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기 해방 공간의 이념에 희생된 젊은 장교들의 이야기
십수 년 전, 필자는 언론사 퇴직한 뒤 마포에 집필실을 마련했다. 한국인물연구소라는 간판을 걸고 주로 인터뷰 활동을 벌였다. 각 분야 샐럽들은 물론 전문가, 생활인으로서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전하는 휴먼스토리를 쓰는 작업이다. 이는 언론사 재직 시절 문화부, 특집부에서 주로 근무하면서 인물인터뷰, 탐방기사를 많이 써온 배경이 큰 힘이 되었다.
이러다 보니 언론사 퇴직 이후 더 활발하게 움직였다. 시사 월간 〈신동아〉에 ‘이 사람의 삶’,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의 ‘문화도시 문화복지’에 ‘초대석’, 주간 〈일요서울〉에 ‘이계홍이 만난 사람’ 등을 연재했다. KBS 1라디오에 1시간짜리 와이드 인터뷰 ‘이계홍의 세상 사는 이야기’를 매주 1회 6개월여 진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퇴직 후에도 계속 ‘인물전문 기자’로 활약하는데, 어느 날 〈국방일보〉 측에서 몇몇 장군들의 일대기를 집필해줄 수 있느냐는 의사를 타진해왔다. 쉽게 응낙하고 첫 작업에 나선 분이 ‘장군이 된 이등병 최갑석’이다. 해방 직후 국방경비대 이등병으로 시작해 육군 소장이 된 전설적인 최갑석 장군 이야기다. 초창기 우리 국군사 이면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었다는 점뿐 아니라 스토리텔링이 풍부해 인기를 끌었다.
최 장군 이야기가 인기리에 끝나자 전 공군참모총장 장지량 장군 이야기를 써달라고 요청이 왔고, 뒤이어 전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 이야기까지 집필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해방 공간의 국방경비대 병사나 장교로 시작한 군인들이다.
매주 한두 차례 장군들의 자택과 사무실을 찾아 인터뷰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었다. ‘숙군’ 때 숙청된 젊은 장교들에 대한 아쉬움의 토로였다. 주 대상은 일본 육사 1, 2학년 생도들이었다. 이들은 미군정 시기 국방경비대 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했던 사람들이고,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주역으로 나섰으나 숙군의 회오리에 휘말려 상당수 숙청되었다. 나이는 하나같이 20대 초반의 청년들이었다.
일본 육사 출신 하면 기계적으로 친일파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해방 직후 국방경비대에 배치된 이들은 민족 장교로 변신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나라가 서자 민족 장교가 된다는 자긍심으로 민족의식이 싹튼 청년들이었다.
감수성 예민한 생도들이 자주국가, 자주군대, 민족군대라는 새로운 이정표 아래 나라를 지키는 간성으로 출발하려 하는데, 이들은 불행히도 외세라는 미군정 지배와 분단이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 체제에 쉽게 영합하는 장교도 있었지만, 분단과 외세의 지배를 받는 데 대한 고민과 시대 모순에 대한 고뇌를 가진 젊은 장교들이 적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시대와 불화하다가 사라졌다. 이들에게 이념이 채색되기엔 너무 이른 나이였고, 이념에 물든 집안 환경도 아니었다. 당시 숙군 이전까지는 이념이 요즘처럼 죄악시되던 때도 아니었다.
이들이 일본 육사를 지망한 것은 일제 군국주의를 뒷받침하기 위한 사명감에서라기보다 그 시기 그런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들어간 것이 정직한 표현일 것이다. 무상 교육, 숙식 제공, 피복 제공, 심지어 월급까지 지급되었기 때문에 누구나 선망한 학교였으며, 신체 건강하고 두뇌가 명석한 학생만이 선택된 학교였으므로 자부심 또한 컸다.
필자는 장군들을 인터뷰하면서 일본 육사 생도들에 대한 죽음을 안타까이 여기는 사연들을 관심 있게 들었다. 졸업생인 김종석, 박정희 이외에 1, 2학년 생도들이었던 오일균, 조병건, 이재일, 이성구, 김태성, 김학림 등이 그들이다. 그중 오일균에 대한 회고담이 많았다. 잘 생기고, 민족의식과 군인정신이 투철하며, 두뇌가 명석해 미래가 약속된 청년 장교였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이 미심쩍다는 것이다.
오일균은 23세의 젊은 육군 소령으로 제주 4 · 3때 포로수용소장을 끝으로 1949년 8월 서울 수색 기지에서 처형되었다. 당시 동료들은 그의 총살형이 이적죄라는 법 조항이 적용되었다고 했다. 그런 것들이 지적 호기심을 발동시켰다. 채명신·최갑석 장군은 제주에서 그와 함께 근무했고, 장지량 장군은 일본 육사 1년 선후배 사이로,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에서 다시 만난 사이다. 김광식 장군도 친하게 지냈다고 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내막을 몰라 필자 나름으로 파편화된 사연들을 퍼즐 맞추듯이 모아 이야기를 끌고 나가보기로 했다. 따라서 이 소설은 픽션과 논픽션이 가미된 소설임을 밝혀둔다. 또한 기자적 현장성과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한 작품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국방일보〉에 ‘잃어버린 사람들’이란 단락으로 희생된 장교들이 짧게 소개되자 어느 날 오일균의 유족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동생 오능균씨(2021년 작고)였다. 그는 형님의 일에 관한 한 조그만 단서라도 있으면 만백사 제하고 찾아나서는 사람이었다. 형님에 대한 정보 갈증이 많은 분이었다. 형님이 왜 처형되었는지, 군 복무의 동선과 인맥, 이적행위가 무엇인지, 추적하는데 뚜렷한 기록이 없는 데다 감춰진 것이 많아 애를 태우고 있었다.
필자는 오씨의 둘째 형 오보균(육사 5기) 소위도 스물한 살의 나이에 첫 부임지 남원 부대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둘째형은 큰형이 처형된 직후 구타당해 죽었다는 풍문이 돌았으나 집으로 유골조차 오지 않았다. 취재 결과 오보균은 6 · 25 발발 2년 후인 1952년 전사자로 기록되었다. 집에 단 한번의 연락을 취하지 않은 채 3년 후 엉뚱하게 전사했다는 것은 아무리 군적 정리가 허술한 시대였다고 해도 납득할 수 없다.
오능균 씨는 자기 대에서 두 형님의 죽음의 원인을 캐지 않고는 억울한 사연의 족적이 영원히 묻힐 것이라는 절박감으로 전국을 헤맸으나 행적을 캐지 못하고 지난해 작고했다. 이 작품은 그의 노고도 상당 부분 스며있다. 작품 연재 시 다른 가족들의 만류 때문에 여러 차례 작품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필자는 소설이란 점을 설득해 우여곡절 끝에 불완전하나마 완성했다.
이 소설은 오일균 소령의 이야기가 뼈대지만, 해방 공간의 혼란스런 국방경비대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격동기, 미군정의 해방관리가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설익은 이념 대립으로 좌우 양 진영에서 유용하게 써먹어야 할 젊은 국가적 동량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이때 해방 공간을 잘 활용했다면 분단의 비극도 막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해방 공간의 이념 대립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모두 역사의 패자라고 본다. 이념은 구실일 뿐, 권력 찬탈에 오염된 ‘광기의 폭력’이 민족 분단의 비극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필자더러 “좌파 아니냐?”고 이념 공세를 펼지 모르겠다. 〈월간문학〉과 〈프레시안〉 연재 중에도 더러 그런 공격을 받았으니까 말이다. 좌파냐 우파냐, 진보냐 보수냐? 한 인생을 그런 식으로 재단하고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사회나 한 개인을 피폐하게 하는가. 어느 한 편을 비판하면 반사적으로 다른 한 편을 옹호한다고 생각하는 이분법적 논리 앞에서 절망할 때가 많다. 한 사건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그런 식으로 편견의 벽에 가둬버리는 것이야말로 폭력이자 야만이다.
이 소설은 〈월간문학〉에 34회 연재(2016.10~2019.6)했던 작품이다. 〈월간문학〉 사상 34개월이라는 최장기 연재가 가능했던 것은 작품 소재의 특이성과 뚜렷한 주제의식이 반향을 불러일으킨 영향이 컸다고 본다. 연재엔 대학 선배인 문효치 당시 문협 이사장의 배려도 컸다. 작품 연재가 마지막 회에서 지면 사정으로 아쉽게 미완으로 끝나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에 36회(2019.9.10.~2020.1.13)로 확대 재수록 연재했다. 〈프레시안〉 연재 때 더 많은 독자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출판시장이 여의롭지 못하고, 작품 분량이 방대해서 출판하기 어려운 여건인데도 범우사 윤형두 회장께서 기꺼이 출판을 맡아주셨다. 본래는 5권 분량이었으나 사적 자료가 강조된 반면 재미가 반감될 수 있다고 해서 4권짜리로 압축했다.
책이 잘 팔려서 출판사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러 가지 자료 인용 부분은 작품 안에 출처를 명기했지만, 일부 누락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혹 누락으로 인한 결례가 있다면, 필자들의 너그러운 양해가 있기를 바란다. 소설 작품의 허구성으로 인해 등장인물을 일부 가명을 썼음을 부언(附言)한다.
― 2022년 6월 이계홍
격동기 해방 공간의 이념에 희생된 젊은 장교들의 이야기
십수 년 전, 필자는 언론사 퇴직한 뒤 마포에 집필실을 마련했다. 한국인물연구소라는 간판을 걸고 주로 인터뷰 활동을 벌였다. 각 분야 샐럽들은 물론 전문가, 생활인으로서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전하는 휴먼스토리를 쓰는 작업이다. 이는 언론사 재직 시절 문화부, 특집부에서 주로 근무하면서 인물인터뷰, 탐방기사를 많이 써온 배경이 큰 힘이 되었다.
이러다 보니 언론사 퇴직 이후 더 활발하게 움직였다. 시사 월간 〈신동아〉에 ‘이 사람의 삶’,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의 ‘문화도시 문화복지’에 ‘초대석’, 주간 〈일요서울〉에 ‘이계홍이 만난 사람’ 등을 연재했다. KBS 1라디오에 1시간짜리 와이드 인터뷰 ‘이계홍의 세상 사는 이야기’를 매주 1회 6개월여 진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퇴직 후에도 계속 ‘인물전문 기자’로 활약하는데, 어느 날 〈국방일보〉 측에서 몇몇 장군들의 일대기를 집필해줄 수 있느냐는 의사를 타진해왔다. 쉽게 응낙하고 첫 작업에 나선 분이 ‘장군이 된 이등병 최갑석’이다. 해방 직후 국방경비대 이등병으로 시작해 육군 소장이 된 전설적인 최갑석 장군 이야기다. 초창기 우리 국군사 이면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었다는 점뿐 아니라 스토리텔링이 풍부해 인기를 끌었다.
최 장군 이야기가 인기리에 끝나자 전 공군참모총장 장지량 장군 이야기를 써달라고 요청이 왔고, 뒤이어 전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 이야기까지 집필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해방 공간의 국방경비대 병사나 장교로 시작한 군인들이다.
매주 한두 차례 장군들의 자택과 사무실을 찾아 인터뷰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었다. ‘숙군’ 때 숙청된 젊은 장교들에 대한 아쉬움의 토로였다. 주 대상은 일본 육사 1, 2학년 생도들이었다. 이들은 미군정 시기 국방경비대 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했던 사람들이고,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주역으로 나섰으나 숙군의 회오리에 휘말려 상당수 숙청되었다. 나이는 하나같이 20대 초반의 청년들이었다.
일본 육사 출신 하면 기계적으로 친일파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해방 직후 국방경비대에 배치된 이들은 민족 장교로 변신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나라가 서자 민족 장교가 된다는 자긍심으로 민족의식이 싹튼 청년들이었다.
