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고전을 읽기 시작한 것은 이러저러한 일로 마음이 힘들 때였습니다. 어려운 일을 혼자 해결하기가 쉽지 않을 때, 이러한 일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친구에게 묻기도 하고 부모님께 털어놓기도 하죠. 저도 같은 심정으로 옛적 어르신들의 글을 찾아 읽게 되었어요. 그 첫 번째 책이《노자》입니다. 2천4백 년 전에 살았다는 이 할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어떤 말씀을 들려주실까? 귀 기울이며 읽었습니다.
(중략)
친구들과 일주일에 한 번 모여《노자》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점 자유롭고 가벼워지는 나를 느낄 때마다 참 행복했어요. 힘든 일을 당장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일은 늘 모양을 바꾸며 다가오게 되어 있는 것이니까요. 그것은 ‘공부할 문제’였어요.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겼을까? 내가 이 문제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일까? 저의 질문은 그렇게 바뀌었지요. 배운 뒤에는 그 일이 나에게 별일 아니게 돼요. 그만큼 성장한 것이죠.
공부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그 문제로부터 배울 자세가 되어 있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여유롭고 평화로워요. 많은 사람의 친구가 되어줄 힘이 생겨요. 자신의 삶을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평화롭게 완성해 나가는 힘이죠. 옛 어른들도 공부를 통해 그런 사람이 되셨지요.
여러분의 삶도 가볍지 않죠. 성적이 오르지 않아서, 친구들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아서, 괴롭히는 선배 때문에, 부모님과 소통이 되지 않아서, 집이 너무 가난해서, 이성 친구와의 관계 때문에…… 수많은 상황 속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어요. 교사인 제가 먼저 뾰족한 방 법 없이 앓고 난 끝에 경험한 공부의 힘을 어떻게 하면 우리 학생들에게 쉽게 전해줄 수 있을까, 염려하고 고심하면서 노자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풀어 보았어요.
조그만 학교와 성당이 있는 작은 마을이 이 책의 배경이에요. 일상 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갈등을 아이들이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지, 문득 옆에 와 계시는 노자 할아버지는 그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아 이들의 놀이터인 성당의 신부님과 학교의 선생님과 마을 사람들, 그 리고 아이들 사이에 어떤 아름답고 행복한 배움이 일어나는지에 대 해 썼어요. 이 책이 여러분의 저 깊은 내면에 이미 간직된 진정한 힘과 지혜를 스스로 발견하는 데 징검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장자≫ 첫 장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시작돼요. 크기를 알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큰 물고기 ‘곤’이 수평선을 가득 채우면서 바다에 모습을 드러내요. 어느 순간 곤은 몸을 바꾸어 새가 되는데 이 새 이름이 ‘붕’이에요. 붕도 얼마나 큰지 날개가 하늘을 덮는 구름 같아요. 붕은 단번에 구만 리를 치솟아 올라 여섯 달을 쉬지 않고 날아가는 에너지를 가진 새예요. 장자 아저씨의 시원하고 거침없는 상상력, 멋지죠?
2400여 년 전에 살았던 장자 아저씨의 이야기를 지금 우리가 듣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글을 쓸 때, 제가 마음속에 두고 대화를 나누었던 독자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여러분, 십 대 청소년들이었어요.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몸이 약하거나 건강하거나, 소심하거나 활발하거나, 날씬하거나 뚱뚱하거나, 남에게 괴롭힘을 받거나 남을 괴롭히거나, 불량하거나 모범적이거나 상관없이 여러분 모두가 장자 아저씨를 만나 대화하면서 자기 안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고, 그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어요.
물고기가 자기 안에 구만리장천을 날 수 있는 새가 있다는 걸 알 때, 곤이 붕이고 붕이 곤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자신을 초월하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최고의 지혜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거예요. 따돌림당하고 상처 입는 초라한 내가 정말 나일까? 친구를 괴롭히는 내가 정말 나일까? 사실은 더 자유롭고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걸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은 아닐까?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가 전부일까? 차원이 다른 세상이 있지 않을까? 내가 확신하고 있는 이것은 정말 옳은 것일까? 지혜를 얻기 위한 첫걸음은 그렇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하나하나 의심하는 거예요.
(중략)
장자 아저씨께서 자주 말씀하시는 ‘도道’는 뜬구름 잡는 막연한 말이 아니라, 그렇게 답을 찾아간 진인眞人들의 툭 트인 세상이에요. 어떤 사람에겐 불편하고 답답한 곳일지라도 도에 이른 사람들은 가볍게 신나게 자유롭게 살죠. 같은 장소에 있어도 서로 다른 세상을 사는 거예요.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무한한 상상력과 직관으로 내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름답고 매력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세상의 모든 존재와 한몸이라는 비밀을 깨달아 가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된다면 고맙겠습니다.
