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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심영의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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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옌안의 노래>

5·18, 그리고 아포리아

5·18의 성격에 대한 우리 사회의 담론은 크게 희생 담론(국가의 무차별적인 학살과 일방적 죽음의 부각)에서 항쟁 담론(시민이 주체가 된 항거. 폭도에서 민주항쟁의 주체)으로의 변화를 보이면서 전개되어왔습니다. 문학 역시 광주에서의 비극에 대한 진실 규명과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 나아가 가해자의 트라우마를 포함한 애도의 (불)가능성, 그리고 항쟁 주체의 문제 들을 끈질기게 탐문해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5·18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특히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5·18에 대한 역사적 정당성은 위협을 받지요. 현실에서 진실은 항상 권력과의 관계에서 구성되고 또 재구성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제목을 『5·18, 그리고 아포리아』로 정한 까닭도 5·18은 여전히 앞으로도 탐구가 필요한 난제라는 의미에서 그러합니다. 다만 대부분의 글을 관통하는 주제는 트라우마라 할 것입니다. 그날에 희생된 이들과 가족들, 살아남은 이들의 무의식에 각인된 상흔은 물론이고 가해자의 일원이었던 이들의 죄의식도 제 글의 관심인 까닭입니다. 여기에 싣는 글 중에는 새롭게 쓴 글과 함께 기왕에 발표한 글들을 일부 추려 다듬기도 했으니 불가피하게 서로 다른 꼭지의 글에 얼마간 겹치는 부분이 있기도 할 것입니다. 겹치는 부분은, 그동안 발표했던 30여 편의 글 중에서 5·18문학과 관련하여 다시 정리할 때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글을 추린 것입니다. 그러하니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던” 세대에 속했던 한 사람의 나름의 노고라 여겨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문학은 무엇보다 역사적 기억의 문화적 재현이라는 점에서 5·18을 경험하지 못한 후속세대에게 5·18의 진실을 전달할 수 있는 문화적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문학평론집은 5·18문학 담론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성찰하면서 이후의 5월 문학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한 작은 길잡이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광주100년

이 책은 고 박선홍 선생의 역작은 물론이고 오랫동안 지역의 역사와 문화 연구에 매진해온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에 기대고 있다. 다만 필자 나름의 관점으로 광주의 문화사를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책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이 책은 지역민의 삶과 매우 밀접한 거리에서 삶을 지속하고 나아가 문화적 정체성을 구현하는 데 영향을 준 광주의 전통시장과 유서 깊은 마을, 그리고 몇몇 거리 들에 관한 문화사라 할 수 있다. 풍속사(風俗史)는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사회의 생활 전반에 걸친 남다른 습관이나 습속의 기록을 말하고, 문화사(文化史)란 역사 현상을 인간 내면 정신의 소산으로 보고 학문, 예술, 사상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정신문화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니, 이 책에서는 문화사를 풍속사를 아우르는 폭넓은 개념으로 보아 제목을 그렇게 정했다. (중략) 이 책은 광주 지역 전통시장의 장소가 가진 함의를 중심으로 본원적인 가치인 삶의 터전으로서의 전통시장에 주목하여 생활세계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나아가 전통을 표방하는 문화마을과 거리의 형성 과정과 변천의 역사를 통해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 확립을 통한 관계성의 확장-지속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했다. (중략) 지역은 공동체로서 동질감과 함께 내부의 다양한 문화적 성향과 사회·경제적 세력의 각축장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광주 지역의 전통시장과 마을과 거리에서 이루어진 지역민들의 삶의 총체성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데 목표를 두고 쓴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지역의 주민들에게 문화적·역사적 자긍심을 고취하고 지역에서의 삶의 질을 고양하는 데에 있다. 이 책이 지역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과 공간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에 대한 기존의 축적된 연구 성과에 더해 광주 지역의 문화사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를 제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더불어 우리 지역 공동체에 대한 자긍심을 함양하여 지역 발전의 구심점을 제공하고 새롭고 진취적인 지역 이미지를 창출하는 데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겠다. - 책머리에