감수성 예민한 생도들이 자주국가, 자주군대, 민족군대라는 새로운 이정표 아래 나라를 지키는 간성으로 출발하려 하는데, 이들은 불행히도 외세라는 미군정 지배와 분단이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 체제에 쉽게 영합하는 장교도 있었지만, 분단과 외세의 지배를 받는 데 대한 고민과 시대 모순에 대한 고뇌를 가진 젊은 장교들이 적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시대와 불화하다가 사라졌다. 이들에게 이념이 채색되기엔 너무 이른 나이였고, 이념에 물든 집안 환경도 아니었다. 당시 숙군 이전까지는 이념이 요즘처럼 죄악시되던 때도 아니었다.
이들이 일본 육사를 지망한 것은 일제 군국주의를 뒷받침하기 위한 사명감에서라기보다 그 시기 그런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들어간 것이 정직한 표현일 것이다. 무상 교육, 숙식 제공, 피복 제공, 심지어 월급까지 지급되었기 때문에 누구나 선망한 학교였으며, 신체 건강하고 두뇌가 명석한 학생만이 선택된 학교였으므로 자부심 또한 컸다.
필자는 장군들을 인터뷰하면서 일본 육사 생도들에 대한 죽음을 안타까이 여기는 사연들을 관심 있게 들었다. 졸업생인 김종석, 박정희 이외에 1, 2학년 생도들이었던 오일균, 조병건, 이재일, 이성구, 김태성, 김학림 등이 그들이다. 그중 오일균에 대한 회고담이 많았다. 잘 생기고, 민족의식과 군인정신이 투철하며, 두뇌가 명석해 미래가 약속된 청년 장교였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이 미심쩍다는 것이다.
오일균은 23세의 젊은 육군 소령으로 제주 4 · 3때 포로수용소장을 끝으로 1949년 8월 서울 수색 기지에서 처형되었다. 당시 동료들은 그의 총살형이 이적죄라는 법 조항이 적용되었다고 했다. 그런 것들이 지적 호기심을 발동시켰다. 채명신·최갑석 장군은 제주에서 그와 함께 근무했고, 장지량 장군은 일본 육사 1년 선후배 사이로,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에서 다시 만난 사이다. 김광식 장군도 친하게 지냈다고 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내막을 몰라 필자 나름으로 파편화된 사연들을 퍼즐 맞추듯이 모아 이야기를 끌고 나가보기로 했다. 따라서 이 소설은 픽션과 논픽션이 가미된 소설임을 밝혀둔다. 또한 기자적 현장성과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한 작품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국방일보〉에 ‘잃어버린 사람들’이란 단락으로 희생된 장교들이 짧게 소개되자 어느 날 오일균의 유족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동생 오능균씨(2021년 작고)였다. 그는 형님의 일에 관한 한 조그만 단서라도 있으면 만백사 제하고 찾아나서는 사람이었다. 형님에 대한 정보 갈증이 많은 분이었다. 형님이 왜 처형되었는지, 군 복무의 동선과 인맥, 이적행위가 무엇인지, 추적하는데 뚜렷한 기록이 없는 데다 감춰진 것이 많아 애를 태우고 있었다.
필자는 오씨의 둘째 형 오보균(육사 5기) 소위도 스물한 살의 나이에 첫 부임지 남원 부대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둘째형은 큰형이 처형된 직후 구타당해 죽었다는 풍문이 돌았으나 집으로 유골조차 오지 않았다. 취재 결과 오보균은 6 · 25 발발 2년 후인 1952년 전사자로 기록되었다. 집에 단 한번의 연락을 취하지 않은 채 3년 후 엉뚱하게 전사했다는 것은 아무리 군적 정리가 허술한 시대였다고 해도 납득할 수 없다.
오능균 씨는 자기 대에서 두 형님의 죽음의 원인을 캐지 않고는 억울한 사연의 족적이 영원히 묻힐 것이라는 절박감으로 전국을 헤맸으나 행적을 캐지 못하고 지난해 작고했다. 이 작품은 그의 노고도 상당 부분 스며있다. 작품 연재 시 다른 가족들의 만류 때문에 여러 차례 작품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필자는 소설이란 점을 설득해 우여곡절 끝에 불완전하나마 완성했다.
이 소설은 오일균 소령의 이야기가 뼈대지만, 해방 공간의 혼란스런 국방경비대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격동기, 미군정의 해방관리가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설익은 이념 대립으로 좌우 양 진영에서 유용하게 써먹어야 할 젊은 국가적 동량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이때 해방 공간을 잘 활용했다면 분단의 비극도 막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해방 공간의 이념 대립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모두 역사의 패자라고 본다. 이념은 구실일 뿐, 권력 찬탈에 오염된 ‘광기의 폭력’이 민족 분단의 비극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필자더러 “좌파 아니냐?”고 이념 공세를 펼지 모르겠다. 〈월간문학〉과 〈프레시안〉 연재 중에도 더러 그런 공격을 받았으니까 말이다. 좌파냐 우파냐, 진보냐 보수냐? 한 인생을 그런 식으로 재단하고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사회나 한 개인을 피폐하게 하는가. 어느 한 편을 비판하면 반사적으로 다른 한 편을 옹호한다고 생각하는 이분법적 논리 앞에서 절망할 때가 많다. 한 사건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그런 식으로 편견의 벽에 가둬버리는 것이야말로 폭력이자 야만이다.
이 소설은 〈월간문학〉에 34회 연재(2016.10~2019.6)했던 작품이다. 〈월간문학〉 사상 34개월이라는 최장기 연재가 가능했던 것은 작품 소재의 특이성과 뚜렷한 주제의식이 반향을 불러일으킨 영향이 컸다고 본다. 연재엔 대학 선배인 문효치 당시 문협 이사장의 배려도 컸다. 작품 연재가 마지막 회에서 지면 사정으로 아쉽게 미완으로 끝나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에 36회(2019.9.10.~2020.1.13)로 확대 재수록 연재했다. 〈프레시안〉 연재 때 더 많은 독자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출판시장이 여의롭지 못하고, 작품 분량이 방대해서 출판하기 어려운 여건인데도 범우사 윤형두 회장께서 기꺼이 출판을 맡아주셨다. 본래는 5권 분량이었으나 사적 자료가 강조된 반면 재미가 반감될 수 있다고 해서 4권짜리로 압축했다.
책이 잘 팔려서 출판사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러 가지 자료 인용 부분은 작품 안에 출처를 명기했지만, 일부 누락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혹 누락으로 인한 결례가 있다면, 필자들의 너그러운 양해가 있기를 바란다. 소설 작품의 허구성으로 인해 등장인물을 일부 가명을 썼음을 부언(附言)한다.
― 2022년 6월 이계홍
격동기 해방 공간의 이념에 희생된 젊은 장교들의 이야기
십수 년 전, 필자는 언론사 퇴직한 뒤 마포에 집필실을 마련했다. 한국인물연구소라는 간판을 걸고 주로 인터뷰 활동을 벌였다. 각 분야 샐럽들은 물론 전문가, 생활인으로서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전하는 휴먼스토리를 쓰는 작업이다. 이는 언론사 재직 시절 문화부, 특집부에서 주로 근무하면서 인물인터뷰, 탐방기사를 많이 써온 배경이 큰 힘이 되었다.
이러다 보니 언론사 퇴직 이후 더 활발하게 움직였다. 시사 월간 〈신동아〉에 ‘이 사람의 삶’,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의 ‘문화도시 문화복지’에 ‘초대석’, 주간 〈일요서울〉에 ‘이계홍이 만난 사람’ 등을 연재했다. KBS 1라디오에 1시간짜리 와이드 인터뷰 ‘이계홍의 세상 사는 이야기’를 매주 1회 6개월여 진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퇴직 후에도 계속 ‘인물전문 기자’로 활약하는데, 어느 날 〈국방일보〉 측에서 몇몇 장군들의 일대기를 집필해줄 수 있느냐는 의사를 타진해왔다. 쉽게 응낙하고 첫 작업에 나선 분이 ‘장군이 된 이등병 최갑석’이다. 해방 직후 국방경비대 이등병으로 시작해 육군 소장이 된 전설적인 최갑석 장군 이야기다. 초창기 우리 국군사 이면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었다는 점뿐 아니라 스토리텔링이 풍부해 인기를 끌었다.
최 장군 이야기가 인기리에 끝나자 전 공군참모총장 장지량 장군 이야기를 써달라고 요청이 왔고, 뒤이어 전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 이야기까지 집필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해방 공간의 국방경비대 병사나 장교로 시작한 군인들이다.
매주 한두 차례 장군들의 자택과 사무실을 찾아 인터뷰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었다. ‘숙군’ 때 숙청된 젊은 장교들에 대한 아쉬움의 토로였다. 주 대상은 일본 육사 1, 2학년 생도들이었다. 이들은 미군정 시기 국방경비대 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했던 사람들이고,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주역으로 나섰으나 숙군의 회오리에 휘말려 상당수 숙청되었다. 나이는 하나같이 20대 초반의 청년들이었다.
일본 육사 출신 하면 기계적으로 친일파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해방 직후 국방경비대에 배치된 이들은 민족 장교로 변신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나라가 서자 민족 장교가 된다는 자긍심으로 민족의식이 싹튼 청년들이었다.
감수성 예민한 생도들이 자주국가, 자주군대, 민족군대라는 새로운 이정표 아래 나라를 지키는 간성으로 출발하려 하는데, 이들은 불행히도 외세라는 미군정 지배와 분단이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 체제에 쉽게 영합하는 장교도 있었지만, 분단과 외세의 지배를 받는 데 대한 고민과 시대 모순에 대한 고뇌를 가진 젊은 장교들이 적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시대와 불화하다가 사라졌다. 이들에게 이념이 채색되기엔 너무 이른 나이였고, 이념에 물든 집안 환경도 아니었다. 당시 숙군 이전까지는 이념이 요즘처럼 죄악시되던 때도 아니었다.
이들이 일본 육사를 지망한 것은 일제 군국주의를 뒷받침하기 위한 사명감에서라기보다 그 시기 그런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들어간 것이 정직한 표현일 것이다. 무상 교육, 숙식 제공, 피복 제공, 심지어 월급까지 지급되었기 때문에 누구나 선망한 학교였으며, 신체 건강하고 두뇌가 명석한 학생만이 선택된 학교였으므로 자부심 또한 컸다.
필자는 장군들을 인터뷰하면서 일본 육사 생도들에 대한 죽음을 안타까이 여기는 사연들을 관심 있게 들었다. 졸업생인 김종석, 박정희 이외에 1, 2학년 생도들이었던 오일균, 조병건, 이재일, 이성구, 김태성, 김학림 등이 그들이다. 그중 오일균에 대한 회고담이 많았다. 잘 생기고, 민족의식과 군인정신이 투철하며, 두뇌가 명석해 미래가 약속된 청년 장교였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이 미심쩍다는 것이다.
오일균은 23세의 젊은 육군 소령으로 제주 4 · 3때 포로수용소장을 끝으로 1949년 8월 서울 수색 기지에서 처형되었다. 당시 동료들은 그의 총살형이 이적죄라는 법 조항이 적용되었다고 했다. 그런 것들이 지적 호기심을 발동시켰다. 채명신·최갑석 장군은 제주에서 그와 함께 근무했고, 장지량 장군은 일본 육사 1년 선후배 사이로,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에서 다시 만난 사이다. 김광식 장군도 친하게 지냈다고 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내막을 몰라 필자 나름으로 파편화된 사연들을 퍼즐 맞추듯이 모아 이야기를 끌고 나가보기로 했다. 따라서 이 소설은 픽션과 논픽션이 가미된 소설임을 밝혀둔다. 또한 기자적 현장성과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한 작품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국방일보〉에 ‘잃어버린 사람들’이란 단락으로 희생된 장교들이 짧게 소개되자 어느 날 오일균의 유족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동생 오능균씨(2021년 작고)였다. 그는 형님의 일에 관한 한 조그만 단서라도 있으면 만백사 제하고 찾아나서는 사람이었다. 형님에 대한 정보 갈증이 많은 분이었다. 형님이 왜 처형되었는지, 군 복무의 동선과 인맥, 이적행위가 무엇인지, 추적하는데 뚜렷한 기록이 없는 데다 감춰진 것이 많아 애를 태우고 있었다.
