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에 걸친 나의 인도 여행 중 나는 늘 붓다를 만났습니다. 몇 년 전에 출간한 《인도신화기행》에서 밝혔듯이 인도 여행은 곧 신화 기행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내게 특히 울림이 큰 신화는 불교와 관계있는 것이었습니다. 첫번째 여행은 인도 신화를 체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여행지의 상당 부분이 불교 성지였고, 두번째 여행에선 첫번째 여행 때 가지 못한 바이샬리를 추가하여 불교 성지를 순례했고, 세번째 여행에선 그때까지 방문하지 못한 불교 성지 상카샤를 다녀왔으며, 네번째 여행에선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와 맥그로드 간지를 다녀왔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불교 신화를 두루 훑어본 셈이니, 나는 나의 여행을 불교 신화 기행이라 이름 붙여봅니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특별히 다른 점이 있다면, 불교는 신화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대신 교리를 가장 중시하는 종교가 바로 불교입니다. 불교가 어렵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의 교리는 그의 생애 속에 이미 녹아들어 있으며, 그의 생애는 다분히 신화를 포함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나는 인도의 곳곳에서 느낀 붓다의 숨결과 신화를 소박하게 적고자 합니다.
돌다보니, 참 형편없는 시를 시랍시고 내놓았다. 그러나 이번 시집이야말로 내 시의 진정한 출발이다. 출발이 형편없어서 안심이다. 형편없는 이 시의 집에는 네 개의 방이 있고, 한 개의 다락방이 꼽사리 끼어 있다. 그 방들 역시 초라하다. 각 방의 문에는 낙서가 휘갈겨져 있다. 수많은 낙서가 있었는데, 나머지는 모두 지웠다. 낙서 중의 낙서만 남았다. 다락방에는 이른바 '시론'이라는 모호한 장르의 낙서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엄밀히 말해 '시론'이라 말할 수 없는 시론이 이른바 '시론'이란 이름으로 낙서되어 있다.
살펴보니, 참 형편없는 시집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형편없는 시집을 시집이랍시고 내놓는다. 사랑하는 것을 좀 더 폭넓게 경멸하기 위해서. 나는 니체의 이 말을 경멸한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경멸한 적이 없는 자가 사랑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1997년 가을 빨랫줄에 빨래를 널며
인도여행은 언제나 신화여행이다. 인도는 어느 곳에 가도 신화가 숨쉬는 땅이다. 인도의 사원은 어디나 신화의 재현이며, 인도의 가정은 신화를 재현한 사원의 재현이며, 식당에도 가게에도 신화를 재현한 사원이 축소되어 있고, 심지어는 버스에도 신화를 재현한 신전이 있다. ... 그들은 단 한순간도 신화를 잊어본 적이 없다. 밥을 먹으면서도 노래를 하면서도 똥을 싸면서도 심지어는 섹스를 하면서까지 신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