만을 추구하는’ 우리네 삶의 모습은 아닐까요? ‘부자 되기’, ‘성공하기’, 이 두 명제가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세계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집스럽게 ‘옳음의 길’을 간 분들의 삶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익이나 명예를 좇지 않았습니다. 안락함이나 화려함을 추구하지도 않았으며, 남들이 간 길을 가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자신의 길을 갔습니다. 비록 외롭고, 힘겨웠지만 처음 생각한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타인만을 위한 삶을 산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양심과 판단이 시키는 대로 정직한 삶을 살았을 뿐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과 이성에 따라 사람들이 가는 방향과 반대의 길을 가기도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익을 따를 때, 그 반대의 길을 간 소크 박사처럼 말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바보라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분들이 새로운 역사와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닐까요?
연어처럼! 급류를 거슬러 오르는 정신, 바로 그것이 소크 박사의 정신이며, 이 글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위대함입니다. 명예나 이익, 화려함 같은 것은 그들의 관심 속에 있지 않습니다. 성공도 인생의 목표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견리사의의 정신’, 바로 그것이 그들의 삶을 이끌었습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았던 그들을 보면서 우리들에게도 조금이나마 그들을 닮으려는 마음이 생겼으면 합니다. 독서란 우리의 마음이 커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변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니까요. 이 책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변하고, 세상이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변했으면 하고 바랍니다.
책을 읽다가 저는 뜻밖의 인물을 만났습니다. 그는 바로 소크 박사(Jonas Edward Salk),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성공한 학자였습니다. 소아마비는 1950년대 중반만 해도, 미국에서 해마다 58,000여 명의 환자가 생겨날 정도로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소크 박사가 이런 무서운 병의 백신을 발견했으니 이제 돈을 버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겠지요. 수많은 제약 회사가 특허를 양도하라며 많은 돈을 소크 박사에게 제의했을 테니까요. 그러나 소크 박사는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나는 백신을 특허로 등록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 태양을 특허 신청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인류를 괴롭히던 소아마비를 박멸에 이르게 한 것은 의학 연구 덕분이기도 하지만 소크 박사의 ‘이익을 포기할 줄 아는 마음’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세계 보건 기구에 납품되는 소아마비 백신 1개의 값은 100원 정도에 불과해 누구나 맞을 수 있다고 합니다. 1993년 시사 주간지 <타임>이 소크 박사를 20세기의 100대 인물에 선정한 까닭은 자신의 연구 성과를 인류의 공동 자산으로 함께 나눈 사랑의 정신에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죠.
이익을 보면 옳음을 생각하라는 뜻의 ‘견리사의見利思義’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의 삶을 보세요.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안달하는 모습, 바로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요? 더 많은 것을, 더 빠른 시간 내에, 더 적은 힘을 들이고 생산하겠다는 것이 ‘돈만을 추구하는’ 우리네 삶의 모습은 아닐까요? ‘부자 되기’, ‘성공하기’, 이 두 명제가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세계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집스럽게 ‘옳음의 길’을 간 분들의 삶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익이나 명예를 좇지 않았습니다. 안락함이나 화려함을 추구하지도 않았으며, 남들이 간 길을 가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자신의 길을 갔습니다. 비록 외롭고, 힘겨웠지만 처음 생각한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타인만을 위한 삶을 산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양심과 판단이 시키는 대로 정직한 삶을 살았을 뿐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과 이성에 따라 사람들이 가는 방향과 반대의 길을 가기도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익을 따를 때, 그 반대의 길을 간 소크 박사처럼 말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바보라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분들이 새로운 역사와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닐까요?
연어처럼! 급류를 거슬러 오르는 정신, 바로 그것이 소크 박사의 정신이며, 이 글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위대함입니다. 명예나 이익, 화려함 같은 것은 그들의 관심 속에 있지 않습니다. 성공도 인생의 목표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견리사의의 정신’, 바로 그것이 그들의 삶을 이끌었습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았던 그들을 보면서 우리들에게도 조금이나마 그들을 닮으려는 마음이 생겼으면 합니다. 독서란 우리의 마음이 커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변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니까요. 이 책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변하고, 세상이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변했으면 하고 바랍니다.
