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흘러가서 현재일 수도 없는 시간. 이 돌작밭 어딘가에 흘리고 다녔을 유년의 조각들이 무덤덤하고 밋밋한 기억 사이로 떠올랐다. 나에게 독박골은 가슴 깊숙이 박혀있는 유리조각이었다. 성장이 배양되다 말라버린 계절처럼 초라했고 가련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파편은 숨을 쉴 때마다 가시처럼 폐부를 찔렀다. 나는 가슴 어디엔가 깊이 박혀있던 추억의 편린들을 더듬더듬 꺼내며 독박골에, 지금 서 있다. 돌아온 것이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곳으로.
그리고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미주 땅에서 120년이나 넘게 살아온 한인들의 흔적에 대해 아동용 책이 없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정작 어른들도 선조들이 미국 땅에 어떤 경로로 오게 되었는지 잘 모르는데 말이다. 뿌리교육을 강조하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눈높이는 생각하지 않고 도산 안창호 선생 생일을 기념하고 순국선열에 대한 예의를 강조한다? 모순이라고 여겼다.
나는 예전에 만들어놓은 그림책이 있음을 떠올렸다. <하늘에 별을 묻다>을 집필하던 중 인천 월미도에 있는 ‘한국이민사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곳에서 보았던 자료들과 박물관에서 틀어주었던 육성녹음을 토대로 <순득이네>를 완성하게 되었다.
한글을 겨우 읽는 아이들이니 독립운동이니 하는 역사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한글을 배우는 아이들은 관념적인 단어로 이루어진 교과서 내용 때문에 한글에 대한 흥미를 잃고 고학년이 되면 한글을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게 현지 실정이다. 물론 한국 역사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일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밟고 사는 땅에서 선조들이 어떤 족적을 남기고 살았는지 되짚어보는 이민사에 대한 공부도 중요하다고 본다. 정체성은 타국에서 어떤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로 이민 역사를 들려주는 <순득이네>를 출간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제 2편, 3편도 기대하면서.
그해 초겨울, 나는 태어났다. 그리고 몇 년 후 진급마저 실패한 아버지는 군복을 벗어야 했다. 손가락을 빨며 충족되지 않은 사랑을 반항으로 갈구했던 내가 아버지의 허름한 인생을 돌아보게 됐던 건 문학 때문이었다. 내가 아버지의 발목을 잡았을 수도 있겠다는 비약을 품게 됐던 것도 소설을 쓰고 나서였다. 외할아버지가 혁명군에 가담하지 못 하게 말렸다는데, 혁명군에 가담하지 않았던 것은 결국 아버지 스스로의 선택이었을 거라 여긴다. 아버지가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구차한 청탁을 넣지 않았다는 건 선택의 선을 분명히 그었다는 의미였기에. 사선을 넘나드는 전쟁의 포탄 속에서 살아남은 참전용사의 고민이 개인의 영욕이 아니었다는 걸 진즉에 알았더라면 아버지를 그토록 원망하지 않았을 텐데. 나는 오늘도 글을 쓰면서 참회의 향불을 피운다.
세계가 경탄했던 ‘촛불집회’를 떠올렸다. 추운 날씨를 마다하지 않고 광장에 모여 들어 촛불을 들었던 군중들은 각자의 삶의 무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도덕선생처럼 절제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힐끔힐끔 신호를 위반하기도 하고 슬쩍 수완을 부려가며 태연하게 살아갔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내던 촛불집회에 운집한 비폭력 저항은 얼마나 아름답던가. LA에 거주하는 나는 촛불시위에 직접 참여할 수가 없어 겹겹이 내뿜는 사람들의 열기는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인터넷에 올려진 사진만 봐도 그 불빛은 어느 예술품보다 뭉클했고 힘이 느껴졌다.
촛불 하나 켰을 뿐인데.
사람들은 불의한 세상에서 꾸역꾸역 살아간다. 불의를 묵인하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삶이 팍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자는 착각한다. 잠자코 살아가는 서민들이 힘이 없는 줄, 밟아도 외치지 못하는 줄 오해하는 것이다. 불의가 거세되지 않는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희망은 어떤 것일까? 소리를 내는 것이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였던 포스트잇에 적힌 그 글귀가 힘없는 이들의 외침이고 그 문자가 결국은, 세상을 바꾸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