필자는 오씨의 둘째 형 오보균(육사 5기) 소위도 스물한 살의 나이에 첫 부임지 남원 부대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둘째형은 큰형이 처형된 직후 구타당해 죽었다는 풍문이 돌았으나 집으로 유골조차 오지 않았다. 취재 결과 오보균은 6 · 25 발발 2년 후인 1952년 전사자로 기록되었다. 집에 단 한번의 연락을 취하지 않은 채 3년 후 엉뚱하게 전사했다는 것은 아무리 군적 정리가 허술한 시대였다고 해도 납득할 수 없다.
오능균 씨는 자기 대에서 두 형님의 죽음의 원인을 캐지 않고는 억울한 사연의 족적이 영원히 묻힐 것이라는 절박감으로 전국을 헤맸으나 행적을 캐지 못하고 지난해 작고했다. 이 작품은 그의 노고도 상당 부분 스며있다. 작품 연재 시 다른 가족들의 만류 때문에 여러 차례 작품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필자는 소설이란 점을 설득해 우여곡절 끝에 불완전하나마 완성했다.
이 소설은 오일균 소령의 이야기가 뼈대지만, 해방 공간의 혼란스런 국방경비대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격동기, 미군정의 해방관리가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설익은 이념 대립으로 좌우 양 진영에서 유용하게 써먹어야 할 젊은 국가적 동량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이때 해방 공간을 잘 활용했다면 분단의 비극도 막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해방 공간의 이념 대립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모두 역사의 패자라고 본다. 이념은 구실일 뿐, 권력 찬탈에 오염된 ‘광기의 폭력’이 민족 분단의 비극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필자더러 “좌파 아니냐?”고 이념 공세를 펼지 모르겠다. 〈월간문학〉과 〈프레시안〉 연재 중에도 더러 그런 공격을 받았으니까 말이다. 좌파냐 우파냐, 진보냐 보수냐? 한 인생을 그런 식으로 재단하고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사회나 한 개인을 피폐하게 하는가. 어느 한 편을 비판하면 반사적으로 다른 한 편을 옹호한다고 생각하는 이분법적 논리 앞에서 절망할 때가 많다. 한 사건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그런 식으로 편견의 벽에 가둬버리는 것이야말로 폭력이자 야만이다.
이 소설은 〈월간문학〉에 34회 연재(2016.10~2019.6)했던 작품이다. 〈월간문학〉 사상 34개월이라는 최장기 연재가 가능했던 것은 작품 소재의 특이성과 뚜렷한 주제의식이 반향을 불러일으킨 영향이 컸다고 본다. 연재엔 대학 선배인 문효치 당시 문협 이사장의 배려도 컸다. 작품 연재가 마지막 회에서 지면 사정으로 아쉽게 미완으로 끝나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에 36회(2019.9.10.~2020.1.13)로 확대 재수록 연재했다. 〈프레시안〉 연재 때 더 많은 독자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출판시장이 여의롭지 못하고, 작품 분량이 방대해서 출판하기 어려운 여건인데도 범우사 윤형두 회장께서 기꺼이 출판을 맡아주셨다. 본래는 5권 분량이었으나 사적 자료가 강조된 반면 재미가 반감될 수 있다고 해서 4권짜리로 압축했다.
책이 잘 팔려서 출판사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러 가지 자료 인용 부분은 작품 안에 출처를 명기했지만, 일부 누락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혹 누락으로 인한 결례가 있다면, 필자들의 너그러운 양해가 있기를 바란다. 소설 작품의 허구성으로 인해 등장인물을 일부 가명을 썼음을 부언(附言)한다.
― 2022년 6월 이계홍
격동기 해방 공간의 이념에 희생된 젊은 장교들의 이야기
십수 년 전, 필자는 언론사 퇴직한 뒤 마포에 집필실을 마련했다. 한국인물연구소라는 간판을 걸고 주로 인터뷰 활동을 벌였다. 각 분야 샐럽들은 물론 전문가, 생활인으로서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전하는 휴먼스토리를 쓰는 작업이다. 이는 언론사 재직 시절 문화부, 특집부에서 주로 근무하면서 인물인터뷰, 탐방기사를 많이 써온 배경이 큰 힘이 되었다.
이러다 보니 언론사 퇴직 이후 더 활발하게 움직였다. 시사 월간 〈신동아〉에 ‘이 사람의 삶’,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의 ‘문화도시 문화복지’에 ‘초대석’, 주간 〈일요서울〉에 ‘이계홍이 만난 사람’ 등을 연재했다. KBS 1라디오에 1시간짜리 와이드 인터뷰 ‘이계홍의 세상 사는 이야기’를 매주 1회 6개월여 진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퇴직 후에도 계속 ‘인물전문 기자’로 활약하는데, 어느 날 〈국방일보〉 측에서 몇몇 장군들의 일대기를 집필해줄 수 있느냐는 의사를 타진해왔다. 쉽게 응낙하고 첫 작업에 나선 분이 ‘장군이 된 이등병 최갑석’이다. 해방 직후 국방경비대 이등병으로 시작해 육군 소장이 된 전설적인 최갑석 장군 이야기다. 초창기 우리 국군사 이면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었다는 점뿐 아니라 스토리텔링이 풍부해 인기를 끌었다.
최 장군 이야기가 인기리에 끝나자 전 공군참모총장 장지량 장군 이야기를 써달라고 요청이 왔고, 뒤이어 전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 이야기까지 집필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해방 공간의 국방경비대 병사나 장교로 시작한 군인들이다.
매주 한두 차례 장군들의 자택과 사무실을 찾아 인터뷰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었다. ‘숙군’ 때 숙청된 젊은 장교들에 대한 아쉬움의 토로였다. 주 대상은 일본 육사 1, 2학년 생도들이었다. 이들은 미군정 시기 국방경비대 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했던 사람들이고,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주역으로 나섰으나 숙군의 회오리에 휘말려 상당수 숙청되었다. 나이는 하나같이 20대 초반의 청년들이었다.
일본 육사 출신 하면 기계적으로 친일파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해방 직후 국방경비대에 배치된 이들은 민족 장교로 변신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나라가 서자 민족 장교가 된다는 자긍심으로 민족의식이 싹튼 청년들이었다.
감수성 예민한 생도들이 자주국가, 자주군대, 민족군대라는 새로운 이정표 아래 나라를 지키는 간성으로 출발하려 하는데, 이들은 불행히도 외세라는 미군정 지배와 분단이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 체제에 쉽게 영합하는 장교도 있었지만, 분단과 외세의 지배를 받는 데 대한 고민과 시대 모순에 대한 고뇌를 가진 젊은 장교들이 적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시대와 불화하다가 사라졌다. 이들에게 이념이 채색되기엔 너무 이른 나이였고, 이념에 물든 집안 환경도 아니었다. 당시 숙군 이전까지는 이념이 요즘처럼 죄악시되던 때도 아니었다.
이들이 일본 육사를 지망한 것은 일제 군국주의를 뒷받침하기 위한 사명감에서라기보다 그 시기 그런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들어간 것이 정직한 표현일 것이다. 무상 교육, 숙식 제공, 피복 제공, 심지어 월급까지 지급되었기 때문에 누구나 선망한 학교였으며, 신체 건강하고 두뇌가 명석한 학생만이 선택된 학교였으므로 자부심 또한 컸다.
필자는 장군들을 인터뷰하면서 일본 육사 생도들에 대한 죽음을 안타까이 여기는 사연들을 관심 있게 들었다. 졸업생인 김종석, 박정희 이외에 1, 2학년 생도들이었던 오일균, 조병건, 이재일, 이성구, 김태성, 김학림 등이 그들이다. 그중 오일균에 대한 회고담이 많았다. 잘 생기고, 민족의식과 군인정신이 투철하며, 두뇌가 명석해 미래가 약속된 청년 장교였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이 미심쩍다는 것이다.
오일균은 23세의 젊은 육군 소령으로 제주 4 · 3때 포로수용소장을 끝으로 1949년 8월 서울 수색 기지에서 처형되었다. 당시 동료들은 그의 총살형이 이적죄라는 법 조항이 적용되었다고 했다. 그런 것들이 지적 호기심을 발동시켰다. 채명신·최갑석 장군은 제주에서 그와 함께 근무했고, 장지량 장군은 일본 육사 1년 선후배 사이로,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에서 다시 만난 사이다. 김광식 장군도 친하게 지냈다고 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내막을 몰라 필자 나름으로 파편화된 사연들을 퍼즐 맞추듯이 모아 이야기를 끌고 나가보기로 했다. 따라서 이 소설은 픽션과 논픽션이 가미된 소설임을 밝혀둔다. 또한 기자적 현장성과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한 작품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국방일보〉에 ‘잃어버린 사람들’이란 단락으로 희생된 장교들이 짧게 소개되자 어느 날 오일균의 유족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동생 오능균씨(2021년 작고)였다. 그는 형님의 일에 관한 한 조그만 단서라도 있으면 만백사 제하고 찾아나서는 사람이었다. 형님에 대한 정보 갈증이 많은 분이었다. 형님이 왜 처형되었는지, 군 복무의 동선과 인맥, 이적행위가 무엇인지, 추적하는데 뚜렷한 기록이 없는 데다 감춰진 것이 많아 애를 태우고 있었다.
필자는 오씨의 둘째 형 오보균(육사 5기) 소위도 스물한 살의 나이에 첫 부임지 남원 부대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둘째형은 큰형이 처형된 직후 구타당해 죽었다는 풍문이 돌았으나 집으로 유골조차 오지 않았다. 취재 결과 오보균은 6 · 25 발발 2년 후인 1952년 전사자로 기록되었다. 집에 단 한번의 연락을 취하지 않은 채 3년 후 엉뚱하게 전사했다는 것은 아무리 군적 정리가 허술한 시대였다고 해도 납득할 수 없다.
오능균 씨는 자기 대에서 두 형님의 죽음의 원인을 캐지 않고는 억울한 사연의 족적이 영원히 묻힐 것이라는 절박감으로 전국을 헤맸으나 행적을 캐지 못하고 지난해 작고했다. 이 작품은 그의 노고도 상당 부분 스며있다. 작품 연재 시 다른 가족들의 만류 때문에 여러 차례 작품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필자는 소설이란 점을 설득해 우여곡절 끝에 불완전하나마 완성했다.
이 소설은 오일균 소령의 이야기가 뼈대지만, 해방 공간의 혼란스런 국방경비대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격동기, 미군정의 해방관리가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설익은 이념 대립으로 좌우 양 진영에서 유용하게 써먹어야 할 젊은 국가적 동량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이때 해방 공간을 잘 활용했다면 분단의 비극도 막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해방 공간의 이념 대립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모두 역사의 패자라고 본다. 이념은 구실일 뿐, 권력 찬탈에 오염된 ‘광기의 폭력’이 민족 분단의 비극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필자더러 “좌파 아니냐?”고 이념 공세를 펼지 모르겠다. 〈월간문학〉과 〈프레시안〉 연재 중에도 더러 그런 공격을 받았으니까 말이다. 좌파냐 우파냐, 진보냐 보수냐? 한 인생을 그런 식으로 재단하고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사회나 한 개인을 피폐하게 하는가. 어느 한 편을 비판하면 반사적으로 다른 한 편을 옹호한다고 생각하는 이분법적 논리 앞에서 절망할 때가 많다. 한 사건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그런 식으로 편견의 벽에 가둬버리는 것이야말로 폭력이자 야만이다.
