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방철학≫의 사드가 옛 귀족정치를 옹호하고 그 체제로 복귀하고자 한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그는 민중의 정치를 믿지 않았던 만큼이나 귀족정치와 왕정의 복귀를 열망하지 않았다. 물론 귀족들의 ‘좋았던 시절’은 분명 사드에게 여전히 노스탤지어로 남아 있다. 그가 ≪규방철학≫의 주인공들을 ‘규방’에 모아두는 것이 정확히 그 이유이다. 18세기에 돈 많고 권세 높은 유한계급들이 누렸던 전원의 프티트 메종과 그곳의 상징적인 관능과 타락의 공간인 규방은 그들의 노쇠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유일한 곳이다. 그들은 더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행동에 나설 능력도 힘도 없는 이들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의 행사는 ‘고작’ 딸을 찾으러 온 독신자篤信者를 무참히 유린하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이 이야기가 잔인해 보이는가? 그의 상상력이 사악해 보이는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사드가 그의 주인공들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위험한 사상과 사악한 심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무기력이다. 그리고 그런 무기력은 바로 사드 자신의 것이다. 달아오른 머리로 폭력을 꿈꾸지만 현실에서는 외국으로 도망가 혁명을 포위하도록 사주하는 형편없는 과거의 특권계층에게 보내는 조롱이자 야유이다.
폭력의 경험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취할 길은 두 가지뿐이다. 도피가 아니면 투항이다. 이 시대 많은 귀족들은 프랑스를 떠나 외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가 로베스피에르의 실각 후, 총재정부 시대에 다시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모리스 르베의 생각을 따라, 혁명 이후 재산도 가족도 귀족의 칭호도 모두 잃은 사드가 살아남기 위해 귀족 성姓을 제거하면서 자신의 출신을 감추고 피크 지부에서 정치활동을 한다면 결국 사드는 프랑스혁명에 투항한 셈이다.
그렇지만 사드의 정치행위와 입장이 혁명에 대한 그의 미온적인 태도를 감추는 위선이었다고 그를 단죄하지 말자. 사드는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식인종들’ 사이로 들어갔고, 그들과 함께 잠시나마 ‘향연’을 즐겼다. 그러나 혁명기에 사드가 취한 입장을 단순히 기회주의로만 볼 수 없다. 오히려 프랑스혁명의 다양한 이념과 전망을 단 한 가지로 환원하고자 했던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와 이후 프랑스혁명의 경향적인 해석에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프랑스혁명은 처음부터 단일한 이념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모든 특권계급이 같은 생각을 가졌던 것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제3계급 역시 단일한 이념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왕국에 다양한 입장들이 존재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귀족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권의 폐지와 구체제의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라파예트가 그 대표적인 예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사드 역시 당대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의 하나를 지지(하고 주저)했으며,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던 당파의 이해를 위해 정치에 뛰어든 프랑스혁명의 여러 인물 중 하나였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디드로는 '말도 하고 귀도 들리'지만 섬세한 아름다움과 심오한 사상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동시대의 숱한 '농아들'에게 진정한 감식안을 가져줄 것을 이 편지를 써서 요청한다. 그러나 맹인에 대한 편지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반면, 농아에 대한 편지에 대한 반응은 트레부지의 서평을 제외하곤 미미했다. 디드로가 거론했던 바퇴조차 이 편지에 대해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 책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디드로가 생각했던 것보다 들을 줄 모르고 말할 줄 모르는 농아들이 너무 많았던 탓이 아니겠는가.