지금 제가 만나는 중학교 학생들과 같은 나이였을 때 저는 ‘고향’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고향이란 고인 물처럼 지루하게 갇혀 있는, 오래된 건물처럼 삐걱대며 낡아가는 삶을 가리키는 말 같았습니다. 가능하면 도시로, 그 도시를 발판 삼아 더 큰 도시로 나가서 새로운 풍경과 문명 속에서 자유롭고 활달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우리 학생들도 비슷합니다. 요행 난개발을 피한 장소의 조용함, 훼손되지 않은 낡음, 보존되거나 사라진 옛 삶의 흔적, 이제 저의 눈에 귀하게 들어오기 시작한 학생들의 고향 공주가 그들에겐 나중에 돌아오더라도 일단은 ‘떠나고 싶은 장소’입니다.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동의합니다. 서울은 물론 런던으로 뉴욕으로 헬싱키로 프라하로 모스크바로 인도로 날아다니며 좁은 틀에 갇히지 말고 살아보라고 응원하고 싶습니다.
그런 정서를 가진 저와 학생들이 마을(지역) 공부를 해보기로 한 것은 그곳이 어디든 우리의 삶은 구체적인 어떤 장소에서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삶의 기반이 되는 장소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곳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을 수 없고, 관계가 허약한 삶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의무도 권리도 온전하게 갖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사는 공주는 어떤 곳인지, 나아가 어떤 곳이 되었으면 하는지, 내 삶의 터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기품 있는 터전을 잃지 않기 위해 가져야 할 관점과 태도는 무엇인지 학생 시절에 배울 수 있다면, 앞으로 어딘가에서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한 지역의 소중한 시민이라는 자긍심과 책임 의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의 고향이 되는 모든 장소와 시간에 좋은 영향을 끼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분 좋은 꿈을 꾸어보았습니다.
꿈은 그러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학생들은 6월이 되어서야 등교했고 그것도 격주로 만나야 했습니다. 처음 부딪힌 온라인 수업의 다양한 상황을 헤쳐 나가느라 교사들도 여력이 없었습니다. ‘10대 청소년의 공주 아카이브’라는 야무진 목표가 얼마나 허술한 모습으로 표현될지 알고도 남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청소년의 눈으로 본 공주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묶겠다는 계획을 접지 못한 것은 동아리 학생들이 써오는 글 때문이었습니다. 잘 쓴 글이라서가 아니라 애쓴 흔적이 역력한 글 속에서 생소한 과제 앞에 선 학생들의 막막함이 읽혀서였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언덕을 넘어보려고 인터넷 자료를 검색하고 할머니 댁을 찾아가고 공산성을 오르내리고 바쁘신 부모님께 인터뷰를 청하면서 글을 쓰는 학생들이 거꾸로 제 마음을 격려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충분한 도움을 주지 못하여 고생을 시킨 것이 미안하고 저의 무능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에 묶인 것은 공주 이야기를 넘어 공주 이야기를 쓴 학생들의 노력과 끈기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시장으로, 버스가 다니는 큰길로 이어지는 골목길도 사람들만의 것은 아닙니다. 산비둘기가 잠시 내려앉는 곳, 고양이들이 장난치며 노는 곳, 하루살이 떼가 몰려다니는 공간이기도 하죠. 우리가 처음 시를 쓸 때는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풍경이 단 두 줄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린 많은 것을 보았어
우린 공책을 들고 창가에 서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하나 적어보았습니다. 산성, 나무, 토란잎, 트럭, 전깃줄, 새, 베란다에 빨래 너는 아저씨. 학교에서 집으로 오고 가는 길엔 공책 한 장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느낌 있는 소재들이 가득했습니다. ‘우린 많은 것을 보았어.’ 그 문장은 이렇게 아름다운 스케치로 바뀌었지요.
괜찮아 우린 많은 것을 보았어
구름이 내려 온 산성의 노란 깃발
열매가 가득 매달린 상수리나무
물방울이 모인 토란잎
페인트가 벗겨진 트럭
빌라 옥상으로 올라가는 전깃줄
전깃줄에 앉은 산비둘기
(중략)
여러분과 해마다 시를 공부하고 시를 쓰는 경험을 할 수 있다니,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집에 실린 여러분의 삶이 뭉클하고 신선합니다. 웃음을 터뜨릴 때도 있고 눈물이 날 때도 있었습니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되돌려주는 원고를 고치고 다시 고쳐 시를 완성한 여러분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우리의 시는 서툴지만, 우리의 발랄한 10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바로 이 시기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고 완벽합니다. 편집부 학생들과 의논하여 시집의 제목을 ‘닮았네, 닮았어’(p.104)로 결정했는데 마음에 드나요? 고민도 있고 아픔도 있지만, 속 깊은 우물처럼 맑은 여러분. 타닥타닥 빗방울, 가벼운 발걸음, 담쟁이의 초록 잎, 높은 웃음소리, 여러분은 정말 닮았습니다. 나도 닮고 싶습니다.