이 소설은 〈월간문학〉에 34회 연재(2016.10~2019.6)했던 작품이다. 〈월간문학〉 사상 34개월이라는 최장기 연재가 가능했던 것은 작품 소재의 특이성과 뚜렷한 주제의식이 반향을 불러일으킨 영향이 컸다고 본다. 연재엔 대학 선배인 문효치 당시 문협 이사장의 배려도 컸다. 작품 연재가 마지막 회에서 지면 사정으로 아쉽게 미완으로 끝나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에 36회(2019.9.10.~2020.1.13)로 확대 재수록 연재했다. 〈프레시안〉 연재 때 더 많은 독자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출판시장이 여의롭지 못하고, 작품 분량이 방대해서 출판하기 어려운 여건인데도 범우사 윤형두 회장께서 기꺼이 출판을 맡아주셨다. 본래는 5권 분량이었으나 사적 자료가 강조된 반면 재미가 반감될 수 있다고 해서 4권짜리로 압축했다.
책이 잘 팔려서 출판사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러 가지 자료 인용 부분은 작품 안에 출처를 명기했지만, 일부 누락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혹 누락으로 인한 결례가 있다면, 필자들의 너그러운 양해가 있기를 바란다. 소설 작품의 허구성으로 인해 등장인물을 일부 가명을 썼음을 부언(附言)한다.
― 2022년 6월 이계홍
역사적 인물의 행로를 더듬는 것은
우리 삶의 이정표를 찾는 길이다
― 충무공 금남군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 간행에 부쳐
(1)
역사에 대해 성찰하지 못한 민족은 반복된 역사를 갖는다고 했다. 나침반이 없는 항해와 같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과오를 다시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자에 들어 역사의식이 부족하거나 무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먹고 살기도 바쁜 세상에 역사를 달달 외운다고 해서 무슨 살림에 보탬이 되느냐고 냉소하는 이도 있다.
사실 상투적으로 역사 인물과 사건을 외는 것이 역사공부라고 생각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암기가 과연 우리 삶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나 누구의 말대로 역사는 박물관에 존치된 화석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다. 재구성되고 재해석되어야 하는 이유다. 특정 정권이나 특정 세력의 호불호에 따라 파기되거나 복원될 영역이 아니다.
한 시대의 사건과 인물들의 행로를 더듬는 것은 우리가 나아갈 바를 되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그런 취지에서 묻혀있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용한 삶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미래를 살아가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2)
조선조 중기의 무장 충무공 정충신(1576~1636) 장군 이야기를 우연한 자리에서 듣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평상시 역사에 관심이 있던 필자도 정충신 장군의 존재를 잘 몰랐다. 필자는 그렇다 치고, 이순신 장군과 똑같이 충무공 시호를 받은 금남군 정충신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데 놀랐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발발 직전까지 오직 군인 외길을 걸어온 금남군 정충신 장군의 일생은 드라마적 파노라마 바로 그 자체였다. 우리 역사상 가장 불행했던 시기인 선조ㆍ광해군ㆍ인조 대의 무장으로 시대 모순을 헤쳐나간 보기 드문 개혁파로서의 일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런데도 잘 몰랐다.
그 이유는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조 사회에서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는 한계 때문에 그의 활약상이 묻힌 측면이 있을 것이다. 주류 권력층에게 비주류로서 견제를 받은 점과 서민 계급 출신이라는 이유로 역사적으로 저평가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외교적 역할이 당시의 정치풍토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구조라는 점도 작용했다고 보여진다.
정충신 장군은 최전방의 무관이면서도 사서삼경과 천리에 능한 지식인이었으며, 외교와 첩보전에 밝아 광해군 시기, 명ㆍ청 양대 세력의 동향을 살피며 중립노선을 걷자고 주장한 장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현실적인 국제적 감각으로 중립외교와 개혁담론으로 나라를 새롭게 구성하자는 정치철학을 갖고 있었다. 상관인 장만 장군과 그의 사위인 최명길과 함께 주화파 논지를 폈다. 그는 후금국에 전하려는 선전포고문과 다름없는 조정의 서찰을 중간에 가로채 불살라버린 사건으로 귀양을 갔다.
정충신은 주화파인 최명길과 나눈 군사 대담집에서 현실주의에 입각해 친금 노선이 나라의 진로 방향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주류사회인 척화파로부터 배척을 받아 최명길과 함께 평생 비주류로 살았다. 그는 또 북방 변경 최일선에 있었기 때문에 중앙 정치무대에 자주 등장하지 못했다. 이런 것이 그가 역사에 크게 호명되지 못한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정충신 장군이 활동하던 시기에 중앙 정치는 당쟁의 소용돌이에 묻혀 정파끼리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선조ㆍ광해ㆍ인조 대, 명나라에 대한 충성 경쟁과 함께 동인 대 서인, 훈구 대 사림, 북인 대 남인, 대북 대 소북의 정치투쟁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원리주의, 공리공담에 빠져 나라가 허우적거릴 때, 오랑캐(여진―후금―청나라)를 외면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으나 양 파벌로부터 동시에 웬 생뚱맞은 논리냐며 배척받은 것이다. 사대부의 세계관이 이렇게 좁은 대신에 그들은 언제나 작은 것에 목숨 걸고 싸우는 진창 속에 파묻혀버렸다.
(3)
정충신의 군인 외길은 장엄했다. 소년시절 기축옥사(1589)를 겪고 임진왜란(1592) 때 이치ㆍ웅치전투에 소년병사로 참전하고, 이천오백 리 길을 장계를 들고 뛰고, 정유재란(1597)―이괄의 난(1623)―인조반정(1624)―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 직전까지 한 평생 무장으로서 피흘린 전선의 복판에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거친 직책은 만 16세에 무과에 차석으로 급제한 뒤 군기시정(軍器寺正)―선사포 첨사―조산보 만호―보을하진 첨사―포이 만호―창주 첨사―만포진 첨사―안주목사 겸 방어사―평안도 병마좌우후―이괄의 난 전부대장(前部大將)―영변대도호부사―팔도부원수―주사원수(舟師元帥)―오위도총부도총관―포도대장―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등이다.
직책이 말해주듯 생애 60년 동안 44년을 국토방위 최일선에 있었다. 오직 직업군인 외길의 경력으로서 충무공 시호를 받은 인물은 정충신이 유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세에 뚜렷하게 호출되지 못했다.
《남도일보》에 금남군 정충신 장군 일대기인 역사소설 〈깃발〉을 650회에 걸쳐 장기 연재한 것은 이렇듯 묻힌 역사적 인물을 복원하자는 취지였다. 필자는 특히 광주광역시의 주 도로이자 5ㆍ18 민주화항쟁의 본거지인 ‘금남로’가 정충신의 업적을 기려 내린 시호(諡號)인 ‘금남군’에서 유래된 점에 유의하면서 개혁적인 광주 정신과 일치된 정충신 장군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리고자 했다.
정충신은 임진왜란 3대 육전(陸戰) 중 하나인 이치ㆍ웅치대첩(전라도 금산ㆍ완주ㆍ무주ㆍ진안ㆍ장수)에서 소년 척후병으로 활동하며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전투 승리로 전라도가 왜군에 점령되지 않고, 아군 병력 충원은 물론 후방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하면서 이순신이 바다에서 왜군을 물리친 원동력이 되었다.
이치ㆍ웅치전 전과를 기록한 권율의 장계를 소년병사 정충신이 품에 안고 단 20여 일 만에 달려가 압록강변에서 명나라 배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선조에게 전달한 것은 그의 우국충정에서 나온 행동이다. 장계는 “호남이 지키고 있으니 도강하지 말아달라”는 권율의 간절한 사연이 담겨 있었다. 만약 왕이 압록강을 건넜다면 조선이란 나라는 영영 지도상에서 사라졌을지 모른다.
임진왜란은 전라도 군사들에 의해 승리한 전쟁이었다. 현대에 들어와 전라도 군사들의 활약상이 의외로 묻힌 것에 유의하면서 사적 자료를 통해 이들의 활동상을 주마간산격으로나마 복원하고자 노력했다. 이순신 장군 휘하의 전라좌수영과 이억기 장군이 거느린 전라우수영의 수군은 대부분 해남 진도 완도 강진 보성 장흥 순천 광양 여수 영광 함평 무안 출신 바닷가 청장년들이었다.
육상전에서는 광주목사이자 전라도순찰사 권율이 이끈 호남 관ㆍ의병들이 이치ㆍ웅치전에 이어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1593년 10월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목사 서예원이 도망치고, 도원수 김명원이 출진을 회피하는 가운데 진주땅에 들어간 김천일, 고종후, 부사 이종인, 병사 황진, 최경회, 임계영, 의기 논개 등 호남인들이 고군분투하다 최후를 맞았다.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호남의 남녀 노유들은 임금의 행재소 소요 식량은 물론 조선군과 명군, 의병들의 군량미를 조달하는 병참기지 역할을 다하였다(김환태 ‘호남의 구국 항쟁, 민족 자부심’ 일부 인용).
임진왜란 때의 장수들의 면면을 보면, 경상 우도의 정인홍 김면 곽재우, 충청도의 조헌, 함경도의 정문부가 있었으나 호남은 기라성 같은 의병장들이 임립(林立)해 있었다.
즉, 고경명 고인후 고종후 3부자, 김덕령 김덕홍 김덕보 3형제, 김천일, 백광언, 유팽로, 나대용(거북선 제작자), 선거이를 비롯하여, 이대원(함평), 위대기(장흥), 이종인(광주), 임계영(보성), 최경회(능주=화순), 김익복ㆍ양대박(남원), 변이중(장성ㆍ화차제작자), 정명세(고흥)가 있다. 또한 공시억, 황박, 정운, 김보원, 노인, 노흥, 이종인, 김극추, 유사경, 양응원, 문위세, 김제민, 고성후, 김억희, 김충선, 라덕명, 신여극, 김팽수, 이대유, 김율, 이인걸, 백민수 등 관ㆍ의병장 수뇌부만 해도 50여 명에 이르렀다. 타 지역에서 따를 수 없는 인물 분포다. 이러니 임진왜란은 전라도 병사와 전라도의 병참 지원에 의해 극복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숨은 이야기들을 전하고 싶었다.
그중 입지전적 인물인 정충신 장군 이야기를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사료의 부족과 발품의 부족, 그리고 무엇보다 아둔한 머리로 정충신 장군의 웅혼한 기상과 개혁 정신을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써내려갔던 것은 남도일보의 격려가 컸다. 대략 인터넷 클릭의 2만 5천뷰 중 필자의 연재소설이 10분의 1 정도를 차지한다는 말을 듣고 알게 모르게 용기를 냈다.
(4)
집필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허구 사이에서 고민했던 경우도 많다. 전기소설을 쓰기에 적합한 대상은 사료가 풍부한 인물인데, 사료의 빈곤을 메우기 위해서는 부득불 소설적 허구로 메울 수밖에 없었다. 있을 수 있는 진실을 차용해 쓴 것이다.
사료는 금성정씨 종친회(회장 정환민)가 보유하고 있는 세보 등 자료와 정환호 저 〈금남군 충무공 정충신 전기〉를 인용했다. 정충신 장군이 직접 쓴 《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과 만운집을 비롯하여, 금남집,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국조인물고, 광해군일기, 이조 5백년기담전, 택리지, 호남지방 임진왜란 사료집 등을 활용했다. 이 중에 정충신 장군의 일기가 집필에 큰 도움이 되었으나 청년기의 기록이 빈약해 청년기를 재생하는 데 상당부분 애를 먹었다.
사실은 청년기 기록물이 멸실되었는데, 이는 그것들을 몽땅 도둑맞았기 때문이다. 정 장군이 서울 반송방(오늘의 서대문구 냉천동)에 살 때 장군 집이라 하여 도둑이 물건 훔치러 들어갔다가 너무도 궁벽하게 사는지라 문서 궤짝을 들고 달아났는데 이 통에 일기 등 서책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입지전적 인물인 그는 의외로 전설적 일화가 많이 인터넷상에 올라 있다. 그런 자료도 일부 가져다 썼다. 대부분 출처를 밝혔으나 출처가 불분명한 것도 있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집필자 여러분의 넓은 양해를 구한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선뜻 출판을 맡아준 도서출판 범우사에 감사를 드린다. 그동안 책으로 내기 위해 몇 군데 출판사에 의사를 타진했지만 출판시장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대부분 응하지 않았다. 200자 원고지 7000장의 대하물이다 보니 5권 이상의 책이 나와야 하는데 한결같이 주저하였다. 범우사로서도 독자들이 끝까지 따라올 것인가 하고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흔히 역사소설은 베스트셀러 성격보다 스테디셀러 범주에 들기 때문에 범우사가 긴 호흡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한다.
