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북해를 떠올리게 되었다. 눈을 감으면 나는 달리는 기차에 앉아 있고 바다 위로 펄펄 눈이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기다린다.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 물줄기의 근원과 나의 기원. 오래전에 이미 시작되어 언제나 귓가에 어려 있는 자장가를 소리 없는 입술로 따라 부른다. 깊고 복잡한 이야기를 통과하기 위해 네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나선은 삼차원 공간을 가로지르는 선이다. 오경은 속 깊은 곳이다. 미림은 아름다운 숲이다. 북해의 왕은 슬픔에 잠겨 있다. 그들 은 길을 나섰지만 곧 어디로 가려 했는지 잊었고 그럼에도 계속 길을 걷는다. 부드럽게, 부드럽게. 이것은 노래이고 길고 부드럽게 반복되는 자장가이며 마침내 무겁게 눈을 감는 순간까지 끝나지 않는다.
2021년 우다영
예전에 꿈에 관해 쓴 「암시」라는 글을 여기에 적는다. 네 개의 주석을 달고 싶어서.
읽고 싶은 글을 쓴다. 걷는 사람을 쓴다. 길에 대해 말하자면 한편에는 사랑스러운 네가 있고 반대편에는 사랑스러운 죽음이 있다. 떠도는 모든 사람이 길을 잃은 건 아니다.* 여행하는 모든 사람이 아름다운 이방인은 아니다. 나를 먹은 너는 내 일부가 된다. 실수일까 덫일까. 길에는 나란히 수로가 있는 것으로 하자. 물속에서 우는 물고기를 보았으니까. 누구도 물속에 사는 물고기의 눈물을 볼 수 없지만 수백만 년 후에 생긴 근사한 호랑 무늬는 눈물 자국이다. 기도는 기적의 일부. 나무 한 그루를 심자. 잼이 되기 위해 화가 난 호랑이가 서로의 꼬리를 물도록.** 서로를 먹기 전에 하나가 되도록. 선택을 위해 차이를 만들어. 달과 파도의 약속처럼. 아주 천천히 보면 바뀌는 풍경. 영화 속을 산책하는 침략자.*** 영화에 빠진 너의 얼굴은 아무 표정 없는 얼굴 무방비한 얼굴 관찰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얼굴 그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떠올랐으면.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불의 가장자리가 되기보다 가여운 소문이 되길 원한다. 망설임을 망각한다. 피로와 근육만이 남은 산책자가 이 정교한 꿈을 눈치채면 나는 내가 쓴 글을 지우고 더 이상 읽고 싶은 글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 잼 한 통만이 그립고도 징그러운 암시로 남아 마침내 잼을 좋아하는 너를 떠올리지만 그건 선택과는 무관한 일이다.
또 언젠가 어쩌다 적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메모를 가져온다.
네 사람은 같은 시간을 다르게 지나왔다.
다르게 기억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다른 세계였을까.
또 항상 마음에 맴돌던 목소리를 옮긴다.
세상의 모든 해변이 얼마나 닮았는지,
또 우리가 간직한 이야기는 얼마나 겹쳐져 있는지.
이런 글들을 나열하며 이것이 하고 싶은 말이라고 말한다.
살짝 꼬인 채 연결된 당신을 만나려고.
꿈은 밤보다 길고, 어떤 하루는 영원과 같다.
2020년 겨울에
우다영
* “Not all those who wander are lost”, J. R. R. 톨킨의 말을 번역.
** 핼렌 배너맨, 『꼬마 삼보 이야기』, 더트랜스 옮김, 바로이북, 2017. 사실 호랑이들은 버터가 된다. 잼은 나의 착각.
***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산책하는 침략자」, 2017.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와 영화 속을 산책하는 ‘침략자’ 중 무엇이 먼저일까?
**** W. G. 제발트, 『토성의 고리』, 이재영 옮김, 창비, 2011. 소설 속의 그림 속의 글.