데카르트는 선천적 맹인이 두 개의 지팡이를 교차시켜 마주치는 외부의 대상들을 더듬는 행위를 통해 자기 앞의 대상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촉지하고, 이 경험으로 획득한 지식을 통해 판단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촉각을 통해 일시적으로든 항구적으로든 사용이 제한된 시각 작용이 ‘완전히’ 대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지팡이 하나가 대상에 접촉하면서 발생시킨 자극이 그가 함께 들고 있는 다른 지팡이로 이전되므로, 서로 교차하여 외부 대상을 촉지하고, 그 자극을 지각하는 두 지팡이는 여전히 대상과 감각기관 사이의 기하학적 관계를 전제한다. 데카르트는 빛을 매개로 외부 대상이 우리 눈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망막에 2차원적으로 이미지를 투사하는 과정을 교차된 두 개의 지팡이의 이미지로 나타냈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맹인이 든 지팡이는 외부에서 만나는 대상이, 공기 혹은 투명한 물질을 가로질러 전파되는 빛을 매개로 감각기관에 전달되어 지각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정확한 비유이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가 선천적 맹인들이 ‘손으로 본다’라고 지적한 것은 단순한 비유로 축소될 수 없다. 신체와 영혼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데카르트는 시각 작용의 두 단계를 구분하고 있으며, 외부 대상의 이미지가 우리 눈 가장 깊은 곳인 망막에 맺힐 때, 이 시각 작용은 완전히 기계적인 것으로 시각기관은 그 대상의 이미지를 수용하기는 하지만, 그것과 실제 대상의 입체적인 이미지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 데카르트는 시각기관에 들어온 대상의 이미지를 지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감각기관이 아니라 영혼에 부여한다. 망막에 그려진 입체감을 상실한 평면적인 이미지는 지각 주체의 인지적인 활동을 통해서만 지식의 대상이 된다. 데카르트가 이해하는 시각 작용에는 외부 대상의 이미지가 동공을 통해 망막에 수용되도록 하는 물질적인 눈目 외에도, 그 이미지를 알아차리고, 판단하고, 재구성하는 다른 눈이 있는 것이다. 파올로 퀸틸리의 표현에 의하면 이는 “두뇌 속의 다른 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에게 시각 작용은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두 과정의 결합을 전제한다. 또한 이렇게 외부 대상의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신체적인 시각 작용은 망막에 투사된 이미지의 기계적인 자극에 불과하므로 결국 우리는 빛과 시각기관의 유무와는 무관하게 이 단계의 시각 작용에서 외부 대상을 볼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에게 ‘본다’는 행위는 신체의 감각기관에 투사된 이미지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획득된 감각 정보가 두뇌에서 해석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인간이 대상과 실제적으로 아무런 공통점을 갖지 않는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기호를 사용하여 관념을 전달하고 교환하는 것을 관습적인 설정이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연 혹은 신이 우리의 두뇌와 그 속에 자리를 둔 영혼이 외부 대상을 일종의 기호의 교환과 해독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끔 마련했다고 보며, 이를 자연의 설정이라고 했다. ―<옮긴이 해제>에서
어떤 시인과 화가는 재능을 팔아 평범한 감식안을 가진 사람이나 구스를 법한 작품들을 양산하여 돈을 벌고 명예를 얻는다. 예술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 작품들의 평범함을 역겨워하겠지만 사실 대중들에게 선호되는 예술가들은 바로 그들이다. 반면 어떤 예술가는 인간과 자연을 깊이 연구하고, 자신의 작품에 완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오래도록 고된 작업을 하기도 한다. 그는 공정하고 편견 없는 독자에게 찬사를 얻겠지만 그런 독자는 수가 적고, 그 예술가의 작업에 값하는 보상을 해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평범한 다수의 취향을 승인할 것인가, 공정한 소수의 감식안을 승인할 것인가? 디드로는 손쉽게 재능을 팔아 부와 명성을 쌓은 예술가들에게 언제나 예리한 분석과 준엄한 비판을 가했으며, 반대로 성실하고 진지하고 근면하게 작업했던 예술가에게는 그들이 성취한 아름다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보여줌으로써 가장 명예로운 보상을 받게끔 노력했다. 