사랑의 흔적

오늘은 오전 수업 한 과목만 있는 날이었다. 오늘 같은 날은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곤 한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고 걸어 나오다가 학교 정문 입구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보았다. 몇몇 방송국 카메라도 와 있었다. 모두가 여성들인 이십 여 명 남짓의 사람들이 저마다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나는 하마터면 그 대열로 들어가 함께 구호를 외칠 뻔했다. 처벌하라, 처벌하라, 처벌하라. 사람들은 오른손을 높이 들어 앞뒤로 맞춰 흔들며,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그래야 마땅한 일이었다. 마침 나는 수업 때, 인터넷에서 접한 그 사건의 개요를 설명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내가 강의를 하는 학교에서 일어났던가 보았다. 의학전문대학원에 다니는 한 여학생이 같은 대학에 다니는 남자친구의 전화를 새벽 한 시에 받는다. 잠결이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그 남자친구를 이제 그만 만나야겠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처음과는 달리 입이 거칠고 손버릇이 나빴다. 아무 데나 가래침을 뱉고 걸핏하면 욕을 했다. 새벽 한 시에 전화를 걸어온 남자는 여자가 전화를 무성의하게 받는다고 생각한다. 기분이 나빴다. 그렇잖아도 그를 대하는 여자의 표정에서 온기가 사라지고 있음을 자주 느끼던 참이었다. 혼을 내주어야 했다. 한번 내 수중에 들어온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버릴 때까지 내 것이어야 마땅했다. 특히 여자는 더욱 그러했다. 여자에게는 두려움을 알게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그는 배웠다. 그는 군 복무 대신 공익근무를 했으나 남자가 알아야 할 것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차를 몰고 그녀가 혼자 사는 학교 근처 원룸으로 향한다. 의학전문대학원에 다니는 그 여학생은 이 고장엔 처음이었다. 나이가 어느덧 서른에 이르렀으나 그동안에 이 고장에 따로 와야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바다도 없고 강도 없고 하천도 없는 밋밋한 도시였다. 하천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것은 이미 죽은 하천이어서 수량도 메말랐고 고기는 살지 않았다. 그녀는 빨리 졸업해서 빨리 이 고장을 떠나고 싶었다. 남자가 도착했다. 딩동딩동딩동.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녀는 잠깐 생각했으나 이웃 사람들에게 소란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곤 아직은 완전히 헤어진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헤어지고 싶었으나, 이제 그만 만나자는 그 말을 꺼내기가 두려웠다. 여자에게 남자는 두려운 존재였다.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누군가를 만나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에 이렇게도 큰 두려움이 수반한다면 그게 무슨 사랑일 것인가, 그녀는 종종 제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지방법원의 판사는 새벽 한 시에 여자 친구가 혼자 사는 원룸에 들어가 무려 네 시간 동안 쉬지 않고 폭력을 행사한 남자에게 벌금형을 선고한다. 실형을 선고하면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제적을 당할 것이고,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제적을 당하면 남자는 의사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남자는 꼭 의사가 되어야 했다. 학교는 최종판결을 기다려서 남자에 대한 징계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대법원의 최종판결까지는 2년 남짓 걸리고, 그동안에 남자는 의학전문대학원을 마치고 의사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 된다. 남자는 여자의 뺨을 이백 번 넘게 후려갈기고, 목을 조르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왜 전화를 성의 없게 받았느냐고 묻고 또 묻고 또 물었다. 그리곤 죽여 버리겠다고,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욕설을 동원하여 그녀에게 두려움을 안긴다. 여자는 무릎을 꿇고 애원한다. 오빠, 살려줘, 제발 살려줘. 오빠, 살려줘, 제발 살려줘. 살려줘. 그들의 손팻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겨울이었으므로 두터운 아웃도어 차림의 중년 여성 혼자서 커다란 팻말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혼자 서 있다고 외롭지는 않아 보였다. 그 손팻말엔, “세월호에서 아이들이 죽어간 지 600일이 되는 날입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600일이라니, 벌써 어느덧 600일이라니,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으나, 마음만 그랬다. 나는 집에 돌아와 늦은 아침이면서 다소 빠른 점심을 차린다. 밥을 먹기 전, 습관인 탓에 텔레비전 뉴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조계사에 피신 중인 노동자의 안부를 궁금해한다. 어제는 그를 사찰 안에서 끌어내 사찰 밖에 대기 중인 경찰에 넘기려 한 사찰 신도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조만간 감옥에 갇힐 것이다. 꿈은 일상을 이기지 못하며, 꿈꾸는 자 필경 갇히고 마는 게 우리 시대의 문법인 탓에 그러하다. 그러나 그다음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해서 다시 거리에 설 것이고, 다시 어딘가에 피신할 것이고, 그러나 그곳이 다시는 조계사가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이제는 명동 성당도 아닐 것이고, 그러면 그는 이제 더는 숨을 곳을 찾지 못한 채 갇히게 될 것이다. 나는 밥술을 입에 넣으며 별로 소용없는 상상을 하곤 한다. 나는 몹시 피곤해서 오후 내내 죽은 듯이 잠을 잤다. 나는 요즘 몹시 피곤하다. 날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밥벌이를 해야 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다 또 그나마 하루도 쉬지 않고 해야 할 밥벌이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나는 몹시 피곤해서 오후 내내 죽은 듯이 잠을 잤다. 그런데 문득 한기를 느껴 눈을 떴는데, 아직까지 집 안에 남아 있던 모기에게 하필 눈두덩을 물리고 말았다. 나는 더 할 수 없이 심하게 화가 났다. 그러나 모기를 잡지는 못했다. 의학전문대학원에 다니는 여자는 그날 새벽 내내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 군인들에게 체포되고 끌려가고 정신 차릴 틈도 없이 매질을 당해야 했던 기억은 여전히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간 탓에 이제는 그 기억에서 두려움이 환기되지는 않는다. 참 다행이지 싶다. 그러하니 여인이여, 오래 살아남으라. 밤엔 느닷없이 보일러가 고장 났다. 벌써 영하의 날씬데, 온수도 나오지 않고 보온도 되지 않는다. 잘은 모르지만, 감옥에도 온수도 나오지 않고 보온도 되지 않을 것이다. 첫눈이 폭설이었으니 올겨울은 여느 해 보다는 덜 추울지도 모르겠으나, 겨울이므로 겨울답게 춥기는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어쨌거나 갇힌 자들은 겨울이 내내 춥고 여름은 내내 더울 것이다. - 프롤로그