이 소설이 나오기까지 격려한 분들이 적지 않았다. 이름을 일일이 올리며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 하나 길이길이 마음으로 간직하고자 한다. 다만 이 책 출판과 함께 어느덧 고2로 올라간 외손자 이형준과, 지난 해 12월 10일 태어난 손자 이재이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그 뜻을 대신하고자 한다.
― 2021년 1월
역사적 인물의 행로를 더듬는 것은
우리 삶의 이정표를 찾는 길이다
― 충무공 금남군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 간행에 부쳐
(1)
역사에 대해 성찰하지 못한 민족은 반복된 역사를 갖는다고 했다. 나침반이 없는 항해와 같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과오를 다시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자에 들어 역사의식이 부족하거나 무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먹고 살기도 바쁜 세상에 역사를 달달 외운다고 해서 무슨 살림에 보탬이 되느냐고 냉소하는 이도 있다.
사실 상투적으로 역사 인물과 사건을 외는 것이 역사공부라고 생각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암기가 과연 우리 삶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나 누구의 말대로 역사는 박물관에 존치된 화석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다. 재구성되고 재해석되어야 하는 이유다. 특정 정권이나 특정 세력의 호불호에 따라 파기되거나 복원될 영역이 아니다.
한 시대의 사건과 인물들의 행로를 더듬는 것은 우리가 나아갈 바를 되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그런 취지에서 묻혀있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용한 삶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미래를 살아가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2)
조선조 중기의 무장 충무공 정충신(1576~1636) 장군 이야기를 우연한 자리에서 듣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평상시 역사에 관심이 있던 필자도 정충신 장군의 존재를 잘 몰랐다. 필자는 그렇다 치고, 이순신 장군과 똑같이 충무공 시호를 받은 금남군 정충신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데 놀랐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발발 직전까지 오직 군인 외길을 걸어온 금남군 정충신 장군의 일생은 드라마적 파노라마 바로 그 자체였다. 우리 역사상 가장 불행했던 시기인 선조ㆍ광해군ㆍ인조 대의 무장으로 시대 모순을 헤쳐나간 보기 드문 개혁파로서의 일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런데도 잘 몰랐다.
그 이유는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조 사회에서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는 한계 때문에 그의 활약상이 묻힌 측면이 있을 것이다. 주류 권력층에게 비주류로서 견제를 받은 점과 서민 계급 출신이라는 이유로 역사적으로 저평가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외교적 역할이 당시의 정치풍토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구조라는 점도 작용했다고 보여진다.
정충신 장군은 최전방의 무관이면서도 사서삼경과 천리에 능한 지식인이었으며, 외교와 첩보전에 밝아 광해군 시기, 명ㆍ청 양대 세력의 동향을 살피며 중립노선을 걷자고 주장한 장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현실적인 국제적 감각으로 중립외교와 개혁담론으로 나라를 새롭게 구성하자는 정치철학을 갖고 있었다. 상관인 장만 장군과 그의 사위인 최명길과 함께 주화파 논지를 폈다. 그는 후금국에 전하려는 선전포고문과 다름없는 조정의 서찰을 중간에 가로채 불살라버린 사건으로 귀양을 갔다.
정충신은 주화파인 최명길과 나눈 군사 대담집에서 현실주의에 입각해 친금 노선이 나라의 진로 방향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주류사회인 척화파로부터 배척을 받아 최명길과 함께 평생 비주류로 살았다. 그는 또 북방 변경 최일선에 있었기 때문에 중앙 정치무대에 자주 등장하지 못했다. 이런 것이 그가 역사에 크게 호명되지 못한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정충신 장군이 활동하던 시기에 중앙 정치는 당쟁의 소용돌이에 묻혀 정파끼리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선조ㆍ광해ㆍ인조 대, 명나라에 대한 충성 경쟁과 함께 동인 대 서인, 훈구 대 사림, 북인 대 남인, 대북 대 소북의 정치투쟁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원리주의, 공리공담에 빠져 나라가 허우적거릴 때, 오랑캐(여진―후금―청나라)를 외면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으나 양 파벌로부터 동시에 웬 생뚱맞은 논리냐며 배척받은 것이다. 사대부의 세계관이 이렇게 좁은 대신에 그들은 언제나 작은 것에 목숨 걸고 싸우는 진창 속에 파묻혀버렸다.
(3)
정충신의 군인 외길은 장엄했다. 소년시절 기축옥사(1589)를 겪고 임진왜란(1592) 때 이치ㆍ웅치전투에 소년병사로 참전하고, 이천오백 리 길을 장계를 들고 뛰고, 정유재란(1597)―이괄의 난(1623)―인조반정(1624)―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 직전까지 한 평생 무장으로서 피흘린 전선의 복판에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거친 직책은 만 16세에 무과에 차석으로 급제한 뒤 군기시정(軍器寺正)―선사포 첨사―조산보 만호―보을하진 첨사―포이 만호―창주 첨사―만포진 첨사―안주목사 겸 방어사―평안도 병마좌우후―이괄의 난 전부대장(前部大將)―영변대도호부사―팔도부원수―주사원수(舟師元帥)―오위도총부도총관―포도대장―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등이다.
직책이 말해주듯 생애 60년 동안 44년을 국토방위 최일선에 있었다. 오직 직업군인 외길의 경력으로서 충무공 시호를 받은 인물은 정충신이 유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세에 뚜렷하게 호출되지 못했다.
《남도일보》에 금남군 정충신 장군 일대기인 역사소설 〈깃발〉을 650회에 걸쳐 장기 연재한 것은 이렇듯 묻힌 역사적 인물을 복원하자는 취지였다. 필자는 특히 광주광역시의 주 도로이자 5ㆍ18 민주화항쟁의 본거지인 ‘금남로’가 정충신의 업적을 기려 내린 시호(諡號)인 ‘금남군’에서 유래된 점에 유의하면서 개혁적인 광주 정신과 일치된 정충신 장군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리고자 했다.
정충신은 임진왜란 3대 육전(陸戰) 중 하나인 이치ㆍ웅치대첩(전라도 금산ㆍ완주ㆍ무주ㆍ진안ㆍ장수)에서 소년 척후병으로 활동하며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전투 승리로 전라도가 왜군에 점령되지 않고, 아군 병력 충원은 물론 후방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하면서 이순신이 바다에서 왜군을 물리친 원동력이 되었다.
이치ㆍ웅치전 전과를 기록한 권율의 장계를 소년병사 정충신이 품에 안고 단 20여 일 만에 달려가 압록강변에서 명나라 배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선조에게 전달한 것은 그의 우국충정에서 나온 행동이다. 장계는 “호남이 지키고 있으니 도강하지 말아달라”는 권율의 간절한 사연이 담겨 있었다. 만약 왕이 압록강을 건넜다면 조선이란 나라는 영영 지도상에서 사라졌을지 모른다.
임진왜란은 전라도 군사들에 의해 승리한 전쟁이었다. 현대에 들어와 전라도 군사들의 활약상이 의외로 묻힌 것에 유의하면서 사적 자료를 통해 이들의 활동상을 주마간산격으로나마 복원하고자 노력했다. 이순신 장군 휘하의 전라좌수영과 이억기 장군이 거느린 전라우수영의 수군은 대부분 해남 진도 완도 강진 보성 장흥 순천 광양 여수 영광 함평 무안 출신 바닷가 청장년들이었다.
육상전에서는 광주목사이자 전라도순찰사 권율이 이끈 호남 관ㆍ의병들이 이치ㆍ웅치전에 이어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1593년 10월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목사 서예원이 도망치고, 도원수 김명원이 출진을 회피하는 가운데 진주땅에 들어간 김천일, 고종후, 부사 이종인, 병사 황진, 최경회, 임계영, 의기 논개 등 호남인들이 고군분투하다 최후를 맞았다.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호남의 남녀 노유들은 임금의 행재소 소요 식량은 물론 조선군과 명군, 의병들의 군량미를 조달하는 병참기지 역할을 다하였다(김환태 ‘호남의 구국 항쟁, 민족 자부심’ 일부 인용).
임진왜란 때의 장수들의 면면을 보면, 경상 우도의 정인홍 김면 곽재우, 충청도의 조헌, 함경도의 정문부가 있었으나 호남은 기라성 같은 의병장들이 임립(林立)해 있었다.
즉, 고경명 고인후 고종후 3부자, 김덕령 김덕홍 김덕보 3형제, 김천일, 백광언, 유팽로, 나대용(거북선 제작자), 선거이를 비롯하여, 이대원(함평), 위대기(장흥), 이종인(광주), 임계영(보성), 최경회(능주=화순), 김익복ㆍ양대박(남원), 변이중(장성ㆍ화차제작자), 정명세(고흥)가 있다. 또한 공시억, 황박, 정운, 김보원, 노인, 노흥, 이종인, 김극추, 유사경, 양응원, 문위세, 김제민, 고성후, 김억희, 김충선, 라덕명, 신여극, 김팽수, 이대유, 김율, 이인걸, 백민수 등 관ㆍ의병장 수뇌부만 해도 50여 명에 이르렀다. 타 지역에서 따를 수 없는 인물 분포다. 이러니 임진왜란은 전라도 병사와 전라도의 병참 지원에 의해 극복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숨은 이야기들을 전하고 싶었다.
그중 입지전적 인물인 정충신 장군 이야기를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사료의 부족과 발품의 부족, 그리고 무엇보다 아둔한 머리로 정충신 장군의 웅혼한 기상과 개혁 정신을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써내려갔던 것은 남도일보의 격려가 컸다. 대략 인터넷 클릭의 2만 5천뷰 중 필자의 연재소설이 10분의 1 정도를 차지한다는 말을 듣고 알게 모르게 용기를 냈다.
(4)
집필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허구 사이에서 고민했던 경우도 많다. 전기소설을 쓰기에 적합한 대상은 사료가 풍부한 인물인데, 사료의 빈곤을 메우기 위해서는 부득불 소설적 허구로 메울 수밖에 없었다. 있을 수 있는 진실을 차용해 쓴 것이다.
사료는 금성정씨 종친회(회장 정환민)가 보유하고 있는 세보 등 자료와 정환호 저 〈금남군 충무공 정충신 전기〉를 인용했다. 정충신 장군이 직접 쓴 《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과 만운집을 비롯하여, 금남집,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국조인물고, 광해군일기, 이조 5백년기담전, 택리지, 호남지방 임진왜란 사료집 등을 활용했다. 이 중에 정충신 장군의 일기가 집필에 큰 도움이 되었으나 청년기의 기록이 빈약해 청년기를 재생하는 데 상당부분 애를 먹었다.
사실은 청년기 기록물이 멸실되었는데, 이는 그것들을 몽땅 도둑맞았기 때문이다. 정 장군이 서울 반송방(오늘의 서대문구 냉천동)에 살 때 장군 집이라 하여 도둑이 물건 훔치러 들어갔다가 너무도 궁벽하게 사는지라 문서 궤짝을 들고 달아났는데 이 통에 일기 등 서책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입지전적 인물인 그는 의외로 전설적 일화가 많이 인터넷상에 올라 있다. 그런 자료도 일부 가져다 썼다. 대부분 출처를 밝혔으나 출처가 불분명한 것도 있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집필자 여러분의 넓은 양해를 구한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선뜻 출판을 맡아준 도서출판 범우사에 감사를 드린다. 그동안 책으로 내기 위해 몇 군데 출판사에 의사를 타진했지만 출판시장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대부분 응하지 않았다. 200자 원고지 7000장의 대하물이다 보니 5권 이상의 책이 나와야 하는데 한결같이 주저하였다. 범우사로서도 독자들이 끝까지 따라올 것인가 하고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흔히 역사소설은 베스트셀러 성격보다 스테디셀러 범주에 들기 때문에 범우사가 긴 호흡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한다.
