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초여름, 애리애리한 여대생이 할머니들이 모인 숲에서 공책을 펴 들고 무가를 받아 적었을 거였다. 그 후, 꼬박 사십오 년 넘게 단오 터를 지키게 되리라는 걸 여대생은 꿈에도 몰랐을 거였고.
이듬해 일곱 살의 나는 막걸리 주전자를 든 할머니를 따라 땡볕에 앉아 굿을 봤다. 흰 저고리, 치마, 무복에 수건 하나 들고 굿을 하던 무당. 이야기도 아니고 노래도 아닌, 가만히 읊조리던 무가 소리. 그 강렬했던 초여름의 기억이 드문드문 나를 굿당으로, 그녀에게 닿게 했다.
세기말, 1999년. 나는 ‘꿈해몽사전’이라 제목부터 적어 놓은 녹색 공책을 들고 굿당을 들락거렸고 그녀, 황루시 교수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늘 거기 있었다. 단오굿뿐만 아니라 강문, 울진, 기장, 제주, 남산 국악당, 어디든 굿판이 벌어지는 곳에 그녀가 있었다.
어떤 시간에는 밀착해 바짝 쓴 적도 있었다. 나는 늘 쓰는 것만 즐겼다. 어느 순간부터는 쓰고 난 후 발표, 출간, 평에는 별 흥미가 없어졌다. 그렇다고 어느 한 계절 소설을 쓰지 않은 적이 없었다. 늘 소설과 간격을 유지하며 꾸준히 읽고 썼다. 그리고 서랍에 던져두었다.
그걸 ‘걷는사람’이 끄집어내 반듯한 책으로 만들었다.
나는 내가 쓴 소설을 예술이라 여긴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 굿, 우리 무당, 특히 세습 무당이 굿을 이어 가는 방식은 황홀할 정도로 예술적이다. 나는 험난한 삶을 견뎌 온 그들의 얘기를 잘 쓰고 싶었다. 내 문장이 부족해 부끄러웠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는 당신이 소녀 ‘소리’를 통해 세습 무당의 예술적인 삶을 조금이라도 경험하길 욕심부려 본다.
2023년 초여름
가끔 할머니는 딸 아홉 중 일곱째인 나를 바리라고 불렀는데 그 소리가 듣기 싫었다. 실제로 나는 열아홉 살까지 자매들과 다른 피가 섞였을 것이라 여겼고 증거를 찾아 내려 했고, 예민하게 구느라 밤잠을 못 잤다. 잠이 부족해 낮에는 늘 까칠했다.
어느 결에 바리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일고여덟 살의 나와 바리가 만나 철길 앞에 앉았다. 공단 지역, 차이나타운, 양키시장, 화평동을 쏘다녔다. 더 이상 다닐 곳이 없고 몸에 물이 차오르듯 바리가 내 속에 꽉 들어찼다. 그래서 나는 바리를 끄집어 낼 수밖에 없었다. 일단 꺼내기 시작하자 막힘이 없었고 쓰는 내내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