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의 유종원은 소지욕기통疏之欲氣通이라고 했다. 통하고자 하면 성글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은 끝이 있지만 뜻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끝이 없는 뜻을 통하게 하기 위해서는 공소한 여백이 요구된다. 말이 많으면 오히려 말에 막히기 때문이다. 공소한 여백이 생동하는 기운, 영성, 예감, 감응 등을 소통시키는 고리이며 이음새이다.
이 점은 야단법석의 전통민예 탈춤 현장에서 좀 더 실감 있게 목도된다. 탈춤의 열두 마당은 고리의 매듭을 마디절로 전개된다. 최초의 터 벌임이나 길놀이 고사에서 뒤풀이까지, 셋과 넷이 처음 아닌 처음에서 끝 아닌 끝으로 돌아가는 이음새에 해당하는 고리가 공소이다. 이 빈터의 마당이 탈춤에서 성속의 소통, 미적 감응의 전이, 관객의 정서적 울림을 불러일으키는 자리이다. 문득 열리는 텅 빈 마당의 소슬함이 없이는 관객의 추임새, 즉 흥취의 물결이 일어나지 않는다. 빈 마당, 공소에서 탈춤의 극적 상황이 수렴되고, 다시 관객들 속으로 그리고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확장이 일어난다. 빈 마당이 창조의 ‘고요한 중심’인 것이다.
그의 시 세계는 독자들에게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방법론과 내용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에게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고 자각하고 향유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미 우리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우주와 자연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시편들은 너무도 익숙하면서 낯설다. 너무도 익숙한 것은 가장 본래적인 자신의 삶을 반사시켜주기 때문이고, 낯선 것은 대부분의 시인들의 경우처럼 불안, 갈등, 절망을 시적 밑그림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시 세계는 대부분의 경우처럼 타인이 가진 것에서 자신의 결핍을 찾아내기보다 자신이 가진 것에서 절대적 기쁨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 예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인식은 세상을 또한 예쁘고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질투는 천 개의 눈으로도 하나도 제대로 보지 못하지만 사랑은 한 개의 눈으로 천 가지를 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과연 그의 시 세계는 세상의 참모습을 다양하게 직시하고 깨워내는 언어를 우리에게 은총처럼 선사해 준다.
자연은 우리의 상상력의 미로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은밀히 말을 건넨다. 그래서 시인은 상상력을 통해 우주적 자아로 진입한다. 따라서 시를 감상하는 즐거움의 궁극은 자연의 영혼과의 대화와 충일한 본래의 자아로의 회귀에 있다고 할 것이다.
세번째 평론집을 묶으면서 제목을 '대지의 문법과 시적 상상'으로 정한 까닭은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한다. 특히 고도 정보사회의 운용원리가 인류의 삶과 영혼을 압도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시적 상상을 통해 원초적인 자연의 운행원리를 표상하는 ‘대지의 문법’을 노래하고 이를 생활 속에 내면화하는 것은 생명가치의 구현을 위한 신생의 출구 찾기와 직접 연관된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대지의 문법'을 추구하는 시적 상상력은 그 자체로 반생명적인 문명질서를 초극하는 21세기형 문화혁명의 원형(architype)으로서의 미적 가능성을 지닌다고 할 것이다. 특히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한 소외, 단절, 해체, 갈등의 병리적 현상 속에서 이를 넘어서는 '창조적 보편성'의 시대정신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우리들의 삶의 존재의 원형에 대한 인식은 '오래된 미래'의 예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 시대 시인들이 노래한 사물의 존재의 근원과 우주적 무한의 관계성에 대한 탐문과 직시의 양상에 대한 이해의 기록물이다. 시인들은 사물의 근원적인 존재의 부름을 쫓아 헤매었다면 나는 시인들이 창작한 시의 부름을 쫓아 헤맨 셈이다. 과문하고 어설픈 자신의 능력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시의 목소리에 눈과 귀를 모으며 30대의 나날들을 보내왔던 것은 지난해 안동 봉정사의 빛의 기억과 같은 전방위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말하고 보면 이 책은 내 삶의 존재의 의미가 되는 아름다운 빛의 신화를 찾는 과정에서 느낀 실망과 희망의 보고서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