예술가들이 추구해야 할 ‘완전성’과 ‘독립성’을 ‘관계들의 지각’이라는 개념으로 풀고자 노력하면서 디드로는 그들이 성취한 높은 수준의 아름다움을 언젠가 모든 사람이 이해하고 향유할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리고 또 이를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17세기 아카데미에서 논의된 이 오랜 논쟁은 이상적인 선線과 변화무쌍한 색色 중 어떤 부분이 회화의 핵심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라파엘로의 선인가 루벤스의 색인가? 이 문제는 이성이냐 정념이냐, 규칙이냐 파격이냐, 이상이냐 형식이냐, 관념이냐 이미지이냐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발자크는 서평에서 이 회화의 논쟁을 ‘관념문학’과 ‘이미지문학’의 대립을 설명하기 위해 차용했다. 발자크가 보기에 스탕달은 두말할 것 없이 데생주의자이다. 스탕달에게는 모든 것이 명확하며, 변화무쌍한 색채의 변화는 들어설 여지가 없다. 스탕달은 이탈리아의 정신을 가진 것이다. 이탈리아의 풍광에서 수직으로 내리쬐는 태양은 모든 것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으니 색채의 변화는 의미가 없다. 그저 널찍한 붓으로 과감히 터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수시로 변하는 빛과 유동하는 대기에 따라 사물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에서 윤곽은 흐릿해질 수밖에 없으며, 화가는 좁은 붓으로 그 미세한 변화를 섬세히 그려내야 한다. 발자크의 세계에서 그가 창조한 인물들은 처음에는 명확하게 보였던 이상이 점차 추악하게 무너져내려가는 것을 지켜본다. 그러나 스탕달의 인물들은 흐릿한 윤곽으로 시작했어도 점차 뚜렷해지면서 마지막에는 더없이 투명해진다. 이런 차이가 동시대의 두 대가를 서로 다른 문학의 길로 가게 했던 것이리라.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1부로 끝낼 수도 있었다. 자연 상태에는 불평등이 없었으며, 불평등을 확립한 것은 바로 사회임을 웅변하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루소는 1부에서 독자들을 가공의 자연 상태에 흠뻑 취하게 만든 뒤, 2부에서 자연 상태를 벗어난 인간의 ‘파국’을 그려낸다. 그러면서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각각 자연 상태와 사회의 설립을 다룬 1부와 2부를 이어주는 전환점으로 ‘소유권’을 제시한다. 소유권이 확립되면서 자연 상태의 강자와 약자의 경쟁을 사회의 부자의 빈자에 대한 억압으로 변화시킨다. 루소는 자연 상태의 인간이 신체적인 불평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태어나면서부터 힘이 센 사람이 있고, 키가 큰 사람이 있고, 빨리 달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루소가 일관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사회를 강자와 약자들의 경쟁에서 최강자가 승리를 거두고 약자들이 그에게 복종하게 된 결과로 보는 입장이다. 설령 약자들이 강자와의 경쟁에서 밀려났대도, 그들은 강자에게 복종하며 살아가느니 차라리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다른 곳에 거처를 마련하면 그만이다. 그 뒤에 그들은 평생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최강자의 힘이 대단히 커서 약자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예처럼 부릴지라도 약자들은 차라리 배를 곯을진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최강자의 지배를 ‘역사적 사실들’로부터 취한 사회이론이 오류인 것은 사회 성립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원인을 사회 구성의 실질적 토대로 간주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소유권이 확립되었을 때 결정적으로 강자와 약자의 대립은 부자와 빈자의 대립으로 바뀐다. 자연 상태에서 약자는 강자를 피하면 그만이었지만 사회 상태에서 빈자는 부자에 종속되지 않을 수 없다. 자연 상태에서는 약자라도 자연이 제공한 풍부한 양식을 어디서나 누릴 수 있지만, 사회에서 빈자는 더 많은 노동을 강요받으면서 더 적은 보상만을 누리며 평생을 살아가야 할 처지가 된다. 루소는 이제 자유와 자족의 상태가 어떻게 예속과 종속의 상태로 타락하는지, 그리고 그 파국적인 결과는 무엇인지 극적으로 그려낸다. 루소가 1부에서 자연 상태를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기 직전이 아니라, 인류의 기원을 향해, 역사 이전의 공간으로 멀리 올려 보냈던 이유가 여기 있다. 이 두 상태가 멀수록 그만큼 독자가 느끼는 파국과 전락의 충격은 더욱 커질 테니 말이다.
