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낮에 넘어졌던 자리가 어떤 문장을 쓰게 되리라는 예감 같은 것이었음을 밤이 되기 전에 알아차립니다. 무엇을 발아래 두고 무엇을 나무 위로 날려 보내야 할지가 완전히 뒤바뀌기도 합니다.
아홉 편의 소설을 다 읽고 났을 때 믿는다는 것, 아름다움에 관한 소망이 이야기 밑에서 변주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뭔가 불안하기도 한 그 느낌은 인물들의 맥박이기도 합니다. 생명, 뛰는 것. 그러니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자신의 좋은 점을 잃지 않으려는 분들께 이 소설이 가닿기를 바랍니다. 땀과 눈물, 그리고 사치와 고요가 우리와 함께하기를.
한 권의 책이 나오기까지 생각과 뜻, 상상을 나누었던 분들께 고맙습니다. 작품 속에 간간이 음악을 명시해두었어요. 단편 하나를 막 읽고 난 후, “그래, 이 곡을 들으며 뭘 좀 먹어야겠네” 하는 미지의 누군가를 떠올려봅니다.
P.S. 사람들이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요.
2020년 여름
사랑하고 질문하는 마음을 담아
아이러니, 보인 것과 보이지 않은 것,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진짜 눈물과 웃음과 거짓말 들. 나는 그런 것들에 마음을 뺏기며 다른 것들과 더불어 소설로 들어간다.
일곱 편의 단편소설 중 「제니」와 「연애소설」은 오감을 열고 달리듯 썼다. 쓰던 때의 내 맥박이 느껴진다.「B캠」과 「아마도 악마가」는 주변의 공기를 느끼며 산책하듯이 썼다. 「B캠」은 영화촬영 현장에서 그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담는 작업을 하면서 영감을 받았다. 「아마도 악마가」는 을지로입구께의 조그만 사무 공간에서 작업했는데, 쓰는 동안 에릭 사티의 음악을 반복해 들었다. 바깥은 며칠 내내 시위현장이었다.「의식」과 「시네마」는 예민한 인물들과의 짧은 동행 같았다. 「의식」은 십대 소녀들의 관계를 조금씩 다른 각도, 다른 틈새에서 보면서 이야기를 진전시켜보려 했다. 「시네마」는 캐릭터의 윤곽을 그려놓고 하루 날을 정해 카메라를 들고 명동을 걸어다닌 게 시작이었다. 한날, 한시각, 같은 길을 오갔을 다른 사람들, 새로 들어서고 또 사라지는 것들의 자취를 눈으로, 언어로 만져볼 수 있을까?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정말 거기 앉아 있기라도 하듯 내가 올려다보았던 한 건물의 삼층 창문이 생각난다.「파티 피플」에는 잘 안 풀리는 생활, 꾸역꾸역 이어지는 날들, 약간 엉뚱한 인물의 심상과 연상 들이 자아내는 연탄곡처럼, 이라고 적어본다.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과 함께 바람 불어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어보고픈 마음으로 끝맺었다.
2012년 봄부터 2013년 초여름 사이에 만난 석관동의 젊은 친구들에게 마음을 전한다. 재연이 불가능한 삶의 어떤 아름다움들에 슬프고 또 기뻐진다.
2013년 여름
무언가에 간절해진다는 건 결핍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해서 상처 입기 딱 좋은 상태인데, 만일 생에 단 한 순간만을 선택해 살아내야 한다면 저는 그런 찰나에 가 서 있을 겁니다. 이 욕망에 부합하는, 되도록 발음하기 까다롭고 긴 단어가 내가 모르는 세상에 존재하기를 바랍니다. 어디에서든 어떤 사람들은 분명하게 서로를 알아보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