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외동포 신분이라 그 덕분에 강 건너 불구경하듯 먼 조국을 바깥에서 지켜보고 있지만, 정말 속에서 가래가 끓도록 내 ‘마더 컨트리’가 싫어졌다. 아니, 그곳에서 기생하는 이른바 기득권이라 불리는 사회 지도층, 특히 정치꾼들의 처세는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해서, 어느 날 갑자기 동네 신문에 매주 끼적이던 꼴 난 ‘시사 칼럼’도 스스로 접어 버리고 다시 내 ‘본업’으로 눈을 돌렸다.
노래를 부르세요… 아내가 말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엄습한 이른바 중풍(中風)… 누구든 당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 일이 ‘나’에게 닥치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느 날 불시에 내 앞에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억장이 무너지지요.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당하면 대개 그 순서가 있다고 합니다. 처음엔 기막히고, 좌절하고, 회한과 절망 속에 분노하다가 그 단계가 지나야 비로소 현실을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혹은 종교에 귀의하거나 스스로 마음을 다스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그 절망과 좌절과 분노의 단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대개 생生을 마감한다고도 하지요.
좌절해 있던 어느 날, 당시 잠깐 서울에 돌아갔던 아내가 전화를 하였습니다.
―그냥 살기가 버겁고 귀치가 않네. 끝내버릴까…
어쩔 수 없이 혼자서 투병생활을 하며, 시시로 엄습하는 외롭고 막막한 심정을 독백처럼 내뱉으며 그녀에게 투덜거렸습니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녀가 약간은 물기 젖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노래를 한번 불러보세요. 거울을 보고… 노래를 부르세요!
―노래…?
송수화기를 끄고 혼자서 중얼거리며 거울 앞에 서 보았습니다. 아직도 비틀어졌던 입술의 흔적이 남아있어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만, 그냥 무시한 채 그녀가 말한 것처럼 정말로 노래를 불러 보았습니다. 조그만 목소리로.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공연히 쑥스럽기가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내가 곧잘 18번처럼 부르던 노래가 도무지 음정 박자는 물론 발음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는 참담함이었습니다.
―당연하죠! 입 다물고 말 안 하고 있으니까 신경이 무뎌지는 게…. 그러니까 노래를 하라구요. 지루하면 책을 읽거나 시 낭송도 해보고… 그것도 아주 큰 소리로요. 뭐가 부끄러워요?
다음날 다시 통화를 하면서 내 반응을 응석처럼 웅얼거리자, 아내는 여느 와는 달리 꾸짖듯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침, 딸애가 직장엘 나가면 적막강산이 되는 아파트 거실에서 나는 혼자서 ‘맹구’처럼 거울을 마주한 채 노래를 불렀습니다. ‘망부석‘도 부르고 ‘꿈에 본 내 고향’도 부르고 더하여 군가나 학창 시절의 학교 응원가도 부르고… 곡이 쉽고 가사가 까다롭지 않은 노래는 생각나는 대로 모두 불러 보았습니다. 그러나 혼자만의 리사이틀은 오래가지가 않습니다. 금방 싫증이 일며 불과 십여 분을 버티지 못하고 거울 앞에서 물러서고 맙니다. . 그냥 머릿속엔 잡생각만 가득하고 생각과 행동이 달라 집중력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 시간을 못 채우고 소파에 퍼질고 앉으면 한동안은 그저 멍하니 창밖만 내다보았습니다. 3층 베란다까지 치솟아 가지를 뻗친 나무 이파리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흐드러졌던 초록이 누렇게 바래져가는 마지막 몸부림이 망막으로 스며들면, 그 처연한 모습들은 지난날의 후회와 회한으로 가득 찹니다.
그것은 내 빈 가슴을 후비며 혼자만의 알 수 없는 억울함에 공연히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순간 뭔가의 절규가 귀청을 때렸습니다.
―될 수만 있다면,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지금이라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비록 내 여생이 길지 않다 하더라도, 꼭 그만큼 일지언정 후회 없고 회한이 남지 않을 인생을 다시 한 번 살았으면 좋겠다는 목소리였습니다.
그리고 생소했던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한 손으로 토닥거리며 잃었던 언어의 ‘새’를 다시 잡기 위해 머리에 쌓였던 녹을 닦고 못다 불렀던 마음속의 피리를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는 누군가 내 피리 소리를 듣고 조금씩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아, 나는 지난날처럼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에 다시 한 번 멍석을 깔았습니다.
자빠지고 딱 십 년이 넘어가는 이월에 내 부르지 못했던 노래를 다시 한 번 새로이 다듬어 보았습니다. 그동안 무조건 날 지켜준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꾸준하게 변함없는 우정을 보내준 ‘동무’들과 국내외 모든 좋은 분들께 이 책을 바칩니다. 특히 근간 심장 수술을 하다가 반신이 마비되어 혹 실의에 빠져있을 한 고교 아우님의 쾌유를 위해 이 글이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2021년 봄, 손용상
원래 소설 쪽에서 등단했던 내가 명색이 두 번째의 시집을 낸다.
첫 번째였던 ‘꿈을 담은 사진첩’은 시집이라기보다는 그냥 내 개인적 문집이라 함이 마땅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건강이 상하고 난 직후라 왠지 삶이 초조해서 죽기 전에 나랑 내 가족들의 흔적이라도 남겨둘 생각으로, 작품을 제대로 선별하지도 않고 그냥 있는 대로 마구잡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이책보다는 소장한다는 뜻에서 전자책으로 출간했다. 나중 보니 몹시 부끄러웠다. 행여 누가 들춰보기라도 할까 봐 마음이 영 불편했다.
생각다 못해 다시 韻文에 손을 댔다. 누가 제대로 읽어주려나 걱정도 들었지만, 다행히 내 시와 시조들이 재외동포재단과 국내 두어 개 계간잡지에서 현상 공모에서 어쩌다 우수작으로 선정되는 바람에 그나마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소심한 탓일 것이다. 보통 글 쓰는 사람들은 散文이나 韻文이나 겁(?)도 없이 달려드는데... 그래도 뭔가 검증이 없으면 시쳇말로 ‘쪽’ 팔릴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 많이 망설였다.
어쨌건, 시집을 한 권 더 낸다. 시집이라고 하기보다는 다시 ‘손용상 운문집韻文集’으로 명명命名했다. 그동안 나름대로 끼적였던 한 100여 편 중에서 자유시와 시조 60여 편을 골랐다. 그리고 이미 경지에 든 윤석산 시인께 감수(?)를 청하고 외람되게 내 작품에 대한 가감 없는 품평까지도 부탁했다. 속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감사할 따름이다. 아울러 서울과 포항의 잊지 못할 벗들과 내 가족들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출판을 도와주신 <도서출판 도훈> 대표께 깊이 감사드린다.
2018년 2월
10년 전 風으로 자빠지고 지난 세월을 죽기 살기로 버텼다, 팽개쳐두었던 창고 속의 소재들을 하나씩 다시 일깨워 이번에 19권 째의 소설집을 마무리 했다.
그래도 어째, 아직 성에 안찬다. 다시금, 내가 지난 시절 얼마나 허황하게 살며 딴 짓을 했었는지, 왜 좀 더 진작 맘을 고쳐먹지 않았는지… 새삼 후회감이 엄습한다. 내 아내에게도 미안하고. 하지만 언제 떠날지는 모르겠으나, 앞으로 살아있는 동안은 얘기 보따리 한 두어 개쯤은 좀 더 풀어놓고 가고 싶다. 욕심이 과한 것일까?
2019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