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에 제1판, 2004년에 제2판을 발간한지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전면개정판을 발간하게 되었다. 그 동안 졸저의 문제제기가 학계에서도 많이 수용되었고, 2012년 형법개정으로 강간죄의 객체가 ‘사람’으로 바뀌어 ‘성중립적’(性中立的) 형식을 갖추게 되고 2013년 대법원이 ‘아내 강간’을 인정하는 등 입법부과 사법부에서의 변화도 있었다. 그 동안 이와 같은 변화한 상황에 대하여 개별 논문을 발표하거나 단상을 정리해두었으나, 다른 연구작업을 진행하느라 전면개정판 발간 자체는 미루고 있었다. 게다가 2017년 5월 11일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면서 연구 활동을 전면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2006년 미국 민권운동가 타라나 버크(Tarana Burke)가 최초로 제창한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이 2017년 미국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되고, 2018년 한국에서도 전개되는 양상을 접하면서 전면개정판을 발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미투 운동’은 성폭력은 단지 ‘성욕’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피해자의 고통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쉽게 사라지거나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 성폭력 가해자의 보다 엄격한 처벌과 피해자의 보다 철저한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 법조계?언론계는 물론 일반 시민들도 성적 자기결정권 및 이에 대한 침탈인 성폭력에 대하여 자신의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것 등에 대하여 상당한 대중적 공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사항은 제1판에서부터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했던 것이었다.
전면개정판은 저자의 원래 입장을 유지하면서, 제2판 이후 이루어진 긍정적 변화와 여전한 한계를 분석?평가하여 제1, 2장을 전면 수정하였다. 2003년 이 책을 처음 발간하였을 때 비하면, 학계와 실무계에서 많은 긍정적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그리고 제1-2판 이후 발표했던 위계?위력에 의한 미성년자 간음죄와 미성년자 의제강간죄 최저연령 상향 문제에 관한 글을 추가하였다. 이 두 죄의 경우 논의의 핵심은 ‘성편향’의 문제라기보다는 미성년자의 ‘성보호’의 취약성 문제이지만, 연관성이 있는 사안이기에 이 책에 수록하기로 하였다.
한편 제1판 발간 당시에도 여성계 일각에서 요청했고, 최근 ‘미투 운동’ 과정에서 더 강하게 제기되었던 ‘(폭행?협박?위력 없는) 비동의간음죄’ 신설론,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론, 성폭력피해자에 대한 무고죄 적용금지론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저자는 이 주장의 문제의식에는 공감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그대로 형법에 반영된다면 다른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여성주의 운동은 성폭력범죄와의 투쟁을 벌이면서 ‘비동의간음죄’ 신설 등 형사실체법적 주제에 집중하고 있다. 투쟁의 요구사항으로 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사법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 투쟁이 수사와 재판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려면, 이 책 제2장에서 검토하는 형사절차법적 개혁이 더 실효적이라고 판단한다. 예컨대, ‘비동의간음죄’가 신설되더라도 ‘비동의’ 여부는 형사절차 속에서 ‘입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성운동 단체와 여성학계가 저자의 논변(論辨)을 찬찬히 검토해주길 희망한다.
전면개정판의 최종교열이 이루어지고 있던 시점,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형법 제303조 피보호감독 성인 대상 위력간음죄 혐의에 대하여 제1심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형법 제297조의 강간죄, 제302조 미성년자 대상 위력간음죄와 달리, 제303조는 그간 법적?사회적으로 본격적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조문이다. 제1심 무죄판결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에서 ‘비동의간음죄’ 신설론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한 법원의 최종 판단은 남아 있기에 이 판결에 대해서는 제1장 제5.에서 소략하게 검토하는 데 그쳤다. 이후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 전체적 조명과 분석을 할 것임을 약속한다.
제2판에 수록되었던 간통죄, 성매매, 포르노그래피 관련 논문은 졸저 『절제의 형법학』(박영사, 2014)의 취지에 더 부합한다고 판단하여 이에 포함시켰으므로, 전면개정판에서는 삭제하였다. 즉, 제1판의 구성체계로 돌아간 것이다. ‘형법의 도덕화’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경향임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된 후 숨 가쁘게 달려왔다. 형사법 관련 연구 등 학자로서의 일을 수행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했다. 다행히 청와대로 들어오기 전 발표해둔 논문과 미발표 초고 등이 있었기에 주말에 짬을 내어 재정리하여 전면개정판을 마무리하였다. 겸허한 마음으로 학계, 법조계, 입법부에서 저자의 해석론과 입법론을 검토해주시길 기대한다.
이 자리를 빌려, 언제나 혼신을 다하여 업무를 수행하고 민정수석실 직원들과, 내가 민정수석으로 임무를 수행하는데 음양으로 도움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소중한 벗에게 감사를 표한다. 금쪽같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흔쾌히 표지의 저자사진을 제공해주신 ‘뉴시스’의 전신 기자님께도 감사를 표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주장은 저자가 ‘학자’로서 제기하는 것이지, ‘민정수석’으로 제기하는 것은 아님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