소설에 대하여

소설이란 무엇인가와 관련한 글들은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하나를 보태는 까닭은 그동안 소설을 분석하고 창작을 공부하면서 갖게 된 일정한 불만 때문이다. 소설에 관해 해명하는 일이 간단치 않은 것은 알겠는데, 그 글들이 왜 그렇게 고답적이고 난해한 것인지 그 한결같음에 질렸다고나 할까. 이 책에 실린 소설에 관한 글들은 대학 강의실 밖에서 이루어진 소설 공부의 한 결과물이다. 지난 3년 동안, 생오지 ‘문예 창작촌’에서 이루어진 소설 창작 수업에는 30대에서 70대까지, 그 다양한 연령대만큼이나 각자의 세계에서 나름의 성취를 이룬 분들이 저자와 함께했다. 그동안의 치열한 고민이 이 글들에 담겨 있는 셈이다. 그러하니 소설 공부의 기본적인 요소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한 이들에게, 특히 대학 강의실 밖에서 소설 창작을 공부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나 자신의 독창적인 사유에서 얻어진 결과라기보다는 기왕의 글들을 참고하고 인용한 게 적지 않다. 대부분의 공부가 그렇긴 하다. 어쨌거나 이 책의 제1부에는 소설 창작에 필요한 최소한의 이론을, 2부에는 함께 읽었던 기성 작가들의 작품 분석을, 3부에는 저자와 함께 소설 창작 공부를 하고 있는 분들의 작품에 대한 비평문을 담고 있는데,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결국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나름대로 해명하고 있는 데 바쳐졌다. 특히 3부에 실려 있는 비평문들을 찬찬이 읽어나가다 보면 소설을 창작할 때 무엇에 유의해야 하는가에 대한 얼마간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저자의 관점과 달리 소설을 읽을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까닭에 이 글들의 틈새는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애초에는 ‘소설이란 무엇인가’의 제목으로 제1부와 2부 및 3부만을 구상했으나 제4부와 5부를 추가한 까닭은 때마침 대학 수업에서 교재로 사용했던 <현대문학의 이해> 초판이 모두 소진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제4부 '시에 대하여', 5부 '수필과 동화에 대하여'의 경우 <현대문학의 이해>에서 그 내용을 일부 가져와 간결하게 정리한 것이다. 대학수업의 교재로도 두루 활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전체 내용 중에서 많은 부분 경어체의 글들을 그대로 둔 까닭은 굳이 평어체로 바꾸려 했을 때 본래 글이 갖는 느낌이 변하는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려니 하고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무엇보다 저자와 함께 공부했던 (그리고 홀로 고독하게 소설 창작 공부를 하고 있는) 선생님들이 소설을 통해서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늘 드렸던 말처럼 늦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쓸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다만 서두르지 않되 쉬지도 않기를 바랄 뿐이다.