이 소설이 나오기까지 격려한 분들이 적지 않았다. 이름을 일일이 올리며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 하나 길이길이 마음으로 간직하고자 한다. 다만 이 책 출판과 함께 어느덧 고2로 올라간 외손자 이형준과, 지난 해 12월 10일 태어난 손자 이재이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그 뜻을 대신하고자 한다.
― 2021년 1월
역사적 인물의 행로를 더듬는 것은
우리 삶의 이정표를 찾는 길이다
― 충무공 금남군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 간행에 부쳐
(1)
역사에 대해 성찰하지 못한 민족은 반복된 역사를 갖는다고 했다. 나침반이 없는 항해와 같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과오를 다시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자에 들어 역사의식이 부족하거나 무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먹고 살기도 바쁜 세상에 역사를 달달 외운다고 해서 무슨 살림에 보탬이 되느냐고 냉소하는 이도 있다.
사실 상투적으로 역사 인물과 사건을 외는 것이 역사공부라고 생각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암기가 과연 우리 삶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나 누구의 말대로 역사는 박물관에 존치된 화석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다. 재구성되고 재해석되어야 하는 이유다. 특정 정권이나 특정 세력의 호불호에 따라 파기되거나 복원될 영역이 아니다.
한 시대의 사건과 인물들의 행로를 더듬는 것은 우리가 나아갈 바를 되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그런 취지에서 묻혀있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용한 삶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미래를 살아가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2)
조선조 중기의 무장 충무공 정충신(1576~1636) 장군 이야기를 우연한 자리에서 듣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평상시 역사에 관심이 있던 필자도 정충신 장군의 존재를 잘 몰랐다. 필자는 그렇다 치고, 이순신 장군과 똑같이 충무공 시호를 받은 금남군 정충신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데 놀랐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발발 직전까지 오직 군인 외길을 걸어온 금남군 정충신 장군의 일생은 드라마적 파노라마 바로 그 자체였다. 우리 역사상 가장 불행했던 시기인 선조ㆍ광해군ㆍ인조 대의 무장으로 시대 모순을 헤쳐나간 보기 드문 개혁파로서의 일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런데도 잘 몰랐다.
그 이유는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조 사회에서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는 한계 때문에 그의 활약상이 묻힌 측면이 있을 것이다. 주류 권력층에게 비주류로서 견제를 받은 점과 서민 계급 출신이라는 이유로 역사적으로 저평가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외교적 역할이 당시의 정치풍토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구조라는 점도 작용했다고 보여진다.
정충신 장군은 최전방의 무관이면서도 사서삼경과 천리에 능한 지식인이었으며, 외교와 첩보전에 밝아 광해군 시기, 명ㆍ청 양대 세력의 동향을 살피며 중립노선을 걷자고 주장한 장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현실적인 국제적 감각으로 중립외교와 개혁담론으로 나라를 새롭게 구성하자는 정치철학을 갖고 있었다. 상관인 장만 장군과 그의 사위인 최명길과 함께 주화파 논지를 폈다. 그는 후금국에 전하려는 선전포고문과 다름없는 조정의 서찰을 중간에 가로채 불살라버린 사건으로 귀양을 갔다.
정충신은 주화파인 최명길과 나눈 군사 대담집에서 현실주의에 입각해 친금 노선이 나라의 진로 방향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주류사회인 척화파로부터 배척을 받아 최명길과 함께 평생 비주류로 살았다. 그는 또 북방 변경 최일선에 있었기 때문에 중앙 정치무대에 자주 등장하지 못했다. 이런 것이 그가 역사에 크게 호명되지 못한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정충신 장군이 활동하던 시기에 중앙 정치는 당쟁의 소용돌이에 묻혀 정파끼리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선조ㆍ광해ㆍ인조 대, 명나라에 대한 충성 경쟁과 함께 동인 대 서인, 훈구 대 사림, 북인 대 남인, 대북 대 소북의 정치투쟁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원리주의, 공리공담에 빠져 나라가 허우적거릴 때, 오랑캐(여진―후금―청나라)를 외면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으나 양 파벌로부터 동시에 웬 생뚱맞은 논리냐며 배척받은 것이다. 사대부의 세계관이 이렇게 좁은 대신에 그들은 언제나 작은 것에 목숨 걸고 싸우는 진창 속에 파묻혀버렸다.
(3)
정충신의 군인 외길은 장엄했다. 소년시절 기축옥사(1589)를 겪고 임진왜란(1592) 때 이치ㆍ웅치전투에 소년병사로 참전하고, 이천오백 리 길을 장계를 들고 뛰고, 정유재란(1597)―이괄의 난(1623)―인조반정(1624)―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 직전까지 한 평생 무장으로서 피흘린 전선의 복판에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거친 직책은 만 16세에 무과에 차석으로 급제한 뒤 군기시정(軍器寺正)―선사포 첨사―조산보 만호―보을하진 첨사―포이 만호―창주 첨사―만포진 첨사―안주목사 겸 방어사―평안도 병마좌우후―이괄의 난 전부대장(前部大將)―영변대도호부사―팔도부원수―주사원수(舟師元帥)―오위도총부도총관―포도대장―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등이다.
직책이 말해주듯 생애 60년 동안 44년을 국토방위 최일선에 있었다. 오직 직업군인 외길의 경력으로서 충무공 시호를 받은 인물은 정충신이 유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세에 뚜렷하게 호출되지 못했다.
《남도일보》에 금남군 정충신 장군 일대기인 역사소설 〈깃발〉을 650회에 걸쳐 장기 연재한 것은 이렇듯 묻힌 역사적 인물을 복원하자는 취지였다. 필자는 특히 광주광역시의 주 도로이자 5ㆍ18 민주화항쟁의 본거지인 ‘금남로’가 정충신의 업적을 기려 내린 시호(諡號)인 ‘금남군’에서 유래된 점에 유의하면서 개혁적인 광주 정신과 일치된 정충신 장군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리고자 했다.
정충신은 임진왜란 3대 육전(陸戰) 중 하나인 이치ㆍ웅치대첩(전라도 금산ㆍ완주ㆍ무주ㆍ진안ㆍ장수)에서 소년 척후병으로 활동하며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전투 승리로 전라도가 왜군에 점령되지 않고, 아군 병력 충원은 물론 후방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하면서 이순신이 바다에서 왜군을 물리친 원동력이 되었다.
이치ㆍ웅치전 전과를 기록한 권율의 장계를 소년병사 정충신이 품에 안고 단 20여 일 만에 달려가 압록강변에서 명나라 배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선조에게 전달한 것은 그의 우국충정에서 나온 행동이다. 장계는 “호남이 지키고 있으니 도강하지 말아달라”는 권율의 간절한 사연이 담겨 있었다. 만약 왕이 압록강을 건넜다면 조선이란 나라는 영영 지도상에서 사라졌을지 모른다.
임진왜란은 전라도 군사들에 의해 승리한 전쟁이었다. 현대에 들어와 전라도 군사들의 활약상이 의외로 묻힌 것에 유의하면서 사적 자료를 통해 이들의 활동상을 주마간산격으로나마 복원하고자 노력했다. 이순신 장군 휘하의 전라좌수영과 이억기 장군이 거느린 전라우수영의 수군은 대부분 해남 진도 완도 강진 보성 장흥 순천 광양 여수 영광 함평 무안 출신 바닷가 청장년들이었다.
육상전에서는 광주목사이자 전라도순찰사 권율이 이끈 호남 관ㆍ의병들이 이치ㆍ웅치전에 이어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1593년 10월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목사 서예원이 도망치고, 도원수 김명원이 출진을 회피하는 가운데 진주땅에 들어간 김천일, 고종후, 부사 이종인, 병사 황진, 최경회, 임계영, 의기 논개 등 호남인들이 고군분투하다 최후를 맞았다.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호남의 남녀 노유들은 임금의 행재소 소요 식량은 물론 조선군과 명군, 의병들의 군량미를 조달하는 병참기지 역할을 다하였다(김환태 ‘호남의 구국 항쟁, 민족 자부심’ 일부 인용).
임진왜란 때의 장수들의 면면을 보면, 경상 우도의 정인홍 김면 곽재우, 충청도의 조헌, 함경도의 정문부가 있었으나 호남은 기라성 같은 의병장들이 임립(林立)해 있었다.
즉, 고경명 고인후 고종후 3부자, 김덕령 김덕홍 김덕보 3형제, 김천일, 백광언, 유팽로, 나대용(거북선 제작자), 선거이를 비롯하여, 이대원(함평), 위대기(장흥), 이종인(광주), 임계영(보성), 최경회(능주=화순), 김익복ㆍ양대박(남원), 변이중(장성ㆍ화차제작자), 정명세(고흥)가 있다. 또한 공시억, 황박, 정운, 김보원, 노인, 노흥, 이종인, 김극추, 유사경, 양응원, 문위세, 김제민, 고성후, 김억희, 김충선, 라덕명, 신여극, 김팽수, 이대유, 김율, 이인걸, 백민수 등 관ㆍ의병장 수뇌부만 해도 50여 명에 이르렀다. 타 지역에서 따를 수 없는 인물 분포다. 이러니 임진왜란은 전라도 병사와 전라도의 병참 지원에 의해 극복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숨은 이야기들을 전하고 싶었다.
그중 입지전적 인물인 정충신 장군 이야기를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사료의 부족과 발품의 부족, 그리고 무엇보다 아둔한 머리로 정충신 장군의 웅혼한 기상과 개혁 정신을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써내려갔던 것은 남도일보의 격려가 컸다. 대략 인터넷 클릭의 2만 5천뷰 중 필자의 연재소설이 10분의 1 정도를 차지한다는 말을 듣고 알게 모르게 용기를 냈다.
(4)
집필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허구 사이에서 고민했던 경우도 많다. 전기소설을 쓰기에 적합한 대상은 사료가 풍부한 인물인데, 사료의 빈곤을 메우기 위해서는 부득불 소설적 허구로 메울 수밖에 없었다. 있을 수 있는 진실을 차용해 쓴 것이다.
사료는 금성정씨 종친회(회장 정환민)가 보유하고 있는 세보 등 자료와 정환호 저 〈금남군 충무공 정충신 전기〉를 인용했다. 정충신 장군이 직접 쓴 《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과 만운집을 비롯하여, 금남집,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국조인물고, 광해군일기, 이조 5백년기담전, 택리지, 호남지방 임진왜란 사료집 등을 활용했다. 이 중에 정충신 장군의 일기가 집필에 큰 도움이 되었으나 청년기의 기록이 빈약해 청년기를 재생하는 데 상당부분 애를 먹었다.
사실은 청년기 기록물이 멸실되었는데, 이는 그것들을 몽땅 도둑맞았기 때문이다. 정 장군이 서울 반송방(오늘의 서대문구 냉천동)에 살 때 장군 집이라 하여 도둑이 물건 훔치러 들어갔다가 너무도 궁벽하게 사는지라 문서 궤짝을 들고 달아났는데 이 통에 일기 등 서책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입지전적 인물인 그는 의외로 전설적 일화가 많이 인터넷상에 올라 있다. 그런 자료도 일부 가져다 썼다. 대부분 출처를 밝혔으나 출처가 불분명한 것도 있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집필자 여러분의 넓은 양해를 구한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선뜻 출판을 맡아준 도서출판 범우사에 감사를 드린다. 그동안 책으로 내기 위해 몇 군데 출판사에 의사를 타진했지만 출판시장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대부분 응하지 않았다. 200자 원고지 7000장의 대하물이다 보니 5권 이상의 책이 나와야 하는데 한결같이 주저하였다. 범우사로서도 독자들이 끝까지 따라올 것인가 하고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흔히 역사소설은 베스트셀러 성격보다 스테디셀러 범주에 들기 때문에 범우사가 긴 호흡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한다.
