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림책 앞에 '유아용'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가. 누가 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에게서 그림책을 빼앗는가. 또 누가 학교도 안 간 아이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그림책에서 글자를 또박또박 짚어가며 읽게 하는가. 글자를 안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그림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글자를 알기 전, 아이들은 그림으로 자기를 표현한다.
그러나 이미 글자를 알아버린 아이들은 그림도 글자와 같은 기호로만 인식하기 십상이다. 어쩌면 그 때부터 아이들에게 세상은 해독해야 할 기호들로 가득 찬 감옥이 되어버리는지도 모른다. 그 아이들이 잃어버린 그림 혹은 자유를 찾아 주기. 그림 안에 세계가 있다. 그 속에서 아이들과 헤엄치기. 그렇게, 아이와 함께 그림책이 내게로 왔다.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서문' 중에서
거인이 슬픈 까닭은
어른이 된 이래로 나는 순전히 어떤 한 가지 감정만 강렬하게 느껴본 적이 없다. 따지고 보면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슬픔과 기쁨과 노여움이 그 비율만 달리한 채 섞여 있는 것 같다.
무엇을 정말로 절실하게 원하지도 못하고, 반대로 심중에 있는 것을 쉽게 포기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런 나와는 정반대인 것 같다. 장난감 하나, 간식 하나를 조를 때의 그 간절한 몸짓, 싸운 친구 얘기를 할 때면 언뜻 내비치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 같은 야멸찬 얼굴, 게임의 규칙을 어겼거나 텔레비전 채널 선택권을 빼앗아간 상대방에게 터뜨리는 분노,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얻었을 때의 기쁨……
뒤돌아서는 순간 잊어버리는 아이들의 그런 감정들은 순간적이나마 거의 완벽해 보인다. 그래서 아이들을 순수하다고 하는 걸까. 중간 단계가 전혀 없는 감정의 극과 극을 하루에도 몇 번씩 살아내는 아이들은 제 안에 우울을 가둘 새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그런가, 아이들은 참 신기하게도 탄력 있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그런 신기한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내 안의 주름살들을 헤집으면서 살 수밖에 없는 나는 아이들이 실컷 아이들일 수 있게 해주고 싶다.
아이들처럼 놀 수는 없지만 나는 아이들 책을 보면서 논다. 내가 좋아하는 클로드 퐁티의 그림책에 슬픈 거인이 나온다. 몸집이 큰 거인은 주인공 꼬마들이 사는 ‘집나무’에 들어갈 수 없어서 슬프다. 그 거인이 꼭 나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쩌면 많은 어른들이 나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가끔이지만 그런 생각으로 어린이 책들을 들여다보다가 머릿속에 꼬마전구가 켜진 것처럼 화안해질 때가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어린이 책 출판은 급작스럽게 활발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린이 책 출판 역시 경제 논리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이 책 매출이 어른 책 매출을 넘어서는 출판사가 늘어난다는 소문이나 공공연히 ‘주부 고소득 부업’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어린이 독서(논술!) 지도 광고를 볼 때마다, 아이들을 위한 이벤트성 사업에 엄청나게 사람들이 몰리는 걸 볼 때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담보로 장사를 하려는 생각만 앞세운다는 염려를 떨칠 수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당연한 흐름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전문가 집단의 성장이 빈약하다.
일반 문학보다 훨씬 더 전문성이 요구되는 어린이 문학에 작가들이나 평론가들뿐만 아니라 출판 담당 기자, 사서, 교사, 편집자들의 정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가장 좋은 독서지도는 아이들이 어떤 책을 뽑아 읽어도 상관없을 만큼 좋은 책만으로 채운 책꽂이를 마련해주는 일입니다. 교훈이나 독후감을 애써 강요하기 보다는 책을 읽고 난 후 뭐라 딱 꼬집을 수는 없지만 마음을 채워오는 감동과 기쁨의 느낌을 스스로 맛보며 책과 친해지도록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