소설적 상상력과 젠더 정치학

이 책은 서울문화재단의 ‘2019년 예술가 지원 사업’에 선정됨으로써 평론집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새롭게 선보이는 글도 있고, 같은 주제로 묶을만한 기왕의 글을 조금 손보아 함께 엮은 글도 있다. 그러하니 가장 고마운 곳은 아무래도 서울문화재단이고, 재단의 관계자분들이고, 또한 평론 부분을 심사하셨던 권성우, 이명원, 이재복 세 분 선생님들이시다. 따로 인사드릴 기회를 갖지 못하였으니 이 기회를 드려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페미니즘 문학의 경향을 갖고 있는, 비교적 최근에 발표된 일련의 소설들, 그러니까 조남주와 강화길과 박민정과 손원평, 그리고 구병모와 조해진의 소설은 물론 역사적 상상력 속에서 여성의 위치를 문제 삼고 있는 윤정모와 유하령과 정미경의 소설, 그리고 훼손된 몸으로서의 장애여성의 주체성을 탐색하고 있는 방귀희와 김미선, 결혼이주여성의 유목적 주체성을 문제 삼고 있는 천운영과 송은일의 소설, 마지막으로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소거된 여성의 문제와 관련된 글들로 채워져 있다. 페미니즘 문학에 대한 이해가 깊지는 않다. 지방에서 그것도 독학자마냥 공부하는 처지고 보니, 결국 핑계에 불과하나 주변에서 본격적인 페미니즘 문학을 공부하는 학습공동체나 조언을 구할만한 여건이 되지 않아서, 관련된 책들과 논문들을 혼자 읽고 생각을 정리한 탓에 문장이 여물지 못한 편이다. 학생들과의 문학 수업 시간에는 종종 페미니즘에 대해 경기에 가까운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 친구들이 더러 있기도 해서, 나중에는 수업에서 페미니즘에 관해 말하는 것에 조심스러워지고 위축되기도 했다. 그와는 상반되게, 드물게는, 특정성별 혹은 특정 전공만이 독점해야 하는 영역인 것처럼 경계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은근히 제지당한다는 느낌일 때도 없지 않았다. 여러모로 간단치 않은 여건이었으나, 페미니즘은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하나의 운동(movement)이라는 점에서 지지하며, 다른 한편 페미니즘 문학은 그것이 문학인 한 운동과는 달리 미학의 문제에도 소홀할 수 없다는 소박한 태도를 나는 갖고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이 그러한 생각들을 온전하게 담아내고 있는가 하는 점은 물론 또 다른 문제가 되겠다. 이번에도 책을 펴내준 한국문화사, 그리고 관계된 분들께, 애써주신 편집부의 진나경 선생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2020년, 5·18 40주년의 봄날

옌안의 노래

나는 이 소설을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억압에 맞서 투쟁했던 항일운동가들이 그 시절 불가피하게 공산주의자가 되거나 그들과 손잡았다는 이유로 배척되고 있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썼다. 정율성은 뛰어난 음악가였고 불굴의 항일 전사였다. 그는 중국에서 공산당에 입당했고 해방 이후 북한으로 들어가 당의 방침에 따라 북한 공산당원이 되었다. 옌안에서는 <중국인민해방군가>를, 평양에서는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했다. 까닭은 그가 음악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김일성과 마오쩌둥의 교조주의, 개인 숭배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그가 친일 행위를 했던가? 일본제국의 특무(간첩)였던가? 만주국 혹은 관동군의 장교가 되어 독립지사들을 잡아넣고 고문하고 살해했던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을 강점하고 아시아를 전쟁의 광풍으로 몰아넣을 때, 어떤 사람들이 가족을 돌보지 못한 채 헐벗고 굶주리고 고문을 받으며 혹은 겨울 골짜기에서 죽어갔는가를 냉정하게 돌아보기를. 이 소설의 의도는 오직 그뿐이다.

오늘의 기분

무엇보다 마음으로 가까웠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점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몇 년 전 그녀와의 마지막이었던 식사 때, 당신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해주지 못했던 게 오랫동안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아무려나 이 소설을 읽는 나와 가깝거나 그렇지 않은 이들이 행여 마음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소설이란 허구를 본질로 하는 다만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니까.

