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반성의 산물이다. 자신을 타자인 양 바라보며 객관화할 때 소설은 성립되고 세계는 조형된다. 그런데 2000년대의 새로운 소설들은 반성의 세계를 무반성으로 교체하고자 한다. 자기 자신을 가능케 한 문학적 자산을 의도적 거부, 그들은 반성 위에 구축된 기존의 문학을 무반성의 감각으로 전복하려 한다. 반성을 뜻하는 영어 'Reflex'는 물에 비친 스스로의 반영을 바라보는 것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구분과 구별이 없다면 그 세계가 바로 혼돈의 카오스일 테다. 반영물을 볼 수 없는 눈먼 자들, 2000년대 문학이 놓인 형편이 그렇다.
눈을 잃은 오이디푸스의 공간은 오늘날의 소설이 토양으로 삼고 있는 지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눈을 잃은 오이디푸스가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상징적 시체였다면 만성적 종말론에 시달리는 소설 역시 매장당한 산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실존하지만 등록되지 않은 유령처럼 소설은 그렇게 21세기를 관통 중이다. 이는 소설의 위기를 작품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절실히 토로하는 최근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무반성적인 양 우회하지만 실상 그들은 고통스럽게 어두운 우물 속의 문학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평론집을 정리하면서, 초교를 끝내는 그 순간까지도 서문을 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두 번째 평론집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타인, 고통 그리고 연민이다. 정리해 두고 보니, 지난 8년의 시간 동안 매달렸던 게 이 단어에 들어차 있다. 그런데, 막상 타인의 고통에 대해 연민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며 또한 내게 허락된 능력일까라는 의구심과 절망에 빠져 버렸다. 그래서 글을 모아 두고도 서문을 쓰지 못했다. 타인의 고통에 완벽한 공감을 느끼는 것이 연민이라면 과연 나는 타인을 진정으로 연민했던가? 하지만, 다시 한번 프레모 레비의 글을 읽어 본다. 그의 글은 나에게 작은 면죄부를 허락한다. 그의 말처럼 우리가 모든 이의 고통에 괴로워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인간이 아닌 성인일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고통을 함께하려는 그 시도이다. (중략)
비평집의 제목인 ‘타인을 앓다’는 2014년에 《세계의 문학》에 실었던 평론의 제목이기도 하다. 타인을 앓는 것, 문학을 읽는 것과 문학을 하는 것의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타인을 앓는 것, 깊은 공감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 그게 바로 미련하지만 두터운 문학의 길일 것이다. 이해하고자 애쓰는 내가 먼 곳의 다른 고통과 소통하는 초월적 인식의 공간, 그게 바로 문학의 공간이다. - 책머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