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와서 섬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지도 증도 압해도 팔금도 안좌도 대야도 신도 하의도 도초도 비금도 이렇게 돌아다니다, 결국 우이도로 왔다. 우이도는 24년 동안 찾아온 섬이라 반은 내 고향 같다. 여기 오니 돌아가고 싶지 않다. 24년 동안 찾아왔어도 알고 지내는 사람이라곤 민박집 주인 내외 밖에 없다. 그것으로 족하다.
그간 죽은 사람도 있고 뭍으로 나간 사람도 있다. 마을 전체가 텅 빈 곳도 있다. 그러나 그 백사장, 그 게 구멍, 그 염소들은 여전히 파돗소리를 들으며 그곳에 있다. 나도 그들처럼 파돗소리가 좋다.
고독이 얼마나 많은 시를 불러오는지, 외딴 섬을 혼자 걸어본 사람일면 알 거다. 나는 섬에 발붙이며 고독을 알았고 고독을 알면서 시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시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시에는 시가 그리워하는 대상이 있다. 고독 속에 한 여인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시 쓰는 사람만이 아니다. 나는 그런 여인과 사랑을 속삭이듯 <그 사람 내게로 오네>를 썼다. 그러나 황진이를 소문 그대로의 삼절(三絶)로 내세우지 않았다. 나의 기억에는 황진이의 재색도 없고 거문고 소리도 없다. 다만 그녀가 남겨놓은 몇 편의 시가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게 했다. 이 시를 다 쓰고서야 그녀의 거문고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서화담의 올곧은 가난과 시대의 험난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왠지 진이가 슬퍼 보였다.
고독이 얼마나 많은 시를 불러오는지, 외딴 섬을 혼자 걸어본 사람이면 알 거다. 나는 섬에 발붙이며 고독을 알았고 고독을 알면서 시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시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시에는 시가 그리워하는 대상이 있다. 고독 속에 한 여인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시 쓰는 사람만이 아니다. 나는 그런 여인과 사랑을 속삭이듯 ‘그 사람 내게로 오네’를 썼다. 그렇지만 황진이를 소문 그대로 송도 삼절三絶로 내세우지는 않았다. 나의 기억에는 황진이의 재색도 없고 거문고 소리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가 남겨놓은 몇 편의 시가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게 했다. 그리고 이 시를 다 쓰고서야 그녀의 거문고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서화담의 올곧은 가난과 시대의 험난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왠지 진이가 슬퍼 보였다.
햇빛이 쨍쨍 쪼이는 날 어느 날이고 제주도 성산포에 가거든 이 시집을 가져가십시오. 이 시집의 고향은 성산포랍니다. 일출봉에서 우도 쪽을 바라보며 시집을 펴면 시집 속에 든 활자들이 모두 바다로 뛰어들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 시집에서 시를 읽지 않고 바다에서 시를 읽을 것입니다. 그 때 당신은 이 시집의 시를 읽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시를 읽는 것입니다. 성산포에 가거든 이 시집을 가지고 가십시오. 이 시집의 고향은 성산포랍니다. 1978년 - 머리말
신도출판사에서 500부를 찍어낸 지 9년 만에, 동천사에서 20년 동안(1987~2007) 베스트셀러 10위권에 올려놨고 끈질긴 스테디셀러에도 걸쳐놨다. 그러다가 다시 ‘우리글’로 온 것인데, 한 권의 시집이 소멸되지 않고 저자가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새로운 독자를 찾아 나선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기쁨을 독자들과 함께 하고 싶다. 2008년 7월 10일 - 다시《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펴내며
우도엔 사랑이 있다. 우도에 가면 사랑이 생긴다. 하고수동백사장을 거닐다 자기도 모르게 '사랑'이라는 두 글자를 모래밭에 써놓고 수평선을 바라본다. 해질 무렵 일출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두 젊은이에게 셔터를 눌러주는 것만으로도 사랑의 행복을 느낀다. 사랑이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우도다. 추억은 아름다운 곳에서 만들어야 오래오래 아름답게 남는다. 시인은 시가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우도는 시가 있는 섬이다.
