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내 책들은 때때로 나 자신에게 그 문체에서의 감동을 떠올리게 한다. 언어의 탐구, 비유에 대한 연구, 주위 인물들의 탐색, 경치나 집에 대한 느낌, 사건을 만들어내는 일 등등. 어떻게 병렬로 이어지는 문장의 흐름을 짧고 간결하게, 때로는 거의 중략하다시피 하면서 나누었는지 기억하며, 생각의 느린 방랑과 긴 묘사를 얼마나 조심스럽게 함축시키려는 노력을 했는지 기억한다.
나는 항상 정확하고 구체적인 문장을 수축시킨 빠른 리듬과, 또 한편으로는 관능적이고 바로크적인 서술의 확장되고 느린 리듬, 이 두 방식 사이에서 갈등하곤 했다. 때로는 실망스러운 절제에 단호하게 항변하기도 했고, 또 때로는 풍부한 상상조차 포기하기도 했다.
최근 어느 학교에서 <방황의 시절>을 읽은 청소년들이 “주인공 엔리카가 선생님입니까?” 하고 내게 물었다. 물론 엔리카는 나를 닮았다. 그러나 동시에 나와는 다른 모르는 누군가이기도 하다.
주인공들은 우리 안에서 태어나며, 그들은 우리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또 우리가 아니기도 하다. 그들은 고유의 성격으로 성장해가며 특별한 운명을 만들어낸다. 같은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모두 부모의 성격을 닮았지만, 그들 각자의 방법으로 살아가며 또 더러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의외의 일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허다한 것과 마찬가지다.
피란델로Luigi Pirandello가 말했듯이, 소설 속의 인물들은 분명히 그들 나름의 이유를 가지면서 소설 속의 장면을 만들어간다. 내가 만든 주인공들도 내가 예견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싶어 하는 경험을 나는 자주 겪는다.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위해서 그들은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인물들은 언제나 나름의 특별함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자신의 진실한 성격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이고, 반면 작가는 일반적인 관점으로 그 특별함을 희생시키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의 이념을 끄집어낼 뿐, 그 의도는 주인공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들과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제 나는 말할 수 있다. 엔리카는 타인이며, 나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사람이라고. 친근하면서도 또 동시에 너무나 동떨어진 그녀의 길을 천천히 뒤따르면서, 또 그녀에 대해 쓰면서 느꼈던 기쁨을 기억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작가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