작가의 내면, 작품의 틈새

다시 조금 무모한 일을 했지 싶다. 그러나 내 사유 속에 머물렀던 한국의 작가들과 그의 작품세계를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해 보는 일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 생각했다. 우선은 전공수업에서 필요한 교재를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이 컸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을 다듬던 때는 마침, 추운 겨울날 오랜만의 서울나들이 탓에 지독한 몸살감기를 앓던 때이기도 했고, 종내 폐렴 비슷한 것으로 전이되어 끙끙거렸는가하면, 무언가로 인해 마음 속 깊이 내상을 입고 허우적거리던 때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좀 더 충실하게 다듬지 못한 변명을 하는 중이다. 「작가작품론」이라는 부제는 사실 부담스러운 면이 없지 않은데, 까닭은 다 알다시피 한국의 근현대작가들의 면면과 그들의 작품 세계가 결코 호락호락한 게 아닌 탓이 컸다. 결국 나의 비좁은 시선에 포착된 몇몇 작가들을 중심으로 얼개를 짤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니 얼마간 이미 알려져 있는 내용의 동어반복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동어반복이라는 느낌이 많이 든다면, 그것은 내 탓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너무 잘 알려져 있는 한국의 현대작가들인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의 내면세계와 그들의 주요작품의 틈새를 들여다보는 작업은 온전히 내 몫의 즐거움이었다. 매천(梅泉)부터 시작한 것은, 지식인이란, 작가란 무엇이어야 하는가와 관련된 내 오랜 연구 주제의 첫머리에 해당되는 인물인 까닭에서였다. 신혜진이라는 새로운 작가는 낯선 만큼 신선하다. 문장과 문체가, 무엇보다 세상과 대상을 향한 넉넉함과 따뜻한 시선이 그의 소설을 오래 붙들게 하는 힘이다. 여전히 틈새는 많다. 한말로부터 시작하여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과 저 전투적인 시대의 전율을 건너 마침내 따뜻한 내면의 세계로 오기까지, 왜 빈틈이 없겠는가. 나는 다만, 김인숙 장편소설 <미칠 수 있겠니>(한겨레출판, 2011), 162쪽에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그 허술한 빈틈을 대신하려한다. …… 아름다운 것, 그러나 곧 소멸할 것에 대한 감동은 그것이 다 지나간 후에야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세월이 한참 흘러, 더는 그 시절의 나이를 흉내로라도 낼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때에는 자신도 예뻤을 것이라는 추억을 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니, 그때 누군가가 얘기해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똑바로 눈을 마주보고 말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금 네가 얼마나 예쁜지 살아가는 동안 절대로 잊지 말라고, 그렇게 힘을 주어 말해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한국문학과 그 주체

지금 네가 얼마나 예쁜지……. 한국문학의 개념 혹은 범주를 말할 때, 한국인 작가가 한국인의 사상과 정서를 한국어로 표현한 문학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상례다. 그렇다면 한국문학의 주체는 누구 혹은 무엇인가. 그것은 작가인가, 한국인의 사상 혹은 정서인가, 아니라면 텍스트를 수용하는 독자인가, 그 모두인가. 따라서 이 책의 주된 관심은 한국문학의 subject로부터 그것의 identity가 무엇인가에 있다. 물론 서정시의 목소리는 누구/무엇의 목소리인가, 그것은 시적화자의 것인가, 서정적 자아의 것인가, 아니라면 시적주체의 것인가 하는 문제처럼 간단한 것은 아니다. 아무튼 이 책은 기왕의 <작가의 내면 작품의 틈새>를 보완하고 수정하면서 한국문학의 주체(identity)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어 정리했다. 물론 대학의 관련 수업에서 교재로 사용하고자 한 목적이 가장 크다. 그러나 나의 비좁은 시선에 포착된 몇몇 작가들을 중심으로 얼개를 짤 수밖에 없었다는 것과 그러자니 얼마간 내용의 동어반복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밝혀둔다. 나는 다만, 김인숙 장편소설 <미칠 수 있겠니>(한겨레출판, 2011, 162)에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그 허술한 빈틈에 대한 변명을 대신하려 한다. …… 아름다운 것, 그러나 곧 소멸할 것에 대한 감동은 그것이 다 지나간 후에야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세월이 한참 흘러, 더는 그 시절의 나이를 흉내로라도 낼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때에는 자신도 예뻤을 것이라는 추억을 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니, 그때 누군가가 얘기해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똑바로 눈을 마주보고 말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금 네가 얼마나 예쁜지 살아가는 동안 절대로 잊지 말라고, 그렇게 힘을 주어 말해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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