나의 시를 연필로 다시 쓴다. 붓만 가지고 몇 백 년 써오던 글을 불과 70년 사이에 붓에서 연필로 연필에서 볼펜으로, 그러다가 워드, 이제 컴퓨터 없이는 시를 쓰지 못한다. 그렇게 변해버린 세월인데 그 속에서 나의 시는 얼마나 변했을까 하는 호기심이 나를 자극한다. 지팡이를 짚고 옛집을 찾아가듯 연필로 더듬더듬 찾아가는 나의 시혼(詩魂), 얼마나 외로운 데서 혼자 살고 있을까. 빨리 만나고 싶다.
나는 시를 쓰며 누군가를 뒤쫓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난고 김병연이다. 시인이라면 무조건 김삿갓 같은 사람이었으면 한 적이 있다.
나는 오랫동안 찾아다니던 섬을 접어두고 김삿갓을 찾아 뭍으로 헤맸다. 그러기 위해 제일 먼저 영월 어둔이골로 들어갔다. 그곳은 김삿갓이 집을 나가기 전에 가족들과 살았던 곳이다. 그곳 현씨 집엣거 산나물을 먹으며 마대산 닷냥재를 오르내렸다. 김삿갓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섬을 떠돌며 시를 써온 터라 섬 소리만 들어도 토끼 귀가 되는 버릇이 생겼는데, 세월호 침몰 후에는 떠 있는 섬들이 모두 가라앉을 것 같아 불안하다.
맹골도로 가는 길이 더 거칠게 일렁이고, 안개가 더 두꺼워 보인다. 아니 꿈까지도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기분이다.
1년, 2년, 3년, 4년 이렇게 물속으로 가라앉는 슬픔, 슬픔이 녹슬고 눈동자가 흙탕물에 잠긴다.
언제쯤 수평선이 회복될까.
먼 데까지 왔다.
가거도 항리 섬등반도 언덕배기, 풀밭에 앉아 바다를 본다.
그 인연이 이 시집을 낳았다.
나는 시집이 나오면 어디서 읽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랑쉬오름의 비가’는 다랑쉬오름에서 읽고,
‘지슬’은 영화 ‘지슬’을 캐낸 큰넓궤(동굴)에서 읽고,
‘이어도 사나’는 이어도에서 읽어야지 하는 생각.
그리고 ‘폐가廢家’는 폐가에서,
‘폐교’는 폐교에서 읽어야지 하는 설렘.
나는 시를 쓸 때보다 시를 읽을 때 더 가슴이 설렌다.
드디어 시집이 나왔다.
이 시집을 들고 제일 먼저 달려갈 곳은 제주도, 제주는 내 시의 고향이다.
제주가 내 시를 키워줬다. 고맙다.
나를 키워준 제주의 아픔을 나도 아파해야 한다.
그런 마음에서 어머니의 숨비소리가 듣고 싶다.
등대는 동심의 등불이요 추억의 등불이다. 추자도의 마지막 유인도인 횡간도에 사는 서씨 노인은 나에게 어려서 소풍 때 바라보던 등대를 보여주며 이런 말을 했다. "아직도 내가 저기 서 있는 것 같다."고. 그는 지금 70이 넘었는데도 그때의 추억을 바라보고 있었다. 추억은 아무리 고통스러웠던 것이라도 반갑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것만 찾아다니고 싶어서 무수한 섬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섬에 가보니 또 다른 섬이 있었다. 그것은 등대였다. 나는 이 외로운 우체통에 무슨 편지를 써넣었으며 그 편지는 별에게 잘 전달이 되었는지 하는 것은 확인하지도 않고 쓰기만 했다. 그 중 어느 것 하나쯤은 별에 가 있겠지 하는 심정으로 쓰기만 했다.
나는 70이 넘어서 박희진 시인과 인사동에 시 읽는 공간을 마련했다. 그리고 매월 엽서를 띄워 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아트사이드에서 시인학교로, 시인학교에서 보리수로 옮겨 다니며 장돌뱅이처럼 시를 읽었다. 읽고 나면 허전해서 다시 섬으로 떠났다. 그렇게 도시와 섬을 오가며 변해가는 세상 모습을 담은 것이 <인사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