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꽃향기를 처음 맡았을 때를 기억한다. 라일락 향기라는 것을 알고 맡을 때와 모르고 맡을 때의 느낌은 다른 것이었다. 익명의 향기를 명명할 수 있을 때 향기는 더 진하게 다가온다. 이면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다. 첫 시집부터 기획한 의도대로 여기까지 왔다. 지금은 삶과 죽음의 자리, 혹은 이 세계와 이면의 세계가 역전된 이후 혼돈의 시기를 통과해 왔기에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상흔이 남아 있는 상태다. 우리는 이미 이면의 세계를 감지할 루트를 갖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