나는 어떤 '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밝음, 화려함, 번쩍거림으로부터 한 발작 물러나 있는 사람일뿐이었다. 문명보다는 야만 쪽(이런 이분법이야말로 얼마나 야만적이고 폭력적인가)으로, 중심보다는 변두리 쪽으로, 번쩍거림보다는 그늘이나 어둠 쪽으로 물러나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여러분은 ‘내 친구들은 이런 생각을 도저히 할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한 적이 없나요? 다른 사람에 대해서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들이 나보다 못할 거야.’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죠. 그러나 스스로 열심히 책을 읽고, 혹은 직접 경험을 통해서 남들이 생각하지 않는, 기발하고 탁월한 생각을 한다거나, 남들보다 월등한 논리적인 사고를 가질 수 있다면 여러분은 스스로 대견하다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바로 그런 창의력과 사고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힘, 바로 그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철학은 스스로에 대해서 자존감을 갖도록 만들어 줍니다. (중략)
남들이 뭐라고 나를 평가하는지에 대해서 신경을 곤두세우는 사람은 마음이 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보물이 있어 나 스스로를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은 디오게네스처럼 편안한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철학을 공부한다면, 디오게네스처럼 세상의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는 의연한 마음, 풍성한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 작가의 말에서
인문학의 눈으로 과학을 읽다
많은 구절을 책에서 만났지만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이란 책을 쓴 조르쥬 깡낄렘의 다음 말처럼 저에게 커다란 자극을 준 것도 없습니다.
“철학은 하나의 반성인데, 그 반성의 재료는 철학에게는 낯선 것이 좋으며, 좋은 반성의 재료는 반드시 철학에게 낯설어야 한다.”
조르쥬 깡낄렘의 말을 좀 더 쉽게 이해하자면 철학의 영역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철학의 재료를 발견하자는 이야기죠.
수많은 과학자들은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지극히 추상적인 이해를 이끌어 냅니다. 사과는 익으면 떨어지기 마련이지만 이런 사소한 현상으로부터 뉴턴은 만유인력을 발견했습니다. 또 어떤 과학자는 물에 열기를 가하면 계속 온도가 올라가다가 섭씨 100℃가 되는 순간 액체가 기체로 변하는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양이 계속 증가하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추상적인 이론을 추출하기도 했지요.
과학사나 철학사에 큰 이름을 남긴 이들은 추상적인 영역과 구체적인 영역을 넘나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한 분야에만 눈과 귀가 묶인 사람들이 아니라 과학, 철학, 역사, 사회 등 사물과 인간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폭넓은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었죠.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먹는 것, 입는 것을 살펴보세요. 어느 하나 과학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지요. 과학은 21세기에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국 인간과 밀접한 관계에 놓인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인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떨까요? 과학은 과학자의 몫이고 윤리는 윤리학자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21세기는 과학의 시대라고 일컬을 만큼 과학이 우리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 어느 때보다 막대하고, 과학 기술이 경제, 사회, 문화에 미치는 영향 또한 지대합니다. 이런 시대에 과학을 모르고서는 인간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핵무기와 같은 첨단 무기가 세상에 나왔지만 그것은 과학자들의 잘못이 아니라 과학 기술을 나쁜 곳에 사용한 사람들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장기를 확보하기 위해 인간 배아 복제 연구를 시작한 과학자는 인간 배아 복제가 윤리적으로 타당한지에 대해서 스스로 성찰할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성찰이 없다면 그의 연구는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과학이 순수한 지적 탐구에 머무르지 않고 대중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현실을 볼 때 과학자들은 반드시 윤리학과 같은 인문학적 성찰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며, 인문학자들도 과학에 대해 좀 더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책은 고등학교 국어 수업과 논술 수업을 통해 어떻게 하면 인문학적 명제들을 자연 과학과 접목할 수 있을까, 반대로 과학적 사실을 어떻게 인문학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과학의 눈으로 인문학을 읽기도 하고, 거꾸로 인문학의 눈으로 과학을 읽어 보자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사는 세계를 보다 다채롭고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 교사로서의 저의 생각입니다. 이 책이 독자 여러분의 시각을 조금이나마 넓힐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