그의 주저 <영혼론>과 <인간기계론>에서 라 메트리가 공격하는 주요 주제는 바로 영혼이다. 그리고 그는 신체와 영혼을 구분하면서 이들 각각에게 연장과 사유라는 속성을 부여한 데카르트의 체계를 문제 삼는다. 수동적인 물질을 운동하게 만드는 물질과는 완전히 다른 속성을 가진 어떤 실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도대체 우리 몸속 어디에 존재하는가? 이 문제는 서구 철학사 및 의학사에서 언제나 논쟁적인 것이었다. 라 메트리는 영혼의 자리를 송과선(松科腺, la glande pineale)에 두었던 데카르트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영혼론>에서 “데카르트의 주장에 따르면 신체와 영혼은 완전히 상반된 두 개의 본성을 갖는데, 신체는 운동만 가능하고 영혼은 지식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영혼이 신체에 작용하는 것도, 신체가 영혼에 작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신체가 움직인다고 가정해보자. 영혼은 그 운동을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 영혼이 사유한다고 가정해보자. 신체는 운동만을 따르므로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고 쓰면서 상이한 속성을 가진 두 실체가 있다면 이들은 서로 고립되어 있을 뿐 상호 작용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이러한 비판이 라 메트리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다. <성찰>의 여섯 번째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신체는 본성상 가분적이고 정신은 전적으로 불가분하다는 점에서 정신과 신체 사이에는 대단히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전제한 뒤, “정신이 신체의 모든 부분의 자극을 즉각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뇌로부터, 혹은 뇌의 가장 작은 부분 중 하나의 자극을 받”는다고 본다. 여기서 데카르트가 말하는 뇌의 가장 작은 부분은 둘로 나뉜 좌뇌와 우뇌 사이에 존재하는 송과선이라는 아주 작은 샘(腺)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데카르트의 동시대 철학자였던 가상디는 데카르트의 송과선이 아무리 작더라도 그것은 결국 연장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가상디는 연장을 갖지 않는 영혼을 전제하는 데카르트의 체계에서 설령 이 송과선을 “수학적인 점”으로 생각한대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본다. (……) 라 메트리가 데카르트의 신체와 영혼의 결합 문제와 신체 내부에 존재하는 영혼의 자리 문제를 반박할 때 그는 바로 이런 가상디의 비판을 그대로 따르는 것 같다. “영혼의 자리가 어떤 연장을 갖는다면” 영혼은 “신체라는 다른 거대한 연장과 즉각적으로 맞닿아 있으므로 어떻건 연장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제 “영혼이 물질이 아니기에 신체에 영향을 미칠 수 없거나, 영혼은 신체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접촉하고 움직이므로 사실상 물질인 것”이라는 양자택일의 선택만 남는다. -<옮긴이 해제>에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지배적인 생명 발생 이론이었던 전성설에서는 모든 생명체가 이미 형성을 완전히 끝낸 채 아버지든 어머니든 한쪽의 난 속에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고치를 갈라보았을 때 그 안에 앞으로 나비가 될 곤충이 들어 있고, 한 알의 사과 속에 나중에 사과나무로 자라날 사과 씨가 들어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더욱이 이러한 가설은 당대 기계론과 결합해 한 알의 사과 씨에는 미래에 자라날 사과나무와 그 나무에서 열릴 사과가 완전히 형성을 마친 채 들어 있고, 그렇게 미래에 열리게 될 사과에는 다시 다음 세대에 자라날 사과나무와 그 나무에서 열릴 사과가 마찬가지로 들어 있는 등, 이런 식으로 무한히 계속된다는 입장으로 발전되었다. 하지만 18세기에 실험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전성설은 낡고 부조리한 가설이 되었다.