중학교 남학생 어린 제자가 차려준 밥상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퇴근하기 전에 집에 와서 김치볶음밥을 예쁘게 차려놓고 첫술을 삼킨 선생이 맛있다고 하니까 안도의 숨을 쉬며 활짝 웃었습니다. 그 마음이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내게 부족한 것이 이것이구나 알았습니다.
배움은 아름답고도 혹독합니다. 몸으로 깨닫기까지는 다가오는 아픔의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이 책은 학생들과 이웃들로부터 받은 지극한 사랑과 그 속에서 조금씩 눈을 떠가는 저의 사소하고도 즐거운 일상의 기록입니다.
저는 몹시 늦되는 사람이란 걸 알겠습니다. 늦었으니 더 마음을 기울여 이제 한 끼 밥도 정성껏 따스하게 지으려고 합니다. 그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하려고 합니다. 잘 안 되는 때도 있겠지만 방향이 있다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나의 스승인 학생들과 어머님들, 이웃들, 친구들,선생님들께 감사하는 마음 함께 엮습니다.
며칠 전 학교 복도에서 만난 수은이가 “선생님, 백석 시인 아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백석 시인을 알아?”
“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에요.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를 좋아해요.”
우린 손을 붙잡고 팔짝팔짝 뛰었습니다. 팬클럽을 하는 기분이 이런 건가 싶더군요. 수은이와 나는 시인 백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란해졌습니다. 학기 초에 처음 만나 낯설었던 여러분과 시간을 잡아당긴 듯 가까워진 것도 시 쓰기의 덕분이었습니다. 쓰고 고쳐 쓰고 다시 쓰면서 스케치에 색을 입히듯 생생한 생활의 모습을 그려내 보이는 여러분이 예쁘고 신기했습니다. 그 작업이 참 즐거웠습니다.
우리가 다시금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정성을 다해 불러야 할 이름들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가족, 친구, 이웃, 그리고 나, 내가 사는 곳에서 숨 쉬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시 속에서 새로운 빛깔을 입어 마땅한 대상입니다. 그들을 깊은 눈으로 바라보고 펜을 들어 가장 적합한 어휘를 찾고 새롭고 신선한 표현을 다듬어 그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을 세상에 불러낸 최초의 사람, 시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고 듣고 경험한 사소한 것들에 대해 오래오래 생각했습니다. 그중에서 웃음을 짓게 하거나 눈물이 고이게 하거나 문득 어떤 느낌을 주는 장면에 집중했습니다. 한 장의 사진을 찍듯, 장면 안에 담긴 사람과 사건과 배경을 스케치했습니다. 왜 그 장면을 선택했는지, 그 장면을 통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찾아냈습니다. 시집 『반짝일 거야』에 담긴 시들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20대 대통령선거가 끝났습니다. 혁명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빨리 이루어지지도 않는다는 밥 말리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혁명이란 국가권력이나 제도, 관습과 연결된 말이지만 개인의 하루하루에도 깨뜨림이 필요하고 전환이 절실할 때가 있습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평화를 꿈꾸었던 자메이카의 밥 말리는 “그러니 웃으면서 기다리자”고 했지요. 하나의 문이 닫히면 하나의 문이 열린다고. 문은 자주 닫히는데, 닫힌 문 옆에 열리고 있는 새로운 문을 보는 눈은 얼른 떠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 힘으로 열 수 있는 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몸과 마음을 환하게 밝히는 일을 하루에 꼭 하나는 하자, 그런 마음을 먹어봅니다.
머리말
시 쓰기, 혹은 글쓰기를 할 때 부딪치는 가장 큰 어려움은 ‘나를 드러내기’라고 합니다. 자기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 못지않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도 강하지요. 억지로 드러낼 것도 없고 반드시 남들에게 보여 줘야 할 필요도 없지만, 시 쓰기를 포함한 글쓰기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어떤 감정이 오래오래 나를 가두는 감옥이 되지 않도록 빗장을 여는 힘이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는 글은 같은 처지에 있는 독자를 위로하지요. 그것을 ‘공감’이라고 합니다. 쓴 사람과 읽는 사람들 사이에 공감이 일어날 때, 시는 연고처럼 상처에 스며들어 새살을 돋게 하지요. 우리는 그것을 ‘성장’이라고 부릅니다.
『한창 예쁠 나이』에는 친구 간의 갈등, 가족 사이에 일어나는 티격태격, 크고 작은 분쟁, 마음속 아픔에 웃음을 입히며 가볍게 털고 일어나는 시들이 많습니다. 미워하고 좌절하고 비난하고 웅크리는 것이 아니라 따스한 농담과 응원으로 감싸 줍니다. 평범한 일상의 반짝임을 알아보는 여러분, 내 곁에 있는 존재의 가장 예쁜 모습을 찾아내는 여러분의 무한긍정의 에너지가 우리 시집의 가장 큰 매력이고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를 읽고 쓰면서 상처는 아물고 마음의 주름은 반듯하게 펴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