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수는 그저 우리의 이웃일 뿐입니다. 더 이상 하나의 색깔과 하나의 생각만 소통하는 것이 아닌 여러 가지 색깔과 여러 가지 생각이 함께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친구일 뿐입니다.
저는 깜수가 더 이상 별다른 친구가 아니길 바랍니다.
다문화 가정이라는 말조차도 아예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날이 올 때, 우리의 아이들은 보다 더 넓은 이해심과 배려의 마음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경쟁보다는 협력을, 이기심보다는 이타심을 먼저 가슴에 품는 아이들로 성장하길 간절히 바라는 심정으로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 깜수를 조심스럽게 내어놓습니다.
모쪼록 깜수 이야기가 우리 아이들에게 편견과 경쟁이 아닌 협력과 서로 이해하는 마음을 갖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거듭 밝힙니다.
가정으로 복귀하는 청소년이 그러지 못하는 청소년보다 의식 수준이 높거나 도덕성이 강하다고 보는 시각은 단언컨대 거짓에 가깝습니다. 제가 집으로 돌아간 이유는 계속 집 밖에서 생활할 용기가 없고 두려워서였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 저를 찾으려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찾는 시늉이라도 하는 가족 구성원이나 가출 청소년에게 관심을 갖는 선생님 혹은 관계자가 있는 친구는 집으로, 학교로 돌아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즉, 청소년의 의지가 복귀의 결정적인 요인은 아닙니다.
저는 20년 가까이 서울의 밤을 지켜봤습니다. 그동안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매매와 마약 복용이 공공연히 성행하는 도시의 뒤안길에서는, 가족과 학교로부터 버림받은 가출 청소년들이 여전히 ‘밤의 괴물’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언론이 밤의 시장이 작동하는 원리를 오로지 쾌락과 윤리, 정상과 비정상의 관점에서만 다루고 그에 부합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는 바람에, 섹슈얼리티를 사고팔며 자본을 증식하는 악의 먹이사슬은 한층 견고한 도그마가 되었습니다.
비단 용산의 참사만이 아닐 것입니다. 15년 전에도, 지금도 계속해서 사람들은 추방의 언덕, 생존의 망루 위로 오르고 또 오릅니다. 수원, 성남, 서울 곳곳에서 도시의 이름, 인간의 이름으로 어떤 이들은 살아남거나 또 어떤 이들은 짓밟히는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저는 알고 싶습니다. 과연 누가 제 손에 칼을 쥐어 줬던 걸까요. 그 칼로 정말 나무 십자가를 진 남자를 찔렀던 걸까요. 그는 어째서 피투성이가 되어 언덕 위에 오른 걸까요. 왜 그 누군가들은 그를 자신들의 도시에서 내쫓았던 걸까요. 그 누군가들은 누구인가요. 가해자와 피해자, 승자와 패자, 가진 자와 잃은 자. 여전히 우리는 이와 같은 도식적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누가 승자일까요. 이런 구별을 끊임없이 책동하는 이들이 승자일까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인간의 존재 이유가 증오에 포박된 것 같습니다. 분노를 위한 분노, 증오를 위한 증오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오늘의 증오는 외부로 나타난 명확한 대상을 갖고 있진 않습니다. 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내부의 적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부의 적이 누구인지, 아님 무엇인지 그 실체를 찾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서초동 리그』는 한국 사회의 법조 현실을 그대로 묘사한 게 결코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법조인들이 최선을 다해 일하고 계시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극히 일부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정한 규칙, 양심, 사회규범과 같은 것들의 집 행자들이 혹여 이를 권력을 가진 기득권의 마음으로 접근하기 시작할 때 나타날 수 있는 흑화된 현실을 예측해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묘한 것은 이 예측이 점점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투영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씁쓸한 마음을 지울 길 없습니다. 이 씁쓸함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 마음이 더 무겁습니다.
시종일관 재미와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소설을 쓰고자 하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시스템>은 그런 목표로 써왔습니다만 저의 이러한 의도가 독자에게 어느 정도로 전달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재미만 있는 책일 수도, 또는 지루하기만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소설은 세상의 복잡다단한 현상을 좀 더 흥미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현미경과 같은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스템>을 쓰는 내내 많은 고민을 하며, 관련 지식과 정보 수집의 어려움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완결을 짓고 보니 만족할만한 부분도 몇몇 눈에 뜨여 반갑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한국 사회를 살아내는 10대에겐 모든 환경이 녹록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씁쓸하게 다가오는 현실은 앞으로의 한국 사회를 짊어지게 될 10들만의 사회 속에서 또 다른 계급주의가 출현했다는 사실입니다. 대한민국의 10대 사회를 새롭게 구속하는 건 더 한층 견고해진 계급성입니다.
기성세대는 늘 그래왔듯 잔인해진 10대의 행동을 질타하고 그에 대한 일벌백계의 처벌만이 능사라는 태도로 접근합니다. 하지만 그런 식의 대증적 접근만으로 오늘의 10대가 끌어안게 된 거대한 모순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들은 글을 읽을 때 존재의 아픔과 기쁨을 이해하게 됩니다. 저는 글 읽기와 글쓰기를 통한 치유의 과정이 부족하지만 『아지트』라는 작품을 통해 조금이나마 발현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이런 일련의 활동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우리 사회가 토해내는 비정함을 함께 아파하고, 치유하고, 기뻐하는 10대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과거 질풍노도의 10대 시절을 겪어 온 상처투성이인 저의 작은 소망입니다.