이 소설이 나오기까지 격려한 분들이 적지 않았다. 이름을 일일이 올리며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 하나 길이길이 마음으로 간직하고자 한다. 다만 이 책 출판과 함께 어느덧 고2로 올라간 외손자 이형준과, 지난 해 12월 10일 태어난 손자 이재이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그 뜻을 대신하고자 한다.
― 2021년 1월
역사적 인물의 행로를 더듬는 것은
우리 삶의 이정표를 찾는 길이다
― 충무공 금남군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 간행에 부쳐
(1)
역사에 대해 성찰하지 못한 민족은 반복된 역사를 갖는다고 했다. 나침반이 없는 항해와 같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과오를 다시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자에 들어 역사의식이 부족하거나 무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먹고 살기도 바쁜 세상에 역사를 달달 외운다고 해서 무슨 살림에 보탬이 되느냐고 냉소하는 이도 있다.
사실 상투적으로 역사 인물과 사건을 외는 것이 역사공부라고 생각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암기가 과연 우리 삶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나 누구의 말대로 역사는 박물관에 존치된 화석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다. 재구성되고 재해석되어야 하는 이유다. 특정 정권이나 특정 세력의 호불호에 따라 파기되거나 복원될 영역이 아니다.
한 시대의 사건과 인물들의 행로를 더듬는 것은 우리가 나아갈 바를 되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그런 취지에서 묻혀있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용한 삶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미래를 살아가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2)
조선조 중기의 무장 충무공 정충신(1576~1636) 장군 이야기를 우연한 자리에서 듣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평상시 역사에 관심이 있던 필자도 정충신 장군의 존재를 잘 몰랐다. 필자는 그렇다 치고, 이순신 장군과 똑같이 충무공 시호를 받은 금남군 정충신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데 놀랐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발발 직전까지 오직 군인 외길을 걸어온 금남군 정충신 장군의 일생은 드라마적 파노라마 바로 그 자체였다. 우리 역사상 가장 불행했던 시기인 선조ㆍ광해군ㆍ인조 대의 무장으로 시대 모순을 헤쳐나간 보기 드문 개혁파로서의 일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런데도 잘 몰랐다.
그 이유는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조 사회에서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는 한계 때문에 그의 활약상이 묻힌 측면이 있을 것이다. 주류 권력층에게 비주류로서 견제를 받은 점과 서민 계급 출신이라는 이유로 역사적으로 저평가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외교적 역할이 당시의 정치풍토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구조라는 점도 작용했다고 보여진다.
정충신 장군은 최전방의 무관이면서도 사서삼경과 천리에 능한 지식인이었으며, 외교와 첩보전에 밝아 광해군 시기, 명ㆍ청 양대 세력의 동향을 살피며 중립노선을 걷자고 주장한 장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현실적인 국제적 감각으로 중립외교와 개혁담론으로 나라를 새롭게 구성하자는 정치철학을 갖고 있었다. 상관인 장만 장군과 그의 사위인 최명길과 함께 주화파 논지를 폈다. 그는 후금국에 전하려는 선전포고문과 다름없는 조정의 서찰을 중간에 가로채 불살라버린 사건으로 귀양을 갔다.
정충신은 주화파인 최명길과 나눈 군사 대담집에서 현실주의에 입각해 친금 노선이 나라의 진로 방향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주류사회인 척화파로부터 배척을 받아 최명길과 함께 평생 비주류로 살았다. 그는 또 북방 변경 최일선에 있었기 때문에 중앙 정치무대에 자주 등장하지 못했다. 이런 것이 그가 역사에 크게 호명되지 못한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정충신 장군이 활동하던 시기에 중앙 정치는 당쟁의 소용돌이에 묻혀 정파끼리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선조ㆍ광해ㆍ인조 대, 명나라에 대한 충성 경쟁과 함께 동인 대 서인, 훈구 대 사림, 북인 대 남인, 대북 대 소북의 정치투쟁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원리주의, 공리공담에 빠져 나라가 허우적거릴 때, 오랑캐(여진―후금―청나라)를 외면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으나 양 파벌로부터 동시에 웬 생뚱맞은 논리냐며 배척받은 것이다. 사대부의 세계관이 이렇게 좁은 대신에 그들은 언제나 작은 것에 목숨 걸고 싸우는 진창 속에 파묻혀버렸다.
(3)
정충신의 군인 외길은 장엄했다. 소년시절 기축옥사(1589)를 겪고 임진왜란(1592) 때 이치ㆍ웅치전투에 소년병사로 참전하고, 이천오백 리 길을 장계를 들고 뛰고, 정유재란(1597)―이괄의 난(1623)―인조반정(1624)―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 직전까지 한 평생 무장으로서 피흘린 전선의 복판에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거친 직책은 만 16세에 무과에 차석으로 급제한 뒤 군기시정(軍器寺正)―선사포 첨사―조산보 만호―보을하진 첨사―포이 만호―창주 첨사―만포진 첨사―안주목사 겸 방어사―평안도 병마좌우후―이괄의 난 전부대장(前部大將)―영변대도호부사―팔도부원수―주사원수(舟師元帥)―오위도총부도총관―포도대장―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등이다.
직책이 말해주듯 생애 60년 동안 44년을 국토방위 최일선에 있었다. 오직 직업군인 외길의 경력으로서 충무공 시호를 받은 인물은 정충신이 유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세에 뚜렷하게 호출되지 못했다.
《남도일보》에 금남군 정충신 장군 일대기인 역사소설 〈깃발〉을 650회에 걸쳐 장기 연재한 것은 이렇듯 묻힌 역사적 인물을 복원하자는 취지였다. 필자는 특히 광주광역시의 주 도로이자 5ㆍ18 민주화항쟁의 본거지인 ‘금남로’가 정충신의 업적을 기려 내린 시호(諡號)인 ‘금남군’에서 유래된 점에 유의하면서 개혁적인 광주 정신과 일치된 정충신 장군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리고자 했다.
정충신은 임진왜란 3대 육전(陸戰) 중 하나인 이치ㆍ웅치대첩(전라도 금산ㆍ완주ㆍ무주ㆍ진안ㆍ장수)에서 소년 척후병으로 활동하며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전투 승리로 전라도가 왜군에 점령되지 않고, 아군 병력 충원은 물론 후방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하면서 이순신이 바다에서 왜군을 물리친 원동력이 되었다.
이치ㆍ웅치전 전과를 기록한 권율의 장계를 소년병사 정충신이 품에 안고 단 20여 일 만에 달려가 압록강변에서 명나라 배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선조에게 전달한 것은 그의 우국충정에서 나온 행동이다. 장계는 “호남이 지키고 있으니 도강하지 말아달라”는 권율의 간절한 사연이 담겨 있었다. 만약 왕이 압록강을 건넜다면 조선이란 나라는 영영 지도상에서 사라졌을지 모른다.
임진왜란은 전라도 군사들에 의해 승리한 전쟁이었다. 현대에 들어와 전라도 군사들의 활약상이 의외로 묻힌 것에 유의하면서 사적 자료를 통해 이들의 활동상을 주마간산격으로나마 복원하고자 노력했다. 이순신 장군 휘하의 전라좌수영과 이억기 장군이 거느린 전라우수영의 수군은 대부분 해남 진도 완도 강진 보성 장흥 순천 광양 여수 영광 함평 무안 출신 바닷가 청장년들이었다.
육상전에서는 광주목사이자 전라도순찰사 권율이 이끈 호남 관ㆍ의병들이 이치ㆍ웅치전에 이어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1593년 10월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목사 서예원이 도망치고, 도원수 김명원이 출진을 회피하는 가운데 진주땅에 들어간 김천일, 고종후, 부사 이종인, 병사 황진, 최경회, 임계영, 의기 논개 등 호남인들이 고군분투하다 최후를 맞았다.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호남의 남녀 노유들은 임금의 행재소 소요 식량은 물론 조선군과 명군, 의병들의 군량미를 조달하는 병참기지 역할을 다하였다(김환태 ‘호남의 구국 항쟁, 민족 자부심’ 일부 인용).
임진왜란 때의 장수들의 면면을 보면, 경상 우도의 정인홍 김면 곽재우, 충청도의 조헌, 함경도의 정문부가 있었으나 호남은 기라성 같은 의병장들이 임립(林立)해 있었다.
즉, 고경명 고인후 고종후 3부자, 김덕령 김덕홍 김덕보 3형제, 김천일, 백광언, 유팽로, 나대용(거북선 제작자), 선거이를 비롯하여, 이대원(함평), 위대기(장흥), 이종인(광주), 임계영(보성), 최경회(능주=화순), 김익복ㆍ양대박(남원), 변이중(장성ㆍ화차제작자), 정명세(고흥)가 있다. 또한 공시억, 황박, 정운, 김보원, 노인, 노흥, 이종인, 김극추, 유사경, 양응원, 문위세, 김제민, 고성후, 김억희, 김충선, 라덕명, 신여극, 김팽수, 이대유, 김율, 이인걸, 백민수 등 관ㆍ의병장 수뇌부만 해도 50여 명에 이르렀다. 타 지역에서 따를 수 없는 인물 분포다. 이러니 임진왜란은 전라도 병사와 전라도의 병참 지원에 의해 극복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숨은 이야기들을 전하고 싶었다.
그중 입지전적 인물인 정충신 장군 이야기를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사료의 부족과 발품의 부족, 그리고 무엇보다 아둔한 머리로 정충신 장군의 웅혼한 기상과 개혁 정신을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써내려갔던 것은 남도일보의 격려가 컸다. 대략 인터넷 클릭의 2만 5천뷰 중 필자의 연재소설이 10분의 1 정도를 차지한다는 말을 듣고 알게 모르게 용기를 냈다.
(4)
집필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허구 사이에서 고민했던 경우도 많다. 전기소설을 쓰기에 적합한 대상은 사료가 풍부한 인물인데, 사료의 빈곤을 메우기 위해서는 부득불 소설적 허구로 메울 수밖에 없었다. 있을 수 있는 진실을 차용해 쓴 것이다.
사료는 금성정씨 종친회(회장 정환민)가 보유하고 있는 세보 등 자료와 정환호 저 〈금남군 충무공 정충신 전기〉를 인용했다. 정충신 장군이 직접 쓴 《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과 만운집을 비롯하여, 금남집,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국조인물고, 광해군일기, 이조 5백년기담전, 택리지, 호남지방 임진왜란 사료집 등을 활용했다. 이 중에 정충신 장군의 일기가 집필에 큰 도움이 되었으나 청년기의 기록이 빈약해 청년기를 재생하는 데 상당부분 애를 먹었다.
사실은 청년기 기록물이 멸실되었는데, 이는 그것들을 몽땅 도둑맞았기 때문이다. 정 장군이 서울 반송방(오늘의 서대문구 냉천동)에 살 때 장군 집이라 하여 도둑이 물건 훔치러 들어갔다가 너무도 궁벽하게 사는지라 문서 궤짝을 들고 달아났는데 이 통에 일기 등 서책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입지전적 인물인 그는 의외로 전설적 일화가 많이 인터넷상에 올라 있다. 그런 자료도 일부 가져다 썼다. 대부분 출처를 밝혔으나 출처가 불분명한 것도 있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집필자 여러분의 넓은 양해를 구한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선뜻 출판을 맡아준 도서출판 범우사에 감사를 드린다. 그동안 책으로 내기 위해 몇 군데 출판사에 의사를 타진했지만 출판시장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대부분 응하지 않았다. 200자 원고지 7000장의 대하물이다 보니 5권 이상의 책이 나와야 하는데 한결같이 주저하였다. 범우사로서도 독자들이 끝까지 따라올 것인가 하고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흔히 역사소설은 베스트셀러 성격보다 스테디셀러 범주에 들기 때문에 범우사가 긴 호흡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한다.