더욱이 전성설이 갖는 또 다른 문제는 이렇게 형성을 마친 존재는 결국 부모 한쪽에 들어 있다고 주장하므로, 아이가 부모 양쪽의 특징을 모두 갖고 태어나거나, 부모 양쪽을 모두 닮지 않고 태어나는 ‘괴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모페르튀가 자신의 저작에서 기존의 모든 생식이론을 두루 살피면서 하비의 실험을 경유하여 새로운 생식이론을 제시하고자 한 까닭이 여기 있다. 이미 모든 개체가 부모 중 한쪽에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부모 양쪽이 공동으로 개체 발생에 참여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인 설명이 아닐까? 남성과 여성은 각자 미래의 개체를 형성하는 데 쓰이는 ‘생식액체’를 분비하고, 이 두 액체에는 미래의 개체의 각 신체 부위를 형성하게 될 요소들이 들어 있다. “정액마다 심장, 머리, 내장, 팔, 다리를 만들도록 된 부분들이 있으며, 이들 부분들은 동물의 몸을 형성할 때 다른 부분보다 이웃하게 되는 부분과 훨씬 더 큰 관계를 가질 것이다.”(101쪽) 이 부분들의 관계의 강도에 따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정액에서 팔이 형성될 부분은 항상 가장 결합력이 강할 것이므로 서로 결합하여 이후에 팔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모페르튀는 “아이가 아버지와 어미를 모두 닮는다는 사실, 상이한 두 종의 결합으로 복합적인 특징을 갖고 태어나는 동물, 과잉의 괴물과 결여의 괴물을 설명”(105쪽)했다. 이런 점에서 모페르튀는 현대의 발생학, 유전이론, 돌연변이, 기형학의 선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현대적 의미의 생물학이 아직 시작되지 않은 18세기 중반에 그가 과감하게 내놓은 성찰은 즉시 뷔퐁과 디드로를 비롯한 당대 진보적인 학자와 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과학과 신앙의 행복한 결합을 꿈꿨던 이 시대의 전성설이 모페르튀가 ≪자연의 비너스≫를 내놓은 후에 몰락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은 현대적 의미의 생명과 유전 이론의 시작을 알리는 근대의 최초의 저작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분명 18세기는 괴물의 존재를 부정하는 시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전에 알려진 괴물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강변하는 시대였다. 그렇지만 동시에 18세기만큼 괴물의 본질, 형태, 패턴에 대해서 열렬한 논의가 벌어진 세기도 없다는 점을 기억하자. 다른 의미로 18세기 지식인들에게 괴물은 마치 강박관념처럼 존재하는 것 같다. 한쪽은 늘 괴물에 대해 말하고 다른 한쪽은 괴물에 대한 언급을 애써 피하고자 한다. -(<자연의 위반에서 자연의 유희로>, 346쪽)
…… 18세기 내내 관찰하고 해부하고 분류했던 괴물들이 이제 일부는 해부학의 대상으로, 일부는 발생학의 대상으로, 또 일부는 정신현상을 다루는 과학의 대상으로 흡수되었다. 과거에 괴물이 자연의 위반으로 규정되어 자연 속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했다면, 이제는 자연 속에 간혹 등장하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사건으로 간주되었으니 지식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렇게 추방된 존재들은 일몰의 세상이 되면 끊임없이 경계를 넘어 우리 안으로 밀려들어 온다. 18세기 말, 고야의 판화 제목처럼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나는” 것이다. -(<자연의 위반에서 자연의 유희로>, 3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