경쟁과 착취, 혼돈과 모순, 그로 인해 어느 순간 돌이켜본 우리들의 현실은 천민자본주의의 막장에서 비로소 드러나버린 '열외인간'이라는 낙인뿐입니다. 과연 이 지독한 경쟁에서 승리한 이들은 이른바 '열외인간'이라는 유전자로부터 말끔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천민자본주의의 오물통 속에서 벌이는 진흙탕 싸움에서는 승리도 패자도 모두 열외인간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은 아닐까요.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요. 이런 것이 정녕 오늘의 우리들이 쏟아내는 분노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는 걸까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 앞에서 소설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소설은 과연 그 무엇을 말할 수 있기는 한 걸까요. 만약 소설이 그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그 무엇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늘 다음 책의 출간 여부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신인 작가가 할 수 있는 눌변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제국의 사생활』은 한국 사회에서 기업집단이 가진 가치가 여전히 몇몇 결정권자에 의해 좌우되는, 마치 농락과 같은 현실을 역설적으로 풍자한 한 폭의 크로키 같은 소설입니다. 소설의 제목에서 ‘제국’은 창업주들이 기업을 국민과 사회의 공공 자산으로 생각하지 않고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본다는 점을 상징하고, ‘사생활’은 권력을 사유화한 이들의 행태가 최소한의 공공성을 잃어버린 채 사적 이익을 위해 남발하는 점을 꼬집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조차 기회와 역전의 가능성이 주어진 각본대로 정해져 있다면, 그래서 패배가 결정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그 판을 아예 둘러엎고 우리들만의 새로운 판을 만들어야 할까요. 아님 그 판에 주어진 각본대로 적당히 순응하는 착한 선수가 되는 게 옳을까요? 이것도 저것도 아님 그 판에 머물러서 주어진 각본과 역할을 걷어치우고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버텨내는 ‘불량주전’으로 살아남는 게 좋을까요.
가성비란 말이 생긴 게 언제부터인지 생각해 봤습니다. 거창하게 보면 태어날 때부터 우린 우리의 쓰임새를 안고 태어난다는 점에서 각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가 아닌가 싶네요. 그런데, 이 가성비에 관한 개념이 우리의 인생 계획에서 최우선 목표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작품을 쓰는 내내 제법 우울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태어난 것 자체가 가장 우수한 성능을 장착한 것일진대, 그게 아니라 자라면서 경쟁하고, 비교하고, 비교당하면서 점점 한 개인이 상품이 되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씁쓸한 마음을 한 편의 소설에 담아봤습니다.
― 주원규
한국사회는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국면에서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 폭력이 가장 노골적으로 속물화된 곳은 속칭 인간의 계도와 교화란 명분으로 덧씌워진 학교란 이름을 가진 모든 곳인 것 같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을 만들기 위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우리는 학교에 가고, 학교에 보내지만 그곳에서 학습되는 건 더 크고 견고한, 합리의 이름으로 회칠한 계급의 탈을 쓰기 위해 세공된 폭력뿐입니다.
때문에 이 비틀린 폭력에 대한 고발은 폭력제조공장에서 오발된 폭도의 숙명과 함께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라는 이름의 학교, 그 학교로부터 이탈된, 추방된 열외들이 쏟아내는 폭력의 도가니 속에서 우리들은 어느새 괴물이 되어 있는 우리 자신, 우리 사회의 실체와 조우하게 됩니다.
갈수록 부패하고 편법이 팽배해가는 세상에서 이 사회를 완벽히 중립적이고 기계적인 시스템이 관리하거나 심판해주면 좋겠다는 기대 내지는 강렬한 열망이 제가 듣고 느껴온 것의 실체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현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진화하고 확대 재생산되었습니다. 인구 1000만이 모여 사는 수도권에 제도권 밖에서 운영되는 특별감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니 실제로 운영되고 있다는 소문에서부터 시작해 세상을 극단적으로 정화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감행되어 다수의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혁명이 준비되고 있다는 설익은 논의까지. 이러한 말들이 떠도는 이유에 대해 좀 더 근원적인 탐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탐색 의지로 심화된 접근의 범주에 일정량의 스토리텔링이 포개어져 본 작품 《특별관리대상자》를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
오늘의 세상을 지배하는 점점 더 비극적이고 종말론적이 되어가는 현상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그 최소한의 반응을 가능하지 않은 저항의 방식으로 말해나가는, 무위에 가까운 뚝심과 버티기가 필요한 글쓰기를 차츰 꿈꾸게 되었습니다. 감히 밝히면 본 작품 《특별관리대상자》가 이러한 버티기의 첫 시작이라 말해보고 싶습니다. 물론 거창한 의도와 다르게 소설은 소설 그대로 읽혀야 할 것이란 소박한 기대도 함께 담아 말입니다.
‘키스’ 속에 사정없이 숨어 있는 뜻은, 입을 열어 보이지 않는 한 결코 전해질 수 없는 자기만의 진실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만이 알아듣고, 자기만이 설득할 수 있는 진실은 참 어렵고 경우에 따라선 서글픈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만큼 투명하고 찬란한 건 없을 듯합니다. (중략) 그런 의미에서 ‘키스’는 늘 어렵고 낯설지만 진실을 전달하는 가장 찬란한 순간인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아요. 그래서일까요. ‘키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우리의 보이는 삶과 보이지 않는 진실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해 주는 통로와 같은, 그래서인지 항상 한 개 모자란 듯한 부족함, 아쉬움을 담은 키스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