이 소설이 나오기까지 격려한 분들이 적지 않았다. 이름을 일일이 올리며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 하나 길이길이 마음으로 간직하고자 한다. 다만 이 책 출판과 함께 어느덧 고2로 올라간 외손자 이형준과, 지난 해 12월 10일 태어난 손자 이재이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그 뜻을 대신하고자 한다.
― 2021년 1월
역사적 인물의 행로를 더듬는 것은
우리 삶의 이정표를 찾는 길이다
― 충무공 금남군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 간행에 부쳐
(1)
역사에 대해 성찰하지 못한 민족은 반복된 역사를 갖는다고 했다. 나침반이 없는 항해와 같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과오를 다시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자에 들어 역사의식이 부족하거나 무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먹고 살기도 바쁜 세상에 역사를 달달 외운다고 해서 무슨 살림에 보탬이 되느냐고 냉소하는 이도 있다.
사실 상투적으로 역사 인물과 사건을 외는 것이 역사공부라고 생각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암기가 과연 우리 삶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나 누구의 말대로 역사는 박물관에 존치된 화석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다. 재구성되고 재해석되어야 하는 이유다. 특정 정권이나 특정 세력의 호불호에 따라 파기되거나 복원될 영역이 아니다.
한 시대의 사건과 인물들의 행로를 더듬는 것은 우리가 나아갈 바를 되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그런 취지에서 묻혀있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용한 삶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미래를 살아가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2)
조선조 중기의 무장 충무공 정충신(1576~1636) 장군 이야기를 우연한 자리에서 듣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평상시 역사에 관심이 있던 필자도 정충신 장군의 존재를 잘 몰랐다. 필자는 그렇다 치고, 이순신 장군과 똑같이 충무공 시호를 받은 금남군 정충신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데 놀랐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발발 직전까지 오직 군인 외길을 걸어온 금남군 정충신 장군의 일생은 드라마적 파노라마 바로 그 자체였다. 우리 역사상 가장 불행했던 시기인 선조ㆍ광해군ㆍ인조 대의 무장으로 시대 모순을 헤쳐나간 보기 드문 개혁파로서의 일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런데도 잘 몰랐다.
그 이유는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조 사회에서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는 한계 때문에 그의 활약상이 묻힌 측면이 있을 것이다. 주류 권력층에게 비주류로서 견제를 받은 점과 서민 계급 출신이라는 이유로 역사적으로 저평가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외교적 역할이 당시의 정치풍토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구조라는 점도 작용했다고 보여진다.
정충신 장군은 최전방의 무관이면서도 사서삼경과 천리에 능한 지식인이었으며, 외교와 첩보전에 밝아 광해군 시기, 명ㆍ청 양대 세력의 동향을 살피며 중립노선을 걷자고 주장한 장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현실적인 국제적 감각으로 중립외교와 개혁담론으로 나라를 새롭게 구성하자는 정치철학을 갖고 있었다. 상관인 장만 장군과 그의 사위인 최명길과 함께 주화파 논지를 폈다. 그는 후금국에 전하려는 선전포고문과 다름없는 조정의 서찰을 중간에 가로채 불살라버린 사건으로 귀양을 갔다.
정충신은 주화파인 최명길과 나눈 군사 대담집에서 현실주의에 입각해 친금 노선이 나라의 진로 방향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주류사회인 척화파로부터 배척을 받아 최명길과 함께 평생 비주류로 살았다. 그는 또 북방 변경 최일선에 있었기 때문에 중앙 정치무대에 자주 등장하지 못했다. 이런 것이 그가 역사에 크게 호명되지 못한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정충신 장군이 활동하던 시기에 중앙 정치는 당쟁의 소용돌이에 묻혀 정파끼리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선조ㆍ광해ㆍ인조 대, 명나라에 대한 충성 경쟁과 함께 동인 대 서인, 훈구 대 사림, 북인 대 남인, 대북 대 소북의 정치투쟁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원리주의, 공리공담에 빠져 나라가 허우적거릴 때, 오랑캐(여진―후금―청나라)를 외면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으나 양 파벌로부터 동시에 웬 생뚱맞은 논리냐며 배척받은 것이다. 사대부의 세계관이 이렇게 좁은 대신에 그들은 언제나 작은 것에 목숨 걸고 싸우는 진창 속에 파묻혀버렸다.
(3)
정충신의 군인 외길은 장엄했다. 소년시절 기축옥사(1589)를 겪고 임진왜란(1592) 때 이치ㆍ웅치전투에 소년병사로 참전하고, 이천오백 리 길을 장계를 들고 뛰고, 정유재란(1597)―이괄의 난(1623)―인조반정(1624)―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 직전까지 한 평생 무장으로서 피흘린 전선의 복판에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거친 직책은 만 16세에 무과에 차석으로 급제한 뒤 군기시정(軍器寺正)―선사포 첨사―조산보 만호―보을하진 첨사―포이 만호―창주 첨사―만포진 첨사―안주목사 겸 방어사―평안도 병마좌우후―이괄의 난 전부대장(前部大將)―영변대도호부사―팔도부원수―주사원수(舟師元帥)―오위도총부도총관―포도대장―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등이다.
직책이 말해주듯 생애 60년 동안 44년을 국토방위 최일선에 있었다. 오직 직업군인 외길의 경력으로서 충무공 시호를 받은 인물은 정충신이 유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세에 뚜렷하게 호출되지 못했다.
《남도일보》에 금남군 정충신 장군 일대기인 역사소설 〈깃발〉을 650회에 걸쳐 장기 연재한 것은 이렇듯 묻힌 역사적 인물을 복원하자는 취지였다. 필자는 특히 광주광역시의 주 도로이자 5ㆍ18 민주화항쟁의 본거지인 ‘금남로’가 정충신의 업적을 기려 내린 시호(諡號)인 ‘금남군’에서 유래된 점에 유의하면서 개혁적인 광주 정신과 일치된 정충신 장군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리고자 했다.
정충신은 임진왜란 3대 육전(陸戰) 중 하나인 이치ㆍ웅치대첩(전라도 금산ㆍ완주ㆍ무주ㆍ진안ㆍ장수)에서 소년 척후병으로 활동하며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전투 승리로 전라도가 왜군에 점령되지 않고, 아군 병력 충원은 물론 후방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하면서 이순신이 바다에서 왜군을 물리친 원동력이 되었다.
이치ㆍ웅치전 전과를 기록한 권율의 장계를 소년병사 정충신이 품에 안고 단 20여 일 만에 달려가 압록강변에서 명나라 배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선조에게 전달한 것은 그의 우국충정에서 나온 행동이다. 장계는 “호남이 지키고 있으니 도강하지 말아달라”는 권율의 간절한 사연이 담겨 있었다. 만약 왕이 압록강을 건넜다면 조선이란 나라는 영영 지도상에서 사라졌을지 모른다.
임진왜란은 전라도 군사들에 의해 승리한 전쟁이었다. 현대에 들어와 전라도 군사들의 활약상이 의외로 묻힌 것에 유의하면서 사적 자료를 통해 이들의 활동상을 주마간산격으로나마 복원하고자 노력했다. 이순신 장군 휘하의 전라좌수영과 이억기 장군이 거느린 전라우수영의 수군은 대부분 해남 진도 완도 강진 보성 장흥 순천 광양 여수 영광 함평 무안 출신 바닷가 청장년들이었다.
육상전에서는 광주목사이자 전라도순찰사 권율이 이끈 호남 관ㆍ의병들이 이치ㆍ웅치전에 이어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1593년 10월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목사 서예원이 도망치고, 도원수 김명원이 출진을 회피하는 가운데 진주땅에 들어간 김천일, 고종후, 부사 이종인, 병사 황진, 최경회, 임계영, 의기 논개 등 호남인들이 고군분투하다 최후를 맞았다.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호남의 남녀 노유들은 임금의 행재소 소요 식량은 물론 조선군과 명군, 의병들의 군량미를 조달하는 병참기지 역할을 다하였다(김환태 ‘호남의 구국 항쟁, 민족 자부심’ 일부 인용).
임진왜란 때의 장수들의 면면을 보면, 경상 우도의 정인홍 김면 곽재우, 충청도의 조헌, 함경도의 정문부가 있었으나 호남은 기라성 같은 의병장들이 임립(林立)해 있었다.
즉, 고경명 고인후 고종후 3부자, 김덕령 김덕홍 김덕보 3형제, 김천일, 백광언, 유팽로, 나대용(거북선 제작자), 선거이를 비롯하여, 이대원(함평), 위대기(장흥), 이종인(광주), 임계영(보성), 최경회(능주=화순), 김익복ㆍ양대박(남원), 변이중(장성ㆍ화차제작자), 정명세(고흥)가 있다. 또한 공시억, 황박, 정운, 김보원, 노인, 노흥, 이종인, 김극추, 유사경, 양응원, 문위세, 김제민, 고성후, 김억희, 김충선, 라덕명, 신여극, 김팽수, 이대유, 김율, 이인걸, 백민수 등 관ㆍ의병장 수뇌부만 해도 50여 명에 이르렀다. 타 지역에서 따를 수 없는 인물 분포다. 이러니 임진왜란은 전라도 병사와 전라도의 병참 지원에 의해 극복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숨은 이야기들을 전하고 싶었다.
그중 입지전적 인물인 정충신 장군 이야기를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사료의 부족과 발품의 부족, 그리고 무엇보다 아둔한 머리로 정충신 장군의 웅혼한 기상과 개혁 정신을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써내려갔던 것은 남도일보의 격려가 컸다. 대략 인터넷 클릭의 2만 5천뷰 중 필자의 연재소설이 10분의 1 정도를 차지한다는 말을 듣고 알게 모르게 용기를 냈다.
(4)
집필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허구 사이에서 고민했던 경우도 많다. 전기소설을 쓰기에 적합한 대상은 사료가 풍부한 인물인데, 사료의 빈곤을 메우기 위해서는 부득불 소설적 허구로 메울 수밖에 없었다. 있을 수 있는 진실을 차용해 쓴 것이다.
사료는 금성정씨 종친회(회장 정환민)가 보유하고 있는 세보 등 자료와 정환호 저 〈금남군 충무공 정충신 전기〉를 인용했다. 정충신 장군이 직접 쓴 《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과 만운집을 비롯하여, 금남집,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국조인물고, 광해군일기, 이조 5백년기담전, 택리지, 호남지방 임진왜란 사료집 등을 활용했다. 이 중에 정충신 장군의 일기가 집필에 큰 도움이 되었으나 청년기의 기록이 빈약해 청년기를 재생하는 데 상당부분 애를 먹었다.
사실은 청년기 기록물이 멸실되었는데, 이는 그것들을 몽땅 도둑맞았기 때문이다. 정 장군이 서울 반송방(오늘의 서대문구 냉천동)에 살 때 장군 집이라 하여 도둑이 물건 훔치러 들어갔다가 너무도 궁벽하게 사는지라 문서 궤짝을 들고 달아났는데 이 통에 일기 등 서책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입지전적 인물인 그는 의외로 전설적 일화가 많이 인터넷상에 올라 있다. 그런 자료도 일부 가져다 썼다. 대부분 출처를 밝혔으나 출처가 불분명한 것도 있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집필자 여러분의 넓은 양해를 구한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선뜻 출판을 맡아준 도서출판 범우사에 감사를 드린다. 그동안 책으로 내기 위해 몇 군데 출판사에 의사를 타진했지만 출판시장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대부분 응하지 않았다. 200자 원고지 7000장의 대하물이다 보니 5권 이상의 책이 나와야 하는데 한결같이 주저하였다. 범우사로서도 독자들이 끝까지 따라올 것인가 하고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흔히 역사소설은 베스트셀러 성격보다 스테디셀러 범주에 들기 때문에 범우사가 긴 호흡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한다.
이 소설이 나오기까지 격려한 분들이 적지 않았다. 이름을 일일이 올리며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 하나 길이길이 마음으로 간직하고자 한다. 다만 이 책 출판과 함께 어느덧 고2로 올라간 외손자 이형준과, 지난 해 12월 10일 태어난 손자 이재이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그 뜻을 대신하